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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팔타커스 ]
영화 <스팔타커스>의 시작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였습니다. 59년 가을에 공개된 벤허는 대작중의 대작이었습니다. 영화 제작 초기 단계에서 벤허 역으로 거론된 배우는 커크 더글라스와 찰톤 헤스톤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헤스톤은 그다지 유명한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커크 더글라스는 마이클 커티즈, 라울 월쉬,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하워드 혹스, 빈센트 미넬리, 아나톨리 리트박, 킹 비더, 리차드 플라이셔, 존 스터지스 등 헐리우드에서 당대의 내노라 하는 명장들과 작업한 이미 대스타급 배우였습니다.
그런 커크 더글라스가 벤허 역을 탐냈지만, 윌리엄 와일러의 <빅 컨트리>에 출연한 찰톤 헤스톤에게 빼앗긴 후 그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자신이 직접 제작하고 지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생각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스팔타커스>였습니다.
<스팔타커스>의 감독으로 처음에는 <엘시드>, <로마제국의 멸망>을 만든 안소니 만이 고용되었지만 커크 더글라스에 의해 해고당했습니다. 촬영장에서 커크 더글라스와의 대판 붙었다는 게 가장 유력한 정설입니다. 그래서 과거 <영광의 길>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영국 출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 큐브릭 역시 영화 촬영 내내 영화제작에 대한 권한을 행사한 실질 오너인 커크 더글라스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영화의 완성 이후에 “다시는 바지사장 역할을 안 하겠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더글라스는 로맨스가 어우러진 영웅의 일대기를 만들고 싶어했고, 다소 냉소적인 큐브릭은 멜로드라마적 감동을 자아내는 인위적인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작가주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 있는 거장(큐브릭)과 기세가 높은 헐리웃 거물(더글
라스)의 만남은 이렇게 불화 속에 마무리 되었지만 다행히 영화는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긴 러닝타임 동안 한 틈의 지루할 시간을 주지 않는 스펙터클한 영상과 멋진 대사, 완벽한 연기와 호흡, 적절한 긴장감의 조율 등 어느 것 하나 <벤허>에 모자랄 게 없던 이 영화는 큐브릭에겐 평생의 떨쳐내고픈 인연이 되었습니다. 이후 공식자리에서도 종종 <스팔타커스>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했던 큐브릭에게 이 영화의 촬영은 꽤나 고된 일이었나 봅니다. 배우 캐스팅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화였습니다.
영국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크라수스를, 또한 <폭군 네로>에서 능글맞은 연기를 보였던 피터 유스티노프가 약삭빠른 검투사 양성소 소장으로, 놀라울 만큼 다양한 연기를 보여준 개성파 배우 찰스 로튼이 크라수스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셈프로니우스를, 준수한 용모의 존 개빈이 줄리우스 시저(실제 당시 시저는 27세였으니까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없는데 이 영화에서는 원로원 의석에 버젓이 앉아 있었습니다)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고혹적인 자태의 아름다운 여배우 진 시몬스가 스팔타커스의 연인 바리니아를, <바이킹>에서 커크 더글라스와 호흡을 맞췄던 토니 커티스는 크라수스의 노예였다 혁명을 원해 스팔타커스에게로 향하는 영민한 청년 안토나이너스를 맡았습니다. 각각의 캐릭터에 완벽히 맞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과 장엄한 세트와 음악들이 이 영화를 더욱더 빛내주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하워드 패스트는 매카시즘의 광기가 미국을 강타할 무렵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투옥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스팔타커스>의 이야기를 구상했고, 출판사들의 거절로 인해 결국 자비로 소설을 출간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각색을 맡았던 달톤 트럼보 역시 매카시 선풍(5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쓸었던 빨갱이 색출 광풍)에서 쫓겨나 있었던 인물입니다.
