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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광주공고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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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맥산악회 스크랩 9. 백두산,동북3성(만주) 역사기행- 심양 그리고 서울
김승태(28) 추천 0 조회 1,316 17.10.19 16: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덟쨋날 2017.08.05 (금)]-흐림 

오늘은 여행 마지막날이다

08:00 - 아침식사후 호텔로비에 모였다

5성급인 심양 켐핀스키호텔은 중산 광장근처에 있으며, 

깨끗하고 부페식인 식당은 메뉴가 좋은편이다.

호텔 앞에는 행사를 위해 공연자들이 전통복장과 악기로 대기중이다.


호텔앞의 풍경

08:30  -호텔 퇴실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승차 출발

첫번째 가는곳 중산광장, 가는길엔 일제시대 건물이 건재하다.

이곳은 황실 가족들이 많이 살아서 땅속에 보물을 많이 숨겨 놓았었다

모택동이 풍수를 엄청 믿었고.

길림성에서 왕자가 나올수있다 해서, 산을 3개나 없애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길림성 출신 총리가 나왔다

 모택동 동상

혈맥을 끊기 위해 동상을 세웠으며, 손은 북경 방향으로 향한다

중산광장 주변 시내 건물들


피곤한가 보다 그래도 버스는 달려

08:50 - 인근에 있는 황제의절 실승사(황사)
황스 광장옆에 위치한 실승사란 절이다
- 실승사의 원래이름은 연화정토실승사이며, 
1396년 청나라의 두번째 개국황제인 청태종이 명하여 수축한 사찰이기에
 황스(황사)라고도 부르며,  티벳불교 사찰로 
라마교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색다른 모습이다.




.

염불소리가 우리나라 절에서 처럼 울려퍼진다. 불경내용이 비슷하다 

승려 들이 불공을 드린다

다시버스에 올라

09:30 - 북릉 공원앞 광장에 모였다

북능(北陵)공원 입구. 원 명칭은 소릉(昭陵)이다

북릉앞 모습 

청조 2대황제인 태종과 황후가 잠들어 있는 소릉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

45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원내는 동호 청년호수등이 있고

광장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이 많다

자전거도 있고 

셔틀버스를 이용하는것도 낭만적이다요금은 그리 비싼편은 아니다.

공원에는 많은사람이 모여 춤도추고

청 태종 홍타이지(중국식 이름 : 애신각라 황태극)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청나라 황족의 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건륭황제의 명으로 쓰여진 <만주원류고>에 자신들의 조상이 신라 김씨에서 나왔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조상의 나라인 신라를 잊지말자라는 뜻으로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성씨는 만주어를 중국어인 한자로 표기하면서 빚어진 진짜 오해다.

애신각라(愛新覺羅)이란 원 뜻을 풀어보면 애신(愛新)은 만주어로 씨족 명이며

()을 뜻한다. 각라(覺羅)는 성씨인데 청 태조 누루하치의 조상이 최초에 살던 지방이 

각라(覺羅)지방(지금 흑룡강성 伊?지방)으로 이 명칭을 따서 성씨로 삼았고

원래 만주족 발원지는 흑룡강성 영고탑(寧古塔) 옛성 동문 부근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이라는 성씨가 뜻하는 것은 황금처럼 고귀하고 신성한 각라(覺羅)족이란 뜻이다.

공원을 관리 인부들, 일하는 속도가 만만디다  

삽으로 흙한번 뜨는데  5분은 걸리는거 같다

뒷 사람 기다리고

입구의 좌우 측에 서있는 비석. <官員人等至此下馬>라고 써 있다.

관리와 사람들은 이곳에서 말에서 내리라는 명령이다.

