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의 주택에는 사랑채가 없다. 사랑채에 거주할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손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문화를 수용할 사람이 없기도 하다.
우리가 청년이 될때도 사랑방이 사랑채에 있어 가끔씩 손님이 오시기도 했고 아버지가 동네분들의 土亭秘訣을 보아 주시기도 했고 구수한 이야기도 하셨고 갑순이와 갑돌이의 궁합도 보아 주시기도 하고 윗마을 을순이와 우리마을 병식이와 假想 결혼을 시켜 보고 웃기도 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에서 음식을 준비 하기도 하였다.
우리집 사랑채는 馬頭 에 계시던 할아버지 친구분 古표재술할아버지가 건축 하셨는데 내 나이가 세살에서 대여섯살때 인가 보다. 성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분의 윗입술은 정상이 아니었으나, 솜씨나 머리가 뛰어나서 방에다 옷장겸용으로 쓸 수있는 곳을 마련하고 사랑방은 빈소(영혼을 무시는 곳)를 넣을 수 있게 하셨고 변소는 사랑방옆에다 설치한(실내변소?) 그런 분이 셨는데 막걸리를 아주 좋아 하셔서 생마늘을 안주로 드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소를 사랑에 마련 하였는데 대구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올때도 인사드리고 대구로 갈때도 인사를 드리고 하였다. 이제 이사랑채도 다 허물어져 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힘들게 지은집이라 헐지 말라 하신다. 초등학교 친구중 강춘석과 김병우의 고향집에도 사랑채가 없어지고 거기에 따른 정신적 문화도 사라져 버렸고 우리 고향집 사랑채도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