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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파워 드라이브의 일인자, 김택수 선수. 요즘 머하나 궁금하네 |
| 해태 타이거즈, 선데이 서울, 그리고 탁구.
유소년을 막 벗어나 거시기 크기에 영혼을 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나의 중학교 3년을 함축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위에 것들이다. 특히, 탁구는 늘 가방 안에 라켓을 들고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장소는 대중 없었다. 교실에선 책상을 이어 붙이고, 실내화를 십시일반으로 모아 네트를 만들고 역시 실내화로 라켓을 대신했다. 가끔은, 교회나 아파트 회관 같은 곳에서 제대로 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그 시절 아련한 추억 속의 친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순박하고 성격이 좋은 친구라 우리는 그 아이를 촌놈이라 불렀다. 그 아이도 탁구를 좋아했는데, 운동신경도 둔하고 몸도 말라서 잘 치지는 못했다. 우리는 연습 게임하듯 그 아이와 상대해도 늘 이기곤 했다. 그것도 거의 러브게임으로... 하지만, 그 아이에겐 촌놈 특유의 깡과 끈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다른 친구들이 DDR에 열중하던 시간에 그 친구는 자신의 우상 김택수의 사진을 보고 그의 폼을 무작정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의 별반 날카롭지 않은 푸시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둔해, 쉽게 실력이 늘지 않았다. 하지만, 타고난 어깨힘으로 저난이도의 단순한 스매싱 기술은 폭발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학교 챔프가 된 그 친구의 성공 시대
그러던 그가 어느날 부터인가 탁구의 기본기술이자 마지막 기술인 드라이브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늘 천장에 꼬라박던 그의 드라이브가 삑사리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적중도가 갈수록 높아졌다. 한번 먹히기 시작한 그의 드라이브는 가공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구라를 좀 치자면 어린 우리들에게 그의 드라이브는 텔레비젼에서 보던 김택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중엔 일반적인 탑스핀에다가 사이드 스핀까지 먹여져서 날라왔다. 흡사, 용꼬리가 휘어져나가는 것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진 파워 드라이브가 완성된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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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이나중 탁구부는 내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 지금 생각해보면 선천적인 어깨힘 빼면 운동치였던 그가 그런 드라이브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눈물겨운 반복학습의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자전거 타는 법을 한번 배우고 나면 일생동안 자전거를 탈 수 있듯, 몸이 체득한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다. 어쨋든, 그 아이는 또래에서 드라이브의 일인자가 되고도 자만하지 않았다. 늘 연습하는 그런 친구였다.
결국엔 그 아이를 눈여겨 보신 담임선생님께서 운동회날 반대표 탁구 선수로 그를 뽑으셨다. 수비도 안되고 할줄 아는 것은 드라이브밖에 없는 놈이었지만, 대회날 제대로 구사된 그 친구의 드라이브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아니, 아예 라켓을 들이밀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저 상대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실책을 기대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의 드라이브에선 태고의 원시적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플라스틱 공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흘렀다. 난 그의 팬이 되었다.
우리 중학교에서는 전략적으로 탁구부를 키웠는데, 결국엔 체육대회날 그의 드라이브에 반한 코치님이 그를 탁구부에 스카우트 하셨다. 그 코치님은 그 아이를 양자로 삼는 정성까지 기울이셨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탁구부 선수들을 상대로 그는 이기지 못했다. 제대로 들어 가면 수비가 불가능한 것은 여전했지만, 낮게 깔려오는 상대의 볼에 풀파워로 가격을 하다보니 걸핏하면 탁구공이 홈런이 되기 일쑤였다. 범실이 너무 많았다. 파워가 아니라 공격 정확도가 문제였다. 선생님은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굳이 세게만 치지 않아도 너의 공격은 상대를 제압하기에 충분해. 그러니 폼을 좀 줄이자' 착한 친구는 절대적으로 선생님의 말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다시 이기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좀 약하게 쳐도 상대는 막아내지 못했다.
그 해 그 아이는 시대회에서 8위에 입상했다. 역시 큰 물이라 레벨이 좀 틀리긴 했던 모양이다. 제대로 먹힌 공격이 아주 가끔씩 상대 수비에 당하는 걸 경험했다. 약간의 충격이었다. 하지만, 공격이 막힐 때마다 그는 세게.... 더 세게.... 때리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하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게 치는 것밖에 없었으니... 그에게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강한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는 최강의 드라이볼러였다. 그 하나로 일군 시대회 8위의 쾌거였다. 나는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진정한 탁구 선수로 거듭난 그 아이....
코치님께서 좀 욕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시대회가 끝난 후, 선생님은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주무기가 단조롭다는 지적이었다. 하긴,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은 포핸드 드라이브 밖에 없었다. 수준급의 상대가 백핸드를 찌르면 그 무식했던 친구는 몸을 틀어 포핸드로 응수할 정도였으니... 백핸드만 추가하면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실했던 친구는 맹렬한 연습에 들어갔다. 노력의 결과는 멋졌다. 그는 백핸드를 연습하고 출전한 대회에서 당당 3위에 입상했다. 포핸드만 대비하던 상대들은 갑자기 들어오는 그의 백핸드 공격에 속속들이 당했다.
그 친구도 재미났던 모양이다. 그 대회 이후로 친구는 더욱 열심히 백핸드를 연습했다. 하지만, 좀 이상하긴 했다. 백핸드가 먹히는 날에는 포핸드에서 삑사리가 자주 났다. 원래 운동신경이 부족했던 아이였는데 2가지 드라이브를 한꺼번에 근육에 기억시키는 것은 무리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한가지를 배우면 한가지를 까먹는 아이였던 것 같다. 어쨋든 상대 선수들이 그의 백핸드를 칭찬했다. 이제 파워 드라이브 칭찬이 없는게 조금 거슬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용꼬리란 형용사는 이제 그의 백핸드에 쓰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미 그 아이는 간판 선수로 성장했다. 그동안 호기심 강한 아이의 새로운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서울에서 짱먹다 전학온 잘 생긴 친구의 스핀 기술도 따라해봤고, 옆 학교 선수의 코너 찌르기 기술도 배웠다. 물론 그것들은 실패했지만... 예전에 마스터했던 백핸드는 3가지 형태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드라이브 속도 조절도 에지간치 할 줄 알게 됐다. 선생님들은 그 아이의 학구열이 뛰어나다고 칭찬해주시며, 늘 먼가를 가르치려 하셨고 그 친구도 배우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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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간 내 친구.. 그리고...
그 친구는 내가 3학년에 올라갈 때쯤 전학으로 멀어졌다. 코치님과 불화가 있었는지 자의에 의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정든 학교를 떠나야 했던 친구는 억울해했던 기억이다. 친구의 가족들도 '니가 그동안 학교에 가져온 트로피가 몇 개인데' 하시며 욕을 해대셨다.
아무튼 친구의 새 학교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첫 출전한 대회에서 예선탈락을 하더니, 그 뒤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새 학교의 선생님은 친구의 스윙 괘적도 높혀보고, 학교에 친구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며 예전 짝궁도 옆자리에 앉혀주셨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친구와 난 연락이 두절됐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 친구는 왜 이렇게 됐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힘들어했던 것 같다. 간만에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어 옛 친구에 대한 글을 써봤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글을 마칠까 한다.
'창호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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