커크 더글라스는 이런 당시 풍조에도 불구하고 달톤 트럼보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 올려놓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당시 트럼보는 가명으로 여러 영화의 각본을 쓰고 있었을 정도로 숨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커크 더글라스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실명으로 공개했고 이는 헐리우드에서 그가 진정한 용기와 의리의 상남자임을 다시 한번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스팔타커스>는 여러 장르를 골고루 섭렵한 천재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유일한 시대물이면서 헐리우드
대작 영화의 걸작 중 걸작인 추억의 영화입니다. 그저 커크 더글라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감상적인 영
웅담 정도로 폄하하기에는 되새겨 볼 거리가 많은 대작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 간략한 줄거리 ]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태생의 스팔타커스는 리비아 광산에서, 쓸 만한 검투사 재목을 찾으러 온 바티아투스의 눈에 띄어 검투사 양성소인 카푸아로 끌려갑니다.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에서 강도 높은 훈련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던 스팔타커스는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 바리니아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검투사 양성소를 방문한 로마의 실력자 크라수스 일행은 바티아투스에게 목숨을 담보로 한 실제 검투 경기를 열 것을 요구하고, 그 경기에서 스팔타커스는 자신과 맞붙은 동료 노예가 자신을 찌르는 대신 크라수스 일행 쪽으로 창을 집어던지고는 그 대가로 목숨을 잃는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스팔타커스가 우발적으로 교관을 살해하는 것을 시작으로 노예 검투사들은 양성소를 장악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근방의 노예들과 함께 베수비오 산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로마를 벗어나 자유를 되찾을 길을 도모합니다. 검투사들의 세력이 커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로마 원로원에서는 도시수비를 맡은 보병대를 파견하지만 스팔타커스가 이끄는 노예군은 이들을 손쉽게 격파하며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노예군이 바다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결정적인 순간, 배를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실레시안 해적들이 등을 돌리자 사면초가에 놓인 노예군은 결국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에 섬멸되고 맙니다.
전쟁 중 스팔타커스의 아기를 낳은 바리니아는 가까스로 도망을 치는 와중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는 스팔타커스의 눈앞에서 바리니아는 그들의 아기가 이제 자유의 신분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스팔타커스는 십자가 위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습니다.
[ 스파르타쿠스의 난 ]
기원전 73년. 로마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카푸아라는 도시의 검투사 양성소에,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라는 검투사가 있었습니다. 트라키아(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있는 지역)의 왕자라는 전설(그러나 당시 트라키아는 수많은 부족이 난립한 야만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는 고작 해야 한 부족장의 아들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 있는 그는, 어느 날 74명의 동료와 함께 양성소를 탈출합니다.
* 스파르타쿠스군(청색)과 크라수스군(홍색)의 동선
양성소에 있던 무기를 가지고 나와 근처에 있는 베수비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때때로 산에서 내려와 주변의 농장을 약탈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로마 정부에서는 치안을 진정시키고자, 소규모 토벌 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베스비오 산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150년 뒤에 대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를 화산재로 뒤덮게 되지만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렇게 민둥산이 아니었습니다.
* 로마 콜로세움 옆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 유적
검투사들을 중심으로 한 노예들은 숲으로 가득한 베수비오 화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토벌군을 무찌르는 데 성공합니다. 그들은 일당백의 검술과 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로마 당국은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잇단 승리의 소식이 주변 각지로 퍼져 나가면서 근처의 대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예들이 가래나 괭이를 버리고 베스비오 산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게 진행되자 로마 정부에서는 조금 더 신경을 쓴다고 법무관 휘하 2개 군단(15000명)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모여든 노예의 숫자는 로마군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고, 계속해서 적을 얕잡아 보았던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들어 패배하고 맙니다.
* 검투사 양성소가 있던 카푸아의 원형 경기장 유적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쿠스는 노예들 사이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약탈을 반복하며 남하하는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점점 불어나 거의 7만에 이르게 됩니다. 영화와는 달리 여기에 참여한 것은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하급 노예나 빈민들로서 노약자는 거의 존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력이 커지는 만큼 내부의 혼란도 커졌습니다. 특히, 트라키아 출신으로 알프스를 넘어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두목격인 스파르타쿠스와 갈리아 출신으로 물산이 풍부한 이탈리아 남부의 약탈에만 목적을 두고 있던 부두목격인 크릭수스 사이의 분쟁은 커져만 갔고, 결국, 부두목인 크릭수스는 절반에 가까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진영에서 이탈합니다.
* 크라수스
한편, 다음 해인 기원전 72년에 이르러 로마 정부는 그해 안으로 이 반란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이번에는 집정관 두 명을 투입한 본격적인 토벌군을 편성하였습니다. 그들은 각각 2개 군단 15000명씩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4만)와 크릭수스(3만)에게 각각 맞섰습니다.