 

능에 가는길에 귀신 침입방지로 여러 석물이 세워저있다 

사자상 이나, 실물과 많이 다르다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 가 좋아, 

능앞에 호수를 파고 그흙으로 능 뒤에 쌓았다

가는길 재주를 보여주는 사람이 많다 

하루종일 빗자루끝에 달린 붓에 물을 묻혀, 바닥에 한자를 쓴다

모래 글씨장인

한국 잘못썼다 그래도 한문은 대단하다


해금을 켜는 솜씨도 대단

소릉(昭陵) 입구 

정홍문(正紅門)

1649년 청 태종 아들인 순치제 때 지어졌는데 

삼공문(三拱門)중의 정문으로 신문(神門)으로 불리며,

동쪽에는 군문(君門) 서쪽에는 신문(臣門) 있다.

정홍문(正紅門) 오른쪽 벽의 용 조각

청 태종 홍타이지와 황후인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박이제길특(博??吉特)의 무덤이다. 만주어를 한자로 표기하여 다시 한글로 옮기니 희안한 발음이 나온다.

 사실 박이제길특(博??吉特)이란 이름은 몽골어로 보르지기트란 발음을

 한자표기한 것으로, 징기스칸을 비롯한 몽골황족의 성씨이다

징기스칸의 이름이 보르지기트 테무진이었고

청태종 홍타이지의 부인도 몽골에서 온 황족이었다.

같이 춤도춰보고

청나라 천태종과 관련한  이야기 한토막


청 태종은 우리에게 치욕스런 상처를 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격전(電擊戰)이란 용어가 19392차 대전 세계대전 시절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처음 나온 용어인데 

이미 300 여 년 전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하면서 사용했다

조선은 산성을 중심으로 목 좋은 곳에 성을 쌓고 방어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청나라는 힘든 산성을 공격하기 보다 몇 천 명 정도의 견제 병력만 남겨놓고

 만주족 기마병을 이용하여 바로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질풍처럼 진격했다.

16364월 청 태종 홍타이지가 황제에 즉위하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청나라 세력권 안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지만 

국제 정세에 어둡고 외교의 ""자도 모르는 조선 국왕 인조와 그 신하들은

 이미 저물어 가는 태양 명나라의 명분에 목을 매고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했다

물론 조선이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르는 청나라와 맞짱을 뜰 힘이 있었으면

 모를까 쥣뿔도 없으면서 명나라 사대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조선을 구할 능력은 커녕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어 쳐들어 올까봐 

마지막 보루인 산해관(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을 걸어잠그고 

청나라 눈치만 볼 때이니 어찌 조선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까?

청나라는 명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배후의 조선이 걱정되었다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갈 때 조선이 자신의 고향인 심양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일단 조선을 자신의 세력권에 가둬놓고 중원의 명나라와 싸우려고 

조선에게 명나라 대신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지만 조선은 거부했다.

만약 조선이 인조가 아닌 광해군이 있었다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혹시 병자호란이란 전란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조선, 청 태종은 먼저 조선을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총 동원령을 내렸다.

만주족 팔기군과 한족, 몽고족 군사를 포함하여 대략 20만 정도로 추측된다.

청나라 선봉인 기병 6,000명이 1636122일 선봉대장 마부대의 지휘로 심양을 출발하여 

128일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통과했다

 6일 만에 심양~의주 간의 250km를 달린셈이다

지금의 자동차가 아닌 말을 타고. 청나라 기병이 지나는 길목인 의주의 백마산성에 

임경업장군이 있었지만 교전을 피하고 그대로 남하했다

그리고 1218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심양을 출발한지 거의 보름만에 서울에 당도했다.

, 사절단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전투하러 온 것인데 보름만에 조선의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는 것은 교전을 거의 안 했거나 방해하는 조선군이 없었다는 얘기다

청나라 군사가 온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왕자들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튀어서 그 추운 겨울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의 농성에 들어갔다

인조는 전국 각지에 공문을 띄워 근왕병을 모집하여 자신을 구하라 명령했고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자의 조상으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장군도 

청나라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싸우다가 경기 용인 험천에서 전사했다

이렇듯 각지에서 달려온 근왕병은 어느 하나도 청나라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본진과 함께 온 청 태종은 1229일 한양에 입성한다

그리고 조선국왕 인조는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1637130일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꿇고 항복했다.


