위버멘쉬는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 개념은 힘에의 의지와 허무주의 그리고 영원회귀 사유와의 정합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매개개념으로 사용된다.
위버멘쉬는 영원회귀의 사유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에 의해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이다. 인간의 힘의식이 이렇게 상승되면 그는 영원회귀 사유가 초래할 수 있는 고통과 분열, 몰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그 반대의 가능성인 위버멘쉬로 될 수 있다. 자신을 위버멘쉬로서 인식하는 새로운 자의식에 의해 인간은, 영원회귀 사유를 자신의 몰락가능성을 배제하면서 견딜 수 있으며, 이때 영원회귀 사유는 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이유에서 영원회귀 사유가 인간에게 고통을 유발시킨다고 하는 것인가? 영원회귀 사유는 인간에게 허무적 경험을 유발시킬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성격을 지닌 사유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버멘쉬 [Übermensch, overman]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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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길동무가 되는 길 #아모르파티(amor fati)
니체는 말하기를 "초인이란 고난에 견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고난에게 언제든지 다시 찾아 올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초인, 짜라투스트라에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바로 니체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가볍게 살 수 있을까? 수 많은 고통을 긍정하고 인정하며 삶을 껴 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전 생애를 보냈습니다.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혹독한 문제에서 조차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 삶에의 의지, 이런 걸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초인이 되기를 갈망하지만 초인이 되는 길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동물은 참 묘하게도 서로 경쟁하며 시기와 질투를 넘어 증오와 보복을 하기도 합니다. 죽을 때라야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걸 느끼게 되는, 후회만 남는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초인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초인의 길동무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수확하며, 함께 축제를 벌일 수 있는 동무... 그러나 뿌리는 씨는 똑같은 씨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너는 너의 씨를 뿌리고 나는 나의 씨를 뿌리며 각기 다른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고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며 설령 실패할지라도 위로하고 힘이 되는 친구, 고난도 함께 하며 수확하고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는 것이 초인의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키워내고 가꾸어야할 것이 바로 지혜(prudence), 용기(courage), 절제(temperance), 정의(justice)로 이루어진 덕성입니다. 지금 삶이 고통스러운가요? 니체는 말하기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삶을 살아내는 것이 창조이고 고통에서 구원받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저 피안의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고통을 인내하며 삶을 창조하며 살아내는 매 순간 순간이 구원이며 초인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현장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스스로의 운명을 사랑하라'
[출처] 초인의 길동무가 되는 길|작성자 자유 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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