본래 약탈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던 크릭수스의 군대는 가르가노 산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전투 끝에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와는 달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의 예상과는 달리 진로를 북으로 바꾸어 알프스 방면으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에 두 명의 집정관은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그의 뒤를 쫓아야만 했고, 결국, 두 부대가 집결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피체노 부근에서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반격에 나선 스파르타쿠스는 먼저 추적해온 2개 군단을 격파하였고, 뒤이어 다른 집정관이 이끄는 나머지 2개 군단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 영화에서...
그 후에도 북상을 계속한 스파르타쿠스는 루비콘 강 부근에서 갈리아 총독의 지휘로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고 있던 대략 2개 군단의 부대와 마주쳐 이것도 격파하고 맙니다. 로마로서는 망신을 당할 대로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군대조차 사라진 지금, 스파르타쿠스의 앞길을 막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향하는 것뿐. 그러나 처음부터 고향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와는 달리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생활에 익숙해 있으며, 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노리고 그의 밑에 들어온 부하들과 많은 노예는 그의 결정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 당시 검투사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홀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으며, 그들의 말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메시나 해협을 건너 풍요로운 시칠리아로 가기로 했습니다. 4만 명에 달하는 노예군은 이탈리아 남쪽 끝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그 곳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전연패하던 로마는 자존심과 질서를 지키려고, 남은 예비군을 재편하여 8개 군단 총 5만에 달하는 군대를 편성하였고, 이의 지휘관으로는 로마 제1의 재력가이자 실력자였던 법무관 크라수스가 맡았습니다. 사실 크라수스 지휘를 맡은 건 당시 로마에서 그만한 군사를 모을만한 재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
그는 군사적 경험도 거의 없고 특별한 군사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지만(아니, 군사적인 감각으로서는 도리어 보통 이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8개 군단이라는 대규모 부대를 맡게 된 것에 압도되어 있었고, 에스파냐에서 정적이기도 한 폼페이우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전투에 유리한 요건 등을 무시한 채, 무작정 스파르타쿠스군의 앞을 가로막기 위해서만 신경 쓰다가 첫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소규모 부대가 적의 세력에 밀려 도망쳐 버린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은 거의 없었지만, 이 패전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노예군을 포위하기 위한 애초의 계획이 틀어졌고, 그나마 예비군뿐인 토벌군의 사기가 심각하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 스파르타쿠스 난 전투 삽화
이러한 문제는 명백하게 그의 전술적 판단 착오였지만, 그는 다른 방법으로 토벌군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바로, 스파르타쿠스군을 맞아 도망쳐 버린 1개 중대를 처벌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군에 대한 본보기로서 행해진 이 처벌은, 로마군의 가장 엄격한 형벌인 이른바 ‘10분의 1형(decimatio)’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추첨으로 뽑힌 60명의 병사를 나머지 540명이 집단 구타를 해서 처형하는 이 처벌은, 본래 반기를 든 병사들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처벌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몽둥이,돌멩이,채찍,곤봉 속에 죽어가는 동료를 본 군대와 스스로 몽둥이를 들어 동료를 죽여야 했던 병사들은 그 분노를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으로 향했습니다. 결국 메시나 해협을 넘어 시칠리아로 향하려던 노예군은 로마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인근 산속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험한 산이라고 불리는 이 산악 지대는 노예들이 도망쳐 들어가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이 산악지대는 아스프로몬테(험한 산)라고 불리울 만큼 험한 곳이어서 오늘날에도 강도들이나 도적이 도망쳐 들어가면 군대를 동원해도 찾아내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영화에서...너도 나도 일어나 " I'm Spartacus!!" 라고 외치는 장면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노예군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평원으로 나왔고, 산 아래에서 그들을 추적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던 로마군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과 협정을 맺고, 브린디시로 가서 그곳에서 그들(해적들)이 보내주기로 약속한 선단을 이용하여 소아시아로 달아날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맞는다면 산에서 내려와 로마군를 깨고 급히 브린디시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게지요.
