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언어 구조 - ⑥ 탈구조의 구조/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⑥ 탈구조의 구조
니체와 프로이트는 역사적으로 서구 합리주의가 하나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반대논리를 강압적으로 짓밟아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자유와 무의식의 혁명으로 근대 합리주의 이상의 권위에 대해 저항했다. 자연성의 회복, 자유의 회복뿐 아니라 무한대의 의식 개방을 주장한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데리다는 이성이 감성을 억압하고,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해 온 갑을 관계적 관습 따위를 해제시키고자 했다. 푸코는 자식이 권력에 저항해 왔다는 발전논리의 허상을 적시하면서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한통속으로 우리를 옭죄어 왔음을 폭로했다. 이성과 진리의 허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합리적 자아(自我)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무의식을 근거로 현실적 주체를 해체해버렸다. 주체는 언제나 상상계와 상징계, 이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할 뿐인 것이어서 그 사이에 방황과 선택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가 믿는 이성은 종잡지 못할 환상일 뿐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문화에서 지속적인 탈구조와 해체의 숙명을 역설한 바, 이들의 논리가 주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란 결국 근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대안 없는 대안이었다 할 것이다.
하기야 이들의 주장 이전 20세기 태동기의 전위예술 운동에서도 해체와 파괴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실천해 나간 이들이 있었다. 다다, 슈르, 표현주의 등이 그렇고 미래파에서 나타나고 입체파에 의해서 유행했던 형태주의시란 것도 그와 연계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기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하고 해체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인식적 경험에 무질서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기대를 벗어난 새 질서에 맞닥뜨릴 뿐이다. 정말 무질서 자체가 논리화하고 절대화한다면, 삶이라거나 삶의 의미라거나 하는, 어떤 지속성, 생명성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공허만 남게 될 것이 아닌가.
구르는 혓바닥의 완강한 힘, 치욕이여
중국집 짬뽕 속의 삶은 바퀴벌레여,
그래도 코를 벌름거리며
돼지들은 죽어서도 즐겁고
오, 제 먹는 게 제 살인 줄 모르는
무의식의 죄의식의 내출혈의 비몽사몽의
손들엇 탕탕!
창밖엔 찌를 듯 환한 햇빛
샛강 빈 벌판에서, 누가 노래 불러?
귀아리게
쨍쨍하게
불끈 솟아오르는 산들,
어린 날의 메아리가 되살아나
호야 호 바다로 내달아
바다!
일어나!
솟구쳐!
위로
위로
정점의 피
태양
―최승자, 「여의도 광시곡」 부분
광시곡이란 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채를 지니는 환상곡풍의 기악곡.
아주 새로운 시 같기는 하지만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보들레르 등의 19세기말적인 비극성과 절망감이 한 세기를 넘어 이 땅에서 분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 규범이 산업혁명 이후 누적되었던 19세기 자본주의의 천박성만큼 야비하고 잔혹하며 맹목적인 까닭일 것이다.
혓바닥 놀림에 눌린 치욕과 눈치 보기로 살아가는 바퀴벌레, 죽어서도 즐거운 돼지, 자기 살해에 열중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맹목의 장소 여의도―한국 정치의 본산인 국회 의사당과 여러 방송사,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각종 금융기관, 최고층 63빌딩과 쌍둥이빌딩 등등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 도시문화의 심장 같은 곳이다. 모순어법 〈정점의 피〉란 끝없는 타락을 통해 재생과 부활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의 반어적 표현일까? 철저한 파괴와 동시에 본래의 모습을 되살아나게 하는 언어들은 미래파적 역동주의와 형태주의 양식을 동원하고 있다.
인간 본성에는 어떤 특정 사물과 현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생득적인 성질이 있다. 예술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제작행위나 표현행위가 이 생득적 기호에서 생겨났다는 것이 디사너예이크의 ‘특별한 것 만들기’이다.
