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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 피어나는 신앙의 꽃
성경본문 : 시편 137: 1-9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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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천성 문 앞에 서 있는 사슬에 묶여 있는 두 마리의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을 천성 문 앞에 엎드려 다 잡아먹을 것같이 으르렁거리지마는 그러나 사슬에 묶여 있는 사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도들에게 위협할 뿐이지 잡아먹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에 가면 곤충 바구미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앨라배마 주는 원래 목화 생산지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바구미 떼가 몰려와서 목화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땅콩박사로 유명한 워싱턴 카버가 이 지역을 연구하여 땅콩과 커피를 심었는데, 엄청난 수확과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구미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바구미의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워싱턴 카버의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땅에 번영을 가져온 바구미 떼에게 깊이 감사하며 이 기념탑을 세운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얼마든지 내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특히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7편은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겪었던 신앙의 고초와 삶의 비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결단을 노래한 탄원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금, 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을 주실 때에, 성전 예배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하며, 불신앙적으로 살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훼파되어 버리고, 성전의 금으로 만든 기명들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백성들마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깨닫고,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노래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에 대한 슬픔은 단순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상실한 신앙적 아픔입니다.
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까?
우리는 인류의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 또는 문화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화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즉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도 합니다.
왜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하나님의 가계를 중심으로 해서, 광야 40년 생활은 성막을 중심으로 해서, 다윗 이후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 오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은 항상 성전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 중심 그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 잡혀와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며,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말은 고난을 당하고 보니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등한히 한 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를 자세히 보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입니다.
혹 몸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고 있으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은
1)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수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지금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현상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에 걸어 놓고 탄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잠을 자다가 머리를 깎인 삼손처럼 신앙의 잠을 자다가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가 다 녹슬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돌이켜 교회 봉사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 바로 세상 속에서 수모와 수치로 나타납니다.
3절에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하며 그 수금으로 노래를 해 보라는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것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나오는데, 지금 저들 앞에서 수치와 수모를 당하면서 어찌 찬송이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절에,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께 노래를 부를꼬?”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잘 살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수모와 수치를 당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애굽이나 블레셋 땅으로 갔다가는 꼭 낭패와 수모를 당했습니다.
교회 생활이 어렵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 반드시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주께로 돌아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벨론에서 수치와 수모를 겪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5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예루살렘을 성전을 교회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반어법으로 하는 말입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우상숭배를 하다가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고 있고,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보면, 심령이 굳어지고 마음의 곤고가 따라오면 육신의 삶도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옛날의 부흥성가 가운데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시122:6절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이렇게 시온을 사모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줄 믿습니다.
창34장에 야곱이 세겜 땅에서 외동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큰 낭패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야곱의 둘째,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세겜 성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를 주겠다.”고 언약하고는 할례 후 고통이 심한 3일 째에 세겜 땅 남자들을 칼로 다 살육해 버립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니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 있는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창35: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온 식구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고는 벧엘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추격하는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일찍이 야곱이 돌을 베개 삼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서 단을 쌓고 서원했던 장소입니다.
벧엘은 이름 뜻 그대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로 우리의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인생 살아가는 길에 고난을 당하거든, 일어나 하나님 집으로 찾아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치 집 떠난 탕자가,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아버지 집을 찾아오듯이 하나님의 교회로 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편을 기록한 사람은,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와 수모를 받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왜 아름다운 성전을 주셨을 때 바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형식적 예배드리다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와서 고생하게 되었구나! 이제 다시는 내가 예루살렘을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라고 합니다.
오른손의 재주, 밥 먹고 글 쓰고 하는 재주,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오른손의 재주는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만큼 뼈저린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될 사람은 고난 속에서 신념을 키웁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마음에 이렇게 다짐하고 결단합니다.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고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찌로다.”
“이제부터는 내가 반드시 예루살렘을, 성전을, 교회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면서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하겠습니다.
본래 “고난”이라는 말 속에는 “소성케 한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다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결단한다면 우리의 삶 소성하고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서 결단하게 됩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지 않는 이상은, 이제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성전을 제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의 꽃입니다.
성도에게 교회는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시온의 복을 성도의 가정에 부어 주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며 뜻을 찾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 같은 미풍이 불어올 때, 오물을 더러운 냄새를 풍기지만, 꽃은 향기를 날립니다.”