격전이 벌어졌지만, 전투는 비교적 간단히 종결되었습니다. 숫적으로 양편이 비등했지만 사기가 오른 로마군단에 노예군은 완패를 당하였고, 수만에 달하는 시체가 쌓이는 것으로 종결된 것입니다. 포로로 잡힌 6천 명은 크라수스의 명에 따라 주인에게 반항한 노예에 대한 가장 무거운 형벌인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그 행렬은 가히 수십 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하지만, 그 행렬 속에 스파르타쿠스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전사했기 때문에 사로잡히지 않았겠지요. 그가 무사히 도망쳐 살아났다는 전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듯, “내가 스파르타쿠스요! ”라며 그를 두둔하는 가슴 뿌듯한 장면은 당연히 연출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근대 이후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인문 사상의 발달과 함께 점차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자유와 관련하여 많이 이야기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호소력이 있는 사건이기에 지금도 헐리우드에서도 영화나 미드로 자주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 영화에서...로마 남부를 휩쓸고 있는 노예군
[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갑부였습니다. 재력의 뒷받침으로 법무관이 되었고 이어서 스파르타쿠스 난을 진압하는 토벌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난의 진압으로 그는 로마 정계의 거물로 자리 잡았고 이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최초의 삼두정치 일원이 됩니다. 이 때 쿠라수스는 56세, 폼페이우스는 47세, 카이사르는 40세라는 약관의 나이였습니다.
* 폼페이우스
* 카이사르(시저)
이 세 사람이 로마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쿠라수스의 정치적 앞날이 가장 어두웠습니다. 그는 군사적 치적이 별로 없는데다가 특히 인망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탐욕스럽고 지저분하게 돈벌이에 몰두하는 것이 그가 인망을 얻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특히 부동산과 관련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악명이 높았는데 그 수법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 악덕 부동산 부자
크라수스는 집에 불이 난 서민들에게 달려가 토지와 주택을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집주인들은 화재로 집을 완전히 날리기보다 단 몇 푼이라도 건지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고, 크라수스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집을 넘긴 것입니다. 크라수스는 소방훈련을 시킨 노예들을 투입해 화재를 진압했고, 집주인이 팔지 않으면 집이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방관했습니다.
매입한 토지에는 더 크고 높은 건물을 세워 분양함으로써 짭짤한 수익을 남겼습니다. 항간에는 크라수스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대부분이 크라수스 수중에 들어갔다"고 기록했습니다.
* 당시 로마의 서민 주택(일종의 주상복합형태, 인슐라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진행됩니다. 카이사르가 집권하기 이전의 로마는 도시 내에 자체적인 경찰이나 소방서가 없었습니다.(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창설되게 됩니다.) 그래서 술라에 의해 도시 치안을 유지하는 특별한 치안대가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도적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예로 어느 집에 불이나면 크라수스는 이 도적같은 사내들을 이끌고 그곳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 집을 자신이 원하는 가격을 불러 팔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불을 꺼준다고 말합니다. 만약 집주인이 그것을 거부하면 크라수스는 집이 불바다가 되도록 놔둡니다. “다 타고 팔래?, 그냥 싸게 팔래?"하는 식이었습니다.
집주인이 크라수스가 불러준 가격대로 팔겠다고 하면 그제서야 사람들을 동원해 불을 끄고 그 집을 아주 싼 가격에 사서 적당히 재개발해서 파는 수법으로 재력을 키웠습니다.
* 파르티아 원정,죽음
60대에 들어선 크라수스는 초조해집니다. 로마 제일의 보호인 크라수스에게 부족한 것은 군사적 명성이었습니다. 3두정치의 한사람인인 폼페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깡그리 소탕하면서 개선장군으로써 시민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다른 한사람인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연일 승리의 소식을 보내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동방 시리아 총독을 맡아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적 명성을 쌓아 볼 요량으로 부임하자마자 인근 파르티아 제국 원정을 도모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적 훈련에 힘쓰면서 준비를 탄탄히 해도 모자랄 형편인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여기 와서도 가장 열심히 매달린 것은 현지의 보물들을 약탈하는 일이었습니다.
* 당시 파르티아 왕국
총사령관의 이런 행동은 아래 부하들에게도 전염되는 것인지 강건했던 로마군의 정신은 사라지고 이들도 약탈을 꿈꾸는 도적떼가 되어갑니다. 그야말로 천하의 로마군단이 오합지졸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크라수스의 이런 점 때문에 로마시민들도 처음부터 그의 시리아 부임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합니니다.
크라수스는 총 7개 군단에 약간의 오리엔트 용병 그리고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의 참모로 활약한 본인의 아들과 그가 이끄는 갈리아 기병대 1천기까지 총 4만 명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합니다. 군사적 능력이 떨어지는 크라수스의 이와 같은 원정은 거의 자살 행위와도 같았습니다.
