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마가복음 제1강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본문 / 마가복음 1:1-15
요절 /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러분,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는지 말해 줍니다. 그러면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책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하나님이 천지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는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재창조역사의 시작, 즉 복음의 시작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심판받아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들로 새롭게 인도하는 역사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재창조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만물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새봄학기, 우리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재창조의 역사인 구원과 영생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소유하고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여기 ‘복음’은 ‘good news’로 기쁜 소식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새 황제가 등극하면 “복음이다. It's a good news!” 이렇게 외쳤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새 시대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에 벅차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말은 이미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었습니다. 황제숭배 때 사용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저자 마가는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적용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은 영어로 “The good news”로 되어 있습니다. “유일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로마 사람들에겐 기쁜 소식일지 몰라도 식민지 백성에겐 최악의 소식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고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인간은 그 어떤 사람도 인생들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따름이며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자 마가가 알리는 복음은 누구에 대한 것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복음)이 무엇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고통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를 즐길 때는 달콤하지만 금방 쓴맛을 보게 됩니다. 죄 때문에 삶이 괴롭고 비참합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이런 고통과 지옥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구원자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이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자 마가는 이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전해지는 사람마다 새 생명을 얻고 참자유와 행복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죄로 인해 어둡고 광야같이 삭막한 세상에 널리 널리 퍼져나가야 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이 복음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사야서를 비롯한 구약전체를 통해 예언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예비하고 그 길을 준비할 사람 또한 예언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요한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의 뜨거운 태양빛에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몸에는 아무렇게 자란 털로 뒤덮였습니다.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고독과 싸우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타락한 그 시대를 향해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하늘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긴 침묵을 깨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의 메시지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불방망이와도 같았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5).” 식민지 치하에서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하며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죄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사장들의 값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영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영혼의 영적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의 메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립니다. 우리는 괜히 상처를 주거나 관계성이 나빠질까봐 회개의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합니다. 죄 문제는 덮어두고 현실의 어려운 문제만 도와주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문제가 어떠하든 죄 문제를 터치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극심한 가난과 질병과 포악한 헤롯왕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볼 때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했습니다. 요한은 그 시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근본원인은 죄 때문이요,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임을 간파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관점이며 하나님의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죄 문제를 회개하도록,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요한이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강력한 영적각성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임시적인 위로나 잠시 웃고 지나갈 개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근본 문제를 짚어주고 해결해 주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사모합니다. 회개하여 죄를 내보낼 때 우리 영혼에 주님이 계실 자리가 생기며 주님이 계시면 구원받고 참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떻습니까?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6).” 요한은 사명을 위해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낙타털 옷은 서민들이 입는 옷입니다. 가죽 띠는 장식이 없는 가장 흔한 허리띠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은 서민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백화점에서 구입한 명품코트, 고급 레스토랑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왜 이런 삶을 살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삶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메시지의 생명력은 선지자다운 life style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 부부의 노년에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호의호식하고 즐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사명 중심의 삶을 살도록 키워졌습니다. 요한도 사람인지라 광야에서 고독한 영적 투쟁을 할 때 많은 시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적 부담을 주는 사명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주 예루살렘 고향집에 가서 부모님이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즐기며 편히 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스포츠 경기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모든 안락함의 유혹과 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방해받지 않는 광야에 머물며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졌습니다. 광야 속의 고독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깊이 기도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광야의 영성을 통해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불타올랐습니다. 죄 가운데 거하는 백성들을 향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심정으로 전했을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당시 제자들은 스승을 사부로 대하며 종처럼 섬겼습니다.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발 끈을 푸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그것조차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종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자기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들러리로 만족한 것입니다. 들러리는 신랑 옆에서 신랑을 빛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영화에서 주연을 빛나게 해주는 데 필요한 엑스트라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들러리를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며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8절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요한은 자신이 할 일과 예수님이 하실 일을 잘 알았습니다. 물세례는 죄 사함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실제 능력입니다. 그는 물세례를 주면서도 죄 사함은 오직 예수님만 주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지만, 이들을 변화시키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들러리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대 위에 오르자, 그는 조용히 무대 뒤로 퇴장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제물이 되어 일생을 마칩니다. 요한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높이기를 원했던 사람이었고 자신의 증언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 죄인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갈라졌다’의 원어 의미를 직역하면,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마가복음 15장 38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한 번 더 사용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8).” 여기 ‘찢어져’의 의미는 하늘이 갈라졌다 할 때 ‘갈라져’의 의미와 같습니다. 또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이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의미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고 땅에는 특별한 제사를 통해 잠깐 내려오셨다가 즉시 올라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더 이상 하늘과 땅,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은 남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 끝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이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작정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는 분명한 의지요, 결단입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의 사명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께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선포하시는 대관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 구원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메시야, 그리스도로서 공적인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그 후 성령께서 예수님을 어디로 몰아내십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는 인간이 살기 힘든 땅입니다. 척박하고 황량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40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시험받으신 것입니까? 인류의 조상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함입니다. 시험받는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시험받는 우리를 도우시려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친 광야에서 40일 동안 최악의 조건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심으로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원더풀 카운슬러가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난과 시험을 당하는 것은 시험당하는 영혼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시험받는 동안 누구와 함께 있었습니까? 들짐승과 함께 계셨습니다. 들짐승은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외로운 광야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물들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해칠 수 있는 짐승들입니다. 이 모습은 원형경기장에 내몰려 사나운 짐승들과 함께한 성도들을 연상시킵니다. 신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13b절을 보면,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욱 경험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 성과 성벽이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 더욱 깊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당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현실은 광야와 같지만, 실상은 더욱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모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들짐승과 같은 악한 자들, 좋지 않은 상황 형편들이 자꾸 나를 괴롭힐지라도, 천사들이 나를 수종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나의 친구,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현실이 광야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의 현장이 광야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가운데서 나의 친구가 되시고,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더욱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요한은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러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여기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그때가 드디어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떠합니까? 롬14:17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죄 사함이 있고 참된 치유가 있고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마11:5에서 말씀합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모시는 삶의 영역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삶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도 못 사고, 맘 착해도 못 얻는 나라입니다. 오직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는 죄를 지성적으로 인정하고 감성적으로 아파하고 의지적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아파하지만 미래에 바른 삶을 살겠다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후회는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는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아파하고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완전한 방향 전환입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생각대로의 삶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 그 이상을 말합니다.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말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내 삶의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돈만을 추구했던 사람은 돈보다 예수님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사랑과 인정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면 그 사랑과 인정 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구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안락함만을 위해 몸부림쳤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과 헌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변화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 삶에 재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자기중심, 자기 생각을 따라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관점이요, 고통스러운 삶의 쓴맛만 더욱 느끼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 성경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얻고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주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어둠의 터널을 지나며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평강, 감격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