오랑캐와 마주앉지도 않겠다고 했던 조선은 병자호란에 박살나고

땅은 넓고 인구는 적은 청나라에 50 만이 넘는 조선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포로로 끌고 갈 때 조선 정부와 무시무시한 약속을 했다

만약 압록강을 넘기 전에 도망가는 포로는 죄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땅에 도착한 후 도망쳐 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선국에서 책임지고 뒷꿈치를 잘라 다시 청나라에 압송해야 한다고.

조선 전국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아비가 자식이 끌려가는 것을, 남편이 아내가 끌려가는 것을, 자식이 부모가 끌려가는 것을 봐야했다

나중에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은 거금의 돈을 지불하고 구출해왔지만 조선 정부차원에서는 단 한 번도 송환노력을 한 적 없었다.

 

여기서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안추원(安秋元))은 지금의 개성이 고향이었는데 13살에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심양으로 끌려갔고 만주족인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이사했다

 1662년 조선 현종 때 40살이 넘은 안추원은 드디어 26년 만에 북경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만리장성 관문인 산해관에서 잡혔다

다시 북경 주인에게 인계되었지만 2년 뒤 1664년 다시 탈출을 감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도착했다. 의주부윤의 심문에 그가 살았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얘기했고,

그 내용을 보고 받은 현종은 차마 청나라와 약속을 했지만 자신의 백성을 청나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부모형제, 친척 등이 없는 고향에서 살 길이 막막했던

 안추원은 먹고살길을 찾아 다시 북경으로 되돌아가다가 청군에게 붙잡혀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외교분쟁이 생겼다.

안추원의 불법적인(?) 귀국을 문제삼아 청나라는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사신을 보내 조선국왕 현종을 추궁하며 죄를 물었고, 사신들은 수 많은 금품을 뜯어갔다.

그 후 더욱 슬픈 일이 벌어졌다.

 1674년 숙종 때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년 후 안단(安端)이란 사람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그를 

의주부윤은 그를 체포하여 청나라 측에 인계했다

몇 년 전 안추원 사건으로 호되게 당한 것을 경험한 조선 관리들은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입국을 거부당하고 다시 청나라로 끌려가는 안단(安端)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청나라로 끌려간 여자들도 댓가는 혹독했다

대부분 만주족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본처가 질투를 하여 끓는 물을 끼얹기도 하고,

요행히 고국으로 돌아와도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 파혼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지금 몸을 파는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바로 환향녀(還鄕女), 

'고향에 돌아온 여자'에서 나온 말이다

나라에서,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 더럽혀진 몸 그것이 어찌 그녀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때 낳은 애들을 데려왔는데, 오랑케자식 이라해서 호로자식이라한다.

(채과장이 한얘 기를 종합하여 발표 기록된 이야기를 간추렸다)

12:00 - 한국식 감자탕 집에서 접심을 먹다


점심 전에 고궁을 가느냐 재래시장을 가느냐로 의견이 분분하여 

투표로 재래시장행 결정

그런데 점심 후에 동문가족들이 갑자기 더운데 왜 재래시장을 가나?

차라리 백화점을 가자는 의견으로 투표 결정에 불복

(?)이 아닌 산악대장님의 '기본을 지키자'는 강력한 주장으로 시장투어를 하기로.

 

시장으로 가는 길에 심양 시내의 아파트 근처 도로에서 처음으로 차음벽을 보다.

이는 한창 개발 중인 시점에서, 개발보다는 국민의 삶의 질을 우선한다는 의미여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다양성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78일간 동북 3성을 여행한 거리는 총 2,300Km. 

8자를 좋아하는 중국인. 발음이 '파오!' 여서 부자되세요란 뜻

8888 차번호를 경매하는데 178만 위안에 낙찰

휴대폰 번호도 당연히 경매.