* 시리아에 있는 팔미라 유적
크라수스는 시리아 사막을 건너 메소포타미아 일대(현재의 이라크 북부 지역)로 들어왔을 때 길잡이가 되어주기로 약속한 아랍인 귀족이 보이지 않자 지형마저도 제대로 파악을 못하게 되고 사막에서 고립되게 됩니다. 한편 파르타아 왕국은 유능한 수레나스라는 젊은 귀족이 파르티아 기마병 2만 기를이끌고 떡하니 로마군 앞에 나타납니다. 그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는 점에서 파르티아 왕궁에 제일가는 인물이었습니다.
크라수스는 오리엔트군은 중무장 기병이 주력이어서 초반 강력한 돌격을 펼칠 것을 감안하여 각 중대마다 기동력이 없지만 좀 더 견고한 정사각형 대열로 군사들을 배치합니다. 그러나 이 꾀돌이 수레나스는 애초부터 파르티아 군을 중무장 기병에서 궁기병 위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천마리의 낙타 등 위에 화살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게 해 궁기병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화살을 공급받도록 합니다.
* 파르티아 궁기병
전투가 시작되자 돌격해 올 줄 알았던 파르티아 기병은 돌격 대신 빙빙 돌면서 화살만 들입다 쏘기 시작합니다. 한데 뭉쳐서 방어하는 로마군 병사들 위에 화살들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양떼 주위를 달리면서 양을 한 마리씩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티아 궁기병들의 화살 사정거리도 길어서 멀리서 쏘아대니 가깝게 접근하기도 불가능했습니다.
보통 노련한 로마군이었으면 사령관이 뭔가의 명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 대형을 유지하며 버텼을 테지만 크라수스 밑에서 기강이 해이되고 훈련이 소홀히 했던 로마군은 그것을 못 버티고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 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었지만 크라수스는 병사들보다 더 허둥댑니다.
그는 아들이 이끄는 갈리아 기병 1천기를 봉쇄를 뚫어 보라고 출진시켰지만 이들 기병대 1천기도는 결국 파르티아군의 함정에 걸려 몰살당합니다. 물론 아들 크라수스 역시 전사합니다.
밤이 되어 안정을 취하며 위기를 돌파할 묘책을 강구해야 할 마당에 크라수스는 아들 잃은 것을 한탄해하며 울며불며 난리를 치자 백인대장들이 그가 포로가 되어 수치스러운 꼴을 안 당하도록 칼로 등을 찔러 죽여줍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의 대부호 크라수스는 머나먼 중동의 사막에서 62살의 나이로 고혼이 되어 버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네가 그렇게 황금을 좋아했다며?” 하며 붙잡혀온 크라수스의 목 안으로 황금을 녹여 부었다고 합니다.
* 황금을 녹여 목에 붓는 장면
기원전 56년, 4만 명의 크라수스 원정군은 이렇게 패배했고 달아나 목숨을 건진 사람은 1만 명이 채 안되었습니다. 단 며칠 동안의 전투에서 로마는 7개 군단이나 되는 병력이 군단장, 대대장, 백인대장 및 은독수리의 군단기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기원전 216년 칸나에 회전에서 한니발에게 7만 명을 잃은 대패 이후 로마군단의 두 번째 패전이었습니다.
‘약장 밑에 강졸 없다’라는 속담을 생각게 하는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해 파멸해버린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크라수스였습니다.
[ 천하무적, 로마군단 이야기 ]
* 로마 병사의 갑옷
로마 군단은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군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의무라기보다 시민으로서 누리는 하나의 특권으로 간주했고,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 가운데 하나는 전장에 나가는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나 노예들은 아예 로마군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시민병들은 각자 자기 무기와 갑옷을 준비하여 싸우고, 그러한 장비를 휴대한 사실 자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로마 공화정 때, 로마 고유의 정치적 특성과 전투 환경에 맞는 로마 군단이 창설되었습니다. 로마 군단은 상비군도 아니고 직업군인도 아니지만 잦은 전투경험과 평시에 정기적인 꾸준한 훈련을 통해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로마 군단의 전통에 대한 긍지와 조국애가 지극했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 잘 싸울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단은 이탈리아의 산악지형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방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밀집대형을 유지하면서도 개개 병사의 기량을 중시했으며, 이를 위해 개개인 간격을 넓히고 전체대형 내에 여러 전술부대를 운용했습니다.
