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공부를 한 내용입니다.(265). 복습을 합니다.
재즈와 미국 흑인
재즈를 유일하게 독특한 미국적 예술 형식이라고 말한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재즈는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후에 유럽의 클래식, 미국의 음악과 결합한 일종의 퓨전 음악이다.’
재즈는 약 100년 전에 미국의 남부 흑인들에 의하여 생겨났다. 따라서 뉴올리언즈 재즈, 혹은 딕시랜드(미국 남부의 델타 지역으로 면화생산지이다.) 재즈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크레올인(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로, 주로 백인 농장주와 흑인 하녀 사이에 태어났다.)이 살았다. 이들은 이전의 흑인 노예보다는 문화적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수준의 유한계층이었다.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 리듬과 피아노 곡을 결합시켜서 자주 연주했다. 이것을 렉타임이라고 불렀다.
렉타임을 재즈 형식의 뿌리라고 부른다. 이처럼 뉴올린언즈 재즈는 클래식과 유사성이 많다.
19세기 말에 미국 남부 지방에서 발전한 재즈는 20세기에 접어들자 해방된 흑인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북부로 이동했다. 재즈 음악도 함께 북쪽으로 이동했다.
1917년에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스토리빌’이라 불리던 남부의 매춘지대가 폐쇄됐다. 이곳에서 연주하면 생계를 유지하던 음악인들이 연주 공간을 찾아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상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재즈 시대가 막을 올렸다.
미국 문화사에서 1920년 대를 ‘재즈시대’라고 말한다. 미국의 번영과 여유로움, 사회적으로 들뜬 분위기를 재즈 음악이 잘 표현해 냈다.
1929년 10월의 검은 목요일에 주식이 폭락하면서 미국은 대공황으로 빠져들었다. 재즈 음악도 변화가 왔다. 루이 암스트롱도 유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민들도 전통적인 재즈 대신에 달콤한 형식의 재즈를 찾았다. 흔히 ‘빅 밴드 재즈’라고 불리는 스윙은 엄밀한 의미에서 뉴올리언즈 재즈와는 궤를 달리하는 백인 재즈였다. 당시에 대중의 인기를 얻은 베니 굿맨, 글렌 밀러, 토미 도시의 악단은 모두 백인 재즈밴드였다.
금주령 시절의 음습한 무허가 술집에서 연주하던 재즈 악단은 호텔이나 사교 클럽에서 춤곡으로 연주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어 버린 스윙은(이 시기를 스윙 시기라고 한다.) 대다수의 백인에게는 이전에 갱단이나 밀주, 매춘녀 등을 환기시키던 흑인 재즈와는 전혀 다른 재즈로 인식했다. 이것은 재즈 음악의 상업화를 의미했다.
백인 중심의 보수적이고 사회 순응적인 재즈에 반발하여 새롭게 생겨난 재즈 형식을 ‘비밥(Bebop)이었다. 찰스 밍구스, 찰리 버드 파크, 디지 길레피스 등의 혁명적 음악가에 의하여 주도된 비밥은 ’뉴올리언즈 시대로 복귀‘를 외쳤다. 이들의 주장은 퇴행적 복귀가 아니고 상업화된 재즈에 맞선 진보적인 음악이었다. 당시의 음악인들은 이 음악 운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방가르드로 치부했다.
지금까지 대강 언급한 것이 재즈 음악사이다.
재즈 음악은 흑인의 감수성이 강하게 깔려 있다.
남북전쟁을 겪은 남부의 흑인은 백인 주인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 자립은 어려웠다. 그들은 자립의 수단으로 뉴올리언즈의 남부 도시로 몰려들었다. 흑인에게서 밴드맨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의 뉴올리언스는 남부 최대의 유흥도시였다. 연주자에 대한 수요도 아주 많았다. 코레올인들은 클랙식괴 서아프리카 토속 리듬을 접목시켜서 렉타임(블르스, 흑인 영가와 함께 재즈 형성에 공헌한 피아노 음악을 말한다.) 흑인 연주자들은 이것을 어깨너머로 배워서 자신들의 생계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즉흥연주 등의 재즈 음악의 본질을 보면 아프리카인의 행사에 연주하는 종교적인 음악의 특성도 보인다. 따라서 아프리카 음악은 자연스럽게 무당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무당들이 에스터시 상태에서 춤추고 노래하듯이 재즈 연주가들도 의식의 세계를 넘어서 지산이 의식 못하는 상태에서 연주했다.
즉흥연주가 발달한 또 하나의 이유로는 당시의 연주가들이 지적 수준이 낮아서 악보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결국은 곡의 주요 멜로디만 외워서 연주할 수 밖에 없었다. 연주 중에 자연스레 편곡이 되었다. 재즈는 보컬이 없는 기악만의 연주였으므로 편곡이 잘 일어났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1차 대전이 끝난 후의 1920년대는 미국이 번영하면서 북부로 인구의 대이동을 따라 재즈 음악이 확산했다.
(스윙 재즈란?)
스윙재즈의 발생 및 발전
스윙(Swing)이란 단어는 "흔들리다, 흔들거리다"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 그대로, 스윙재즈는 율동감을 음감에 담아내고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스윙재즈의 음악적인 요소들은 시카고 시대부터 있었던 것들이지만, 스윙 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확대되고 발전되어 완성되었다. 스윙감을 주는 제일 큰 요소는 박자에서 온다고 볼 수 있는데, 기존의 2박자에 서 4박자 재즈로 발전된 점이다. 4박자는 보통 때 박자를 세는 식으로 "원, 투, 트리, 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 & 투 & 트리 & 포 &"이라고 하면서 "그리고(And)"에 악센트를 탄력있게 줌으로써 강한 율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박자를 "Off Beat"라고 부르며, 스윙 시대에 있어서 재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스윙 재즈가 나타난 시기는 1920년대 말 즈음부터였다. 세계 경제공황이 1929년에 일어났으므로, 이 당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라고 할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스윙 재즈는 상대적으로 사회 분위기에 파묻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해고를 당한 재즈 음악가들은 큰 밴드(Big Band)에 흡수되는 경향을 보이고, 밴드가 커짐에 따라 즉흥연주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어 즉흥연주보다는 바리에이션 형태로 연주하게 된다. 스윙 오케스트라에는 흔히 백인과 흑인이 함께 섞여서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으며, 이들은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써 악보를 볼 수 있었으므로 미리 정확하게 편곡을 하여 연주하였다.
경제적인 이유 및 그 당시 유행하던 댄스음악 계통인 "스위트 뮤직 (Sweet Music)"으로 인하여 계속 빛을 보지 못하고 있던 스윙재즈는, 드디어 백인 클라리넷 주자인 베니 굿맨(Benny Goodman)이 로스엔젤레스의 팔로마 볼룸에서 성공을 거둔 것을 계기로 하여(1935년) 본격적인 스윙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어서 그가 1983년 1월에는 클래식만을 공연해 오던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재즈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며, 이후 위상에도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첫댓글 흑인 문학에서 다분히 튀어나온 억압과 성도구, 그리고 속박, 가난은 우리의 한국사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문학을 대중화 시키고 어둠을 깨어 비상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잠시 목울음을 쓸어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