푸코는 역사란 연속적인 게 아니라 불연속적인 것이고, 진리라거나 지식이라거나 하는 것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종잡지 못할 것이라 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를 통해서 역사며 지식이며 하는 것들을 사회적으로 구성할 뿐이라는 것이다.
구조 개념 역시 그렇다. 구조가 정해져 있고 시적 언술이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시가 사회에 던져짐으로써 구조가 그 언술에 의하여 구성된다.
구조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 시는 없다. 그러나 모든 시에 대한 구조적 추수(秋收)는 가능하고 구조적 토대 위에서 새 구조로의 이행도 가능해진다. 「여의도 광시곡」의 인용 부분도 부끄럽고 징그럽고 약아빠진 선량들이 반성 없이 날뛰는 시대, 그들의 철저한 파괴와 동시에 본래의 모습이 역동하는 바닷물결처럼 되살아날 것을 기원하는 의미구조를 갖고 있다. 전반부는 시문 병치구조, 후반의 형태주의 양식은 병치를 일부 혼용한 비문(심한 생략은 비분의 요건이다) 선조구조를 보인다 할 것이다.
탈구조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일정하고 고정된 구조란 철저히 무시하고 파괴되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의 구조란 생산이니 파괴니 하며 미리 전제해 놓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언술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의 이성에도 비이성에도 작용한다. 그래서 어떤 구조로도 시의 정신과 의의와 미학을 온전히 기술(記述)해 낼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논리와 철학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시 속의 주체와 열망은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해서 인간이 사다리를 쓰지 않는 건 아니고, 높은 산에 올라 하늘을 조금 더 가까이 보려는 의욕을 부질없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에 다가가고 또 그럴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모든 시와 예술 작품이 의식적 무의식적 구조를 토대로 생성된다. 그것이 저자에게서 생성되는 것이든 독자에게서 생성되는 것이든.
하늘의 빛을 보고 그 끝이라도 만지는 심정으로 찾아들 수 있는 시의 기본 구조―그것은 ‘시문 선조구조’와 ‘비문 선조구조’, ‘시문 병치구조’와 ‘비문 병치구조’ 이 넷이 아닌가 한다. 이는 어떤 시에서도 쓰기와 읽기의 골격이 되는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이자 갈래라 할 수 있다.
모든 문학에도 정해진 틀이 없을 수 없다. 특정한 틀을 통하여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시나 문학의 구조가 과학의 그것처럼 정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조나단 컬러는 문학 텍스트라는 건 특정의 제도를 전제로 이루어져 있고, 텍스트 해석도 당연히 특수한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물론 이 제도는 물리학이나 수학의 법칙과 같이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격식이 아니고 부정성과 긍정성이 공존하는 가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우연이 남발되고 있다. 사필귀정, 기승전결이 인과론적 심사(心思)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연이 남발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우연의 인과를 해석할 수밖에 없고,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환상으로 실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연도 환상도 인과적 맥락에 산입될 수밖에 없다.
그렇듯 시 언어가 우연한 기표의 나열에 의존한다거나, 자의적인 읽기만이 생명 그대로의 읽기라거나, 따라서 구조적 이성 자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은 환상을 현실이라 하는 것만큼, 현실을 환상이라 하는 것만큼 왜곡되고 편협한 독선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저자는 시시콜콜 독서를 강제하지는 않지만 영 죽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텍스트를 이끄는 핵심 주체이거나 제반 계기의 근거로 살아 있다. 모든 텍스트가 독자의 숨결이 닿을 때를 기다리며 열려 있는 것도 저자의 숨결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저자도 그의 저작도 내용과 형식,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생명체이다. 시인은 물론, 시 텍스트 역시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생명체라면, 그리고 독자 역시 그러하다면, 시적 체험의 구조적 인식은 쓰기와 읽기의 필수 과정의 하나임은 물론, 갖가지 인간 문화의 주요 가늠자가 된다 할 것이다. < ‘차이 나는 시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