우리가 고통은 똑 같이 당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신념을 피우는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이 삶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선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 있다면, 공산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1903년 레닌이 처음 공산주의를 외칠 때는 17명의 추종자 밖에 없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생긴 지 14년이 지난 후에는 4만 명의 추종자가 생겼고, 그것이 러시아 정부를 정복했고, 드디어 반세기가 되지 않아서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95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건방진 소리를 했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입니다.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예언을 하는데, 당신들의 손자 때가 되면, 당신들의 손자들은 전부 다 우리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말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물론 그것은 헛소리였고,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상주의”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습니까?
그것은 레닌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 드나들며 나중에는 4년이나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을 통해 신념을 피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 중에 피는 신념은 무서운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산주의에 눈뜨지 않고, 신학교를 나와서 예수님의 복음에 눈이 뜨여졌다면 기독교 세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통 중에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 피는 신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C.S Louis는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똑똑하게 듣고 신념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처럼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노라 예루살렘을 나의 제일 즐거운 것으로 삼겠노라”고 하며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오늘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 계시는 시온을 사랑하겠다고 마음에 결단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에 부딪힐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웨이런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4,000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바로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미이라였다.”
우리가 미이라가 아닌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 속에서, 실패 속에서 신념의 꽃을 피우고, 그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키시고 귀하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루살렘을 더 사랑하고 제일 사랑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고백하듯이, 오늘 우리도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와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그를 새롭게 하셔서 더 크게 들어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세계에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빌 게이츠입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자산 전체를 다 합쳐도 그 한 사람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가 가진 재산이 약 800억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0조원에 달합니다.
빌 게이츠가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 할지라도, 돈 버는 것을 중단하고 쓰기만 해도 하루에 70억원씩을 써야만 재산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한 일 가운데 획기적인 것 한 가지가, 미국에서 가장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 경영책임자 10명을 선정해서 최고 대우를 조건으로 그들을 영입하여 M.S(마이크로소프트)사를 더 든든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빌 게이츠의 손에 붙들려도 완전 실패자도 성공자로 바꾸어 놓는데,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진다면, 우리의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값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7절 “여호와여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을 노략질하고 도피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성전을 지을 때도 많은 방해를 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단지 에돔 족에 대한 원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에 대한 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돔 자손은, 에서와 야곱의 때부터 시작하여 싸웠고, 출17:에서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해서 사울과 다윗 왕 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바로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하만은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다가 자기가 장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 사람도 바로 에돔 족속의 후예였고,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도 에돔 사람 산발랏 등이 모함을 해서 방해 공작을 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사탄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에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헤롯왕이 바로 에돔 족속, 에서의 후손이었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교인들을 교회에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유혹하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예배의 실패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출17장에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적인 세력을 항상 기도로 물리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 백성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눅18:7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는 7절에서 “에돔 족속을 치소서.”라고 하며
8절에서는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원한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자기들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환하게 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택한 백성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하는 원수 마귀와 세상 바벨론에 대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마귀에게 속고 세상에 속아 고생하고 수모 당한 것, 이제 원수를 갚듯이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탄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을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이라고 말합니까?
계17:18:에서는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키며, 음녀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즉 “여자 같은 바벨론”이라는 말은, 세상이 하나님 백성을 유혹함을 비유해서 말한 표현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도, 거기에서도 바벨론 풍속을 따르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됨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더 좋아 보이는 교인들은, 오늘 말씀을 꼭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지 참된 기쁨과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땅엣것만 바라보고 살다가는 언젠가 크게 실망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백조와 두루미 우화가 있습니다.
물가를 거닐며 고동을 찾고 있던 두루미가 하늘을 나르는 백조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천국에서 왔단다.”
“천국이 어떤 곳이니?”
“천국은 고통과 아픔이 없고 영원한 안식만 있으며, 열두 진주문이 있고, 생명수 강가에는 아름다운 실과가 있는 곳이지.”
“거기에 고동도 있니?”
“아니.”
“야! 그럼, 그런 천국 너 혼자나 가라. 고동도 없는 천국이 무슨 천국이냐?”
예수를 믿어도 땅엣것만 생각하고,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교인들은, 세상 바벨론은 우선은 좋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꼭 성도를 실망시키며 고통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키고, 하나님 백성들을 조롱하고, 성도가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에돔 족속과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을 주었듯이, 마귀와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성도가 고통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 가운데서라도 이를 악물고 마음에 결단하여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나와서 고난의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강영래 목사(인천 주님의영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