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8(월)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인연 (피천득)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한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콩과에 속하는 일년초. 나비 모양의 꽃)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 피는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1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은 사월이었다.
도쿄 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
(남의 집 딸에 대한 높임말, 영애라고도 함)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하였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는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됐다고 치하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 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그리워 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책소개
시인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선생의 수필『인연』은 <산호와 진주>속에 들어있던 시와 수필에 수필 몇 편을 더해 낸 수필집으로 딸 서영이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내용과 더불어 지은이에게 있어서 수필의 의미를 소년같은 마음과 순수한 감성을 바탕으로 그려냈다.
저자 소개
피천득(皮千得)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특유의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여 남녀노소 모두에게 고른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이자 수필가. 2007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대중들에게 감동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1910년 서울 출생. 호는 금아(琴兒)이다. 상해 호강대학에서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경성대학 예과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및 사법대 교수를 역임했다. 191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을 발표하면서 문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는 자연과 동심이 소박하고 아름답게 녹아 있다는 평을 얻었고,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그려진 그의 수필은 남녀노소에게 고른 사랑을 받아 대표작 ‘인연’을 비롯하여 ‘수필’ ‘플루트 플레이어’ 등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금아 피천득의 수필은 백 마디 천 마디로 표현해야 할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수표의 언어 안에 함축시키는 절제가 돋보인다. 그리움을 넘어서 슬픔과 애닯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피천득의 미문美文은 언제, 어느 때 읽어도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으로 『꿈』, 『편지』 등의 시와 『여성의 미』, 『모시』 등의 수필 외 다수가 있고, 시문집으로 『산호와 진주』, 『생명』이 있다.유명 작가의 길을 걸었으되, 장식품 하나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소탈하면서도 충일한 삶을 살았던 그는 ‘앵두와 어린 딸기 같은’ 오월에 태어나 오월에 떠난 ‘영원한 오월의 소년’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머물고 있다.
일요일 아침 새벽 3시에 기상을 했습니다. 오늘은 절두산 성당의 꾸르실료 교육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 성당 두분의 형제님을 위한 새벽 4시의 마나니따 행사에 꼭 참석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 혹시 새벽 3시에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자명종을 비롯해 핸드폰의 알람에도 보륨을 높혀 놓았던 탓에 정각에 기상하긴 했으나, 잠자리 중간에 수차례나 기상을 했기에 선잠을 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전 3시 10분 집을 나와 승용차로 마포를 거쳐 용산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새벽이라 도심의 도로는 아주 한가했기에 불과 30분만에 용산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성당 앞 도로엔 함께 마나니따 행사에 갈 형제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분들과 함께 마포구 합정동 소재의 '절두산 성당'으로 향했고 불과 10분만인 오전 3시 50분에 꾸르실료 교육관 3층에 입장했습니다. 창가에서 바라본 한강변의 야경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서울시내의 각성당에서 수많은 꾸르실리스타 형제 자매님들이 마나니따 행사에 참석하시어 붐볐습니다. 이번 꾸르실료 교육에는 우리 성당에서 함께 구역장으로 활동했던 임베드로 형제와 원소광 형제가 입소했는데 이는 유래가 없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화교출신인 원프란체스코 형제분이 입소한 것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총구역장직을 수행할 때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준 이 두 구역장님이었기에 새벽미사가 끝나고 귀가 꾸르실료 사무실에 들려 작은 정성이지만 빨랑카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절두산 성당을 나온 우리 용산 가족들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마포 먹자골목에 위치한 해장국집에 들려 선지국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실로 오랫만에 마나니따 행사에 참석해 심신이 강한 많은 꾸르실료스타 형제 자매님을 뵐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 없었습니다.
아침 식사후엔 새벽에 용산 성당에서 승용차에 동승했던 분들을 용산성당까지 모셔 드린 후, 마포와 이화여대 정문 앞을 경유하여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집으로 귀가를 서둘렀고, 아침 9시쯔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때서야 잠시 설친 잠의 피로를 이기기 위해 눈을 붙혔습니다.
딸과 사위와 함께 한 멋진 점심식사
점심시간 쯔음 자리에서 일어나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밥은 먹었니? 요즘 먹고 싶은 것은 없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아빠와 엄마가 우리집으로 놀러 오세요"라는 것입니다. 하여 사위와 딸아이에게 맛있는 점심이라고 사먹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우리집과 딸아이 집의 딱 중간 지점인 과천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과천 소재의 "강릉동치미막국수식당"은 동문회를 하면서 자주 이용했던 곳으로 이 무더운 날에는 동치미국이 들어간 막국수가 입맛을 돗구는 데는 최고의 별미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강릉동치미막구수"식당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냥 별로라고 생각했다가 정작 인터넷으로 조회한 결과 괜찮은 식당이라는 것을 알곤 딸아이와 사위가 수락한다는 멧세지가 왔기에 우리부부는 과천으로 달려가 딸내외와 조우하였습니다. 고향 강릉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병과 수육을 맛본 딸아이와 사위가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어 동치미 막국수에도 반하고 말았습니다. 아~! 흐믓했습니다. 정말 참 이곳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 엄마에게서 점심 대접을 잘 받은 것에 감사하다며 사위와 딸아니는 우리 부부에게 식후 디저트를 잘하는 집으로 가자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오늘 오후에 행사도 있기는 했지만, 좀 늦더라도 딸아이의 청을 들어 주어야 할 것 같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과천시내에 위치한 "설빙"이라는 카페에서 맛본 과일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빙수 등의 맛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아~! 요즈음은 이런 것이 다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날씨가 무더운 폭염탓인지? 아님 워낙 설빙의 과일 아이스크림 등의 맛이 좋은 탓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엄청 사람들이 붐빌 정도였기에 이에 또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지요.
새로운 꾸르실료스타 탄생 환영식 행사 참가
딸내외와 헤어져 부랴 부랴 집으로 귀가를 서둘렸고, 집에 마나님을 모셔 드린 후 곧바로 집 앞에서 1711호 시내버스를 타고 용산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저녁 6시 30분 꾸르실료 교육을 이후한 두명의 형제분이 본당 교육관 206호 실에서 울뜨레아 회합시 교육소감 발표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어 뒤이은 환영식 행사에서는 분명 酒님을 과하게 모실 것 같아서 차를 끌고 가지 않고 버스를 탔던 것입니다. 어떻든 아슬 아슬하게 행사 개최 前에 도착하여 임베드로와 원프란체스코 형제의 감동적인 교육 소감을 듣곤 가슴이 뭉쿨했습니다.
환영식 파티장
신입 두분의 형제님의 교육 소감을 청취하고 회합을 마친 후에 신입 꾸르실리스타와 더불어 선배들의 환영식을 겸함 단합대회가 원효로 4가 소재의 한 음식점에서 조촐하게 개최되었습니다. 상기인은 지난 1년前 이사를 간 관계로 용산 성당을 떠나 종로의 세검정 성당으로 교적을 옮겼지만, 지난 날 함께 구역장 활동을 했기에 우정 참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아~! 정말 아주 많이 행복한 자리였습니다.
감격적인 행사를 잘 마치고, 마포공덕 4거리에서 1711호 시내버스에 승차하여 오늘도 서울 도심의 야경을 차창을 통해 마음껏 감상하였습니다. 마포에서 용문동 시장, 남영역, 서울역, 광화문, 자하문터널, 상명여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지나 밤 10시 50분쯤 집에 무사히 귀가했습니다. 새벽 3시에 집을 늦은 밤 귀가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으나 그 어느 날보다 아주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