로마 군단에서 기초전술 단위부대는 10×12(10오 12열)명으로 구성된 중대로서, 이러한 중대들이 수십 개 모여 로마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중대 대형은 전술적 상황에 따라 종심(縱心)을 달리하며 6×20 또는 3×40의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들을 지휘한 우두머리가 바로 그 유명한 백인대장이었습니다.
로마 보병들은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대별되고, 중보병은 다시 하스타티, 프린키페 트리아리 등 3종류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들은 연령별로 편성되었는데, 하스타티는 25~30세, 프린키페는 30~40세, 트리아리는 40~45세에 해당하고, 벨리테스라고 부르는 경보병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병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연령별로 중대를 편성한 이유는 동일한 전투경험과 체력을 기초로 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또한 전우애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 군단은 제1전열에 하스타티 10개 중대, 제2전열에 프린키페 10개 중대, 제3전열에 트리아리 5개 중대를 모아 주력부대를 형성하고, 제1전열 전방에 벨리테스 10개 중대의 정찰부대를 배치했습니다. 따라서 1개 로마 군단은 총 4,2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양측방에는 기병 10개 소대 총 300명을 나누어 배치해 로마 군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로마군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전투상황에 따라 다르나, 통상 최고사령관인 통령은 4개 로마 군단 정도를 지휘했습니다.
* 군단 배치도
로마 병사들이 사용한 무기는 그리스 군대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들은 장창 대신 투창을 사용했고, 주무기는 글라디우스라는 로마 검이었습니다. 이 검은 22인치(약 56cm)의 양날 검으로서, 육박전을 전개하면서 적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글라디우스 검
투창은 약 20m 거리에 이르렀을 때 던지는데, 제대로 맞으면 아무리 튼튼한 갑옷도 관통할 만큼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무기로 말미암아 로마 시대의 전쟁방식은 그리스 시대보다 한층 더 살상도가 높고 잔인했습니다.
로마군은 평지뿐 아니고 구릉과 산비탈 지역에서도 싸웠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전장 선정은 중요했으며, 적보다 높은 위치를 점령하면 투창을 던지는 데 단연코 유리했습니다. 또한 태양과 바람을 등지고 싸우는 편이 적의 움직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잘 싸울 수 있었습니다.
나팔 신호와 함께 전투가 개시되면 로마 군단은 고함을 지르며 전진했습니다. 가장 먼저 최전열의 벨리테스 중대들은 투창을 던져서 적진을 흔들어놓고, 그 후 뒤따라온 주력부대 사이사이로 후퇴했습니다. 이어서 하스타티 중대들이 투창을 던지고 검을 휘두르며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밀리거나 기진맥진하게 되면 프린키페 중대들이 전진해 구원했습니다. 트리아리 중대들은 매우 위급하거나 또는 최후 상황에서 노련한 수법으로 틈새를 통해 들어가 전투를 결정지었습니다. 양측방의 기병은 보병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적 기병과 교전하고, 아군의 승리가 확실해질 때는 벨리테스 중대들과 함께 추격전을 전개했습니다.
각 전열 간 교체 및 협조는 사이사이 기동공간을 통해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각 중대 간 좌우간격은 중대의 폭만큼 넓었고, 앞뒤 전열 사이는 활 사거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70m 정도를 유지했습니다. 로마 군단은 그러한 충분한 공간을 활용해 기동성과 신축성을 살리면서 장소·시간· 적이 다른 여러 가지 전술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단이야말로 고대 서양 전술에서 꽃 중의 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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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를 통해 옛 로마시대의 번영과 패망을 한 눈에 이해할수 있게하는 자료로 학창시절에 배웠던 잃어버린 세계사의 기억을 일깨워주어 감사함요!..수고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이모티콘이 가능하구먼요. 송대감!!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아주 유익하고 신선한 로마사임다. 대구리에 팍팍 들어오는 전문성이 탁월한 해설
불라디 관장 덕분에 공부 잘 햇심더
변대감이 본바닥 이태리를 흛고 입경했구먼유.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리라
생각되는데...다음에 만나 여행담을 들을 기회가...여독때문에 피곤할텐데 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