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시대
우리는 이미 가능의 시대를 돌파해 불가능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이성의 기획으로 세상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국가라는 레비아탄의 제국주의의 비도덕성과, 파시즘의 대유행, 인종청소, 그리고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너무나 자명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이성 기획의 실체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아직도 그런 이성을 품는 이들이 있다면 무책임한 낭만과 열정, 그리고 짧은 공부를 탓할 수밖에 없다. 나머지 68이후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모든 포스트근대주의자들은 전자정보 자본주의시대 개인을 설명하기 급급하다. 차라리 장님보고 지도를 그리라고 하면 모르지, 시대를 밝히고 이끌어줄 등불 이론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난무하는 욕망의 올가미에 취해 헤매는 영혼들이 있을 뿐이다.
전자정보시대
전자정보시대가 우리에게 가능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불가능의 가능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나 둘을 알고 그것을 삶에서 풍요롭게 누리는 삶을 살 수 없다. 백화점처럼 천 만의 정보 속에 선택하여 그것에 기여하며 살아간다. 정보의 바다는 실로 드넓다. 설사 우리가 허브에 접속해 핵폭발 같은 존재감을 느끼며 새로운 정보와 네트워크를 생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보라! 그게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지구 자체가 사이보그가 되어 가고 있다. 즉 영화 매트릭스처럼 우리는 문화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 문명이 낳은 거대 매트릭스 안에서 태어나 전자정보 문화 안에 자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뉴스거리는 넘치고 당신은 미감, 도덕감, 욕망 등 코드화된 뉴스거리에 쉼없이 반응하며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며 산다. 왜냐면 전자정보가 곧 인간의 페르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체가 전자정보다. 만약 아니라면? 없는 거다. 코드에 인식되지 않으면 없다고 판단한다. 쉽게, 가볍게! 없는 게 결코 없는 게 아닌데.
우리의 존재감은 변화에 가속에 허덕인다. 사회적 상호성이 없을 때 느끼는 공포 대신 우리는 새롭게 주입되는 패르몬에 반응하고 그것이 펼치는 세상에서 기꺼이 목숨걸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이게 실체는 아니다. 그저 현상일 뿐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를 하던 시절은 행복했다. 장자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자문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전자정보는 유령과 환각과 마찬가지지만 더 빠져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개미가 코끼리를 더듬을 때 과연 코끼리의 실체를 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우리가 생산한 정보가 유기적으로 창발적으로 성장하고 형상을 갖춰가는 모습은 생명이 숨쉬는 목숨붙이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한다. 집단지성의 형태로 전자정보의 생명군집은 탈피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식으로 보고 살아야 한다. 코끼리를 알아채는 개미는 거의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추어리즘
나는 줄기차게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했다. 전문가와 프로들의 세련됨보다 자족적 아마추어가 되기를 권했다. 그들이 되고자 몸부림치고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말과 일을 기다리지 말고 네가 내가 되라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무서운 주문인지 안다. 하지만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얼마나 커다란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모두들 결과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비교에 의해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확신하기보다 우리는 권위에 복종하고 영웅과 지배를 욕망한다. 지금 우린 전인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있다. 지식은 넘치지만 무지에 빠져 산다. 지식이란 삶 안에서 적용되고 확인된 것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걸 모른다. 교사, 의사, 정치인, 은행원, 법률가 ... 별 희안한 전문가들 속에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애초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 우리의 사유란 왜 이렇게 좁고 안일할까? 차라리 말하지 않는 사람이 현명하다. 삶이 프로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전자정보시대의 사이보그레비아탄 속 개미부속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렇지만 진리(참)에 대한 갈증이 있다면 멈춰 통찰하고, 각성해야 한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므로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고 제 안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의 나침판이 시키는 대로 행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아마추어들이 걸아가야 할 길이다.
맹자와 순자
맹자와 순자는 성선설과 성악설로 대조된다. 둘 다 공자의 제자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우리는 둘을 조화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삶은 어느 한쪽의 선택으로 이미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순자의 입장에서는 낭만적 이상주의자이다. 개인의 인(사랑)에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 한편 맹자의 입장에서 순자는 지나치게 소심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공자의 예를 더 강조하여 법과 교육제도 같은 형식을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생명주의자와 환경보호론자의 차이와 같은 구도이다. 둘이 모두 대동사회를 꿈꾼다고 해도 둘은 결국 대립될 것이다. 생명에겐 역동적으로 창발하려는 순간이 오고, 이것은 현실의 제도와 한계를 깨뜨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변화의 불안 때문에 생명은 쉼 없이 틀(예절, 제도, 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정답이 있다고 말하지 말자. 오직 깊고 넓게 투철하게 보고 응시하고 그에 맞게 행할 뿐이다. 말은 조금, 그리고 즐겁고 치열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