가방을 앞에 매면 내 꺼, 옆구리에는 반반, 뒤에 매면 남의 것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결국 절충하여 재래시장 앞 백화점에 들어가다

13:20 - 시장투어를 마치며 이번여행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가기위해 심양공항으로 이동한다

그동안 8일동안 수고한 현지가이드 채용창과장과 작별후 

공항에 들어섰다.

출국심사 시에는 별 3개를 단 여성 장군이 업무를 보고 있다.

입출국 심사가 매우 까다로웠다

사드 배치 문제로 당국의 심기가 매우 부편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17시 출발 예정인 비행기는 1시간이상 오지않고,

기다리는동안 잠시 휴식


출발예정 약 한시간 반 후 우리를 태우고갈 중국남방항공 CZ 0671항공기가 도착

20:00  - 드디어 이번여행의 종착지 인천공항을 향해 갑니다


기내식으로 저녁을 먹고


인생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즐거운 여행을 마칠시간

21:30 -  저기 아래 인천공항이 보인다 우린 이렇게 

7박8일간의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 


  유쾌함과 말솜씨로, 여행 기간동안 지루하지않게 해주었고 

항상 기록에 열심이었던 김양배 동문이 여행을 하는동안 느낀내용을 올린다

 

중국특징

여기 중국에서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오락시설이나 관광지에서는 

   입장 시에 개찰검사를 2회를 한다는 점. 매우 불편하다

   아마 탈세방지 목적이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행기표도 두번 개찰을 한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의 서비스 개념이 없다.

   인구가 많다 보니 친절보다 신속과 효율성의 가치가 우선하는 것 같다.

품질이란 단어를 질량이라고 말한다.

대륙의 주차가: 인도에 주차선을 그어놓고 주차하고 있다. 사람 다니는 데 매우 좁다.

대도시 외에는 신호등이 거의 없고 있어도 잘 지키지 않는다. 바닥에 유턴, 좌회전 표시가 없으나

   회전  교차로(로타리)이 많아 교차로에서 정체가 없다.

어디서나 민주 자유 화목 평등 법치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특히 학교 외부벽에는 

   거의 다 게시하고  있다.

 

거리에 빨간 글씨 천지, 우리나라 해병대를 연상하게 함.

호텔 변기는 좌변기, 그 외 관광지 내나 휴게소 등 공공시설 화장실은 퐁당퐁당 푸세식 변기

   수천년간의 배변 습관을 단기간에 바꿀 수가 없는 듯.

현대 디자인으로 시설된 버스정류장에는 광고판만 크게 있음. 버스번호는 한쪽에 매우 작게 표시됨.

관광용이 아닌 버스는 좌석간 거리가 매우 좁음.

2차선 왕복도로는 폭이 좁고 상대편 차량과 교차할 적에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거의 부딪힐듯이 지나침. 가슴벌렁.

버스 등받이 뒤의 그물망이 없어 가벼운 쓰레기 처리가 곤란함.

생수병이 강도가 약해 번데기처럼 휘어짐. 뚜껑열 때 거스러미가 있어 손가락이 다칠 수가 있고 

   뚜껑이 잘 안닫힘. 유원지에서 산 생수를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니 

   그 충격으로 작은 구멍이 나버린다

   생수를 싼 비닐 봉지도 너무 약해 들고가는 도중에 찢어져 버린다.

남자는 웃통을 벗고 다니거나 배를 드러내고 다닌다

   인구가 많다보니 개인주의가 예절과 공공성보다 우선하고 서로 용인容認해 주는 것 같다.

백두산 관리소 운영차량에서 차내 안내방송이 무수히 나오지만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래도 관광에 전혀 지장없다

공공장소에 침을 뱉는 사람들이 많다.

여자들은 화장기 없는 얼굴이 많고 수수하며 사치하지 않는다.

중국을 이끄는 것은 역시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 지도체제의 정치력과 무기인거같다


  

이상 이번 여행을 모두 마치고, 다음편으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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