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13:22~23
제목: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신앙의 선진들이 걸어간 모습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바를 모르고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지시한 땅으로 떠난 그의 과감한 신앙의 결단
모세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나오며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오는 그런 위험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에 오늘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라는
그말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함으로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간 기이한 일에 동참한 그의 믿음
여호수아 모세와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그와 여전히 모세와 함께 하심같이 같이 하시겠다는 그 한마디에 약속의 땅을 진취한 그의 담대한 신앙
사무엘 여호와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렛으로부터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이스랑엘에게 그의 살아 있음으로 블레셋으로부터 지키심과 보호함을 얻은 것
우리는 이런 신앙의 선진들을 부러워하지만 정적 우리들에게 이런 도전은 고 시도는 커녕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요 우리의 믿음의 상태 인것입니다.
한번 질문하나 던지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까?
그리고 모세를 쓰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를 사용 하시겠습니까?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 여호와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신 것 같이 우리와 동일하게 함께 하심을 동의 하십니까?
그런데 왜 그들을 쓰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씨름하면서 다윗을 들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름아닌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내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그를 통해 이루리라” 하나님이 다윗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뜻이 무엇일까요? 다름아닌 생명 곧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의 뜻을 이루고 그것이 한걸을 더 나가면 마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를 통해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자신을 통해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 소원을 두고 행하신 다고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분모가 있다면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소원에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둘째는 다름아님 역사의식 죽으면 죽으리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동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며 이 사회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알아주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전적인 관심은 인간들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맟추어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마음에 합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하나님이 마음에 합했다며 하나님의 소원과 그 뜻을 그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윗이 대단해서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을까요? 아님 다윗이 가문이 좋아서 그리고 그의 배경이 너무나 화려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을까요?
그러면 다윗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을까요?
그의 일생을 보면 왕이 된 후에 오히려 왕이 되기 전보다 더 사악하고 더 교활하고 더 간악함을 우리는 사무엘하를 읽어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믿는데 이렇게 사는데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대로 받고 예수님의 생명의 족보에 이룰 수 이룰 수 있을까요?
너무나 의심적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를 행해 다가올 것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전적이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대지: 1.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여기에 왜 이새라는 이름이 나올까요?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면 바로 구속사적인 면과 그리고 거시적인 면에서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사시대때 우리가 그런 암흑기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의 스토리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룻과 보아스의 만남의 장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것보다 바로 다윗의 계보를 나태내기 위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아들을 낳는데 그가 이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미 탄생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시고 이미 선택하시고 그 일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그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일에 선택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인한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 가서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흙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모두 하나님 앞에서 한줌의 진흙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진흙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분의 일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다시 22절로 돌아가서 한번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페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스스로 사울이 왕이 된것도 아니고 다윗도 자기의 의지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느 누구를 페하시고 어느 누구를 세우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종종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아우성치며 항의를 한적이 많습니까? 그런 상황속에서 우리는 단지 우리의 기분과 우리의 마음의 상처에 관심을 가졌건만 언제 우리가 여기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런것에 염두에 둔적이 몇번이 됩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난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낸 사람이 누굴까요? 짐작이 가시겠지만 바로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받은 꿈들을 바로 자신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자신을 통해 이룰 사건을 믿고 따르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갔기에 그는 형제들에게 팔리면서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감옥에서도 신실하게 주님을 믿도 따른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게 이렇게 전치사를 붙혀 줍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황 뒤에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손길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학교에 가면 상황신학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어떤 사건들이 그 당시에 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을 설명하는 일종의 교리인데 그러나 그 상황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것이 신학의 한계요 신학의 제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주권은 한계가 없으시며 어느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도 받지 않고 그대로 시행된다는 것입니다. 그 주권은 바로왕의 강팍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하심과 전능하심이 보여 졌으며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귀환이 허락됨으로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이시며 열국의 왕들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 이시라는 것이 다시 한번 확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하던 느부갓네살왕도 마지막에 마음이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었습니다.
다시한번 물어봅니다. 신앙인의 근본의 출발이 무엇일까요? 다름아닌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며 그 절대주권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시고 자며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훈련 시키시며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역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이유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그 절대주권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55:4) 다윗이 행함이 오직 여호와만 바라본다는 모습입니다.
바로 하나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또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신경과 정신은 온통 여호와로만 가득 찼고 온통 하나님께만 몰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절대주의로 살아가는 자는 또한 사회생활도 멋지게 잘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면 사회에서 왕따나 아님 별개로 보일까봐 두려워 합니다.
다른 성경 한구절을 더 볼까 합니다. 말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에서는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무엇을 설명할까요?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야곱이 선택받았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있는 구절 입니다.
성경의 가장 처음부분이 창세기 인데 창세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창세기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루는 책입니다. 4대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1.창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2. 인간의 죄를 감안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3.인간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4.인간들을 퍼뜨리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사대인물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주권
1. 아브라함- 하나님의 부르심
2. 이삭 - 하나님의 보호하심
3. 야곱 – 하나님의 훈련하심
4. 요셉- 하나님이 계획
이것이 창세기의 내용입니다. 성경의 가장 첫 부분이 하나님의 주권의 시작이라면 성경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 요한 계시록은 그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절정이요 또한 완성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움지여지고 또한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에 보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보좌가 있는 사람은 절대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토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그것은 그 마음에 보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앉아있는 보좌가 그렇게 위엄이 있고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가져온다면 자신안에 마음속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야 말로 얼마나 두렵고 경외해야 하는 분이심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것입니다.
이 시간 당신이 마음에 손을 얹고 당신의 마음속에 보좌가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좌가 있는 사람은 그 밑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새롭게 되는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은 보좌가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생명수를 흘러 보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삶은 바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 삶이 나타나고 보여지고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에 가서 보면 이 보좌를 다른 말로 표현을 해서 어린양의 보좌라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보좌에 이 어린양의 보좌가 분명하게 좌정하고 있으며 이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로 당신의 영혼이 충전이 되며 날마다 새롭게 되는 갱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 시간 기도하시며 그 보좌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2. 전심으로 여호와를 찾는 사람입니다.
역대하
하나님의 눈이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한 그런 사람에게 은혜주시기를 기뻐하시며 능력을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시 사도행전 13:22절을 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라는 구절에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역대하16:9절과 사도행전13:22절을 비교하여 보면 방금 답이 나올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땅을 감찰하시다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그의 신앙이 바로 여호와를 향하였기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다시 역대하 16:9절의 하반절을 봅니다. 여기에 아사의 해동이 망령되었다고 나옵니다. 무엇이 망령일까요? 여기서 망령이란 말씀은 다름아닌 여호와를 향하고 의지하지 않고 다른 어떠 것을 의지하고 의뢰할 때 망령이라고 이 구절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사가 전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아사를 지켜 북이스라엘 바아사보다 군대가 막강한 구스에서 룹에게서 지켜 주었는데 이번에는 왠지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을 의지함으로 그가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의미있는 것은 아사가 최후에 의원을 의지함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망령입니까? 망령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주위의 어떤 나보다 큰 세력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면 그것도 망령이며 환경에 대해 더 의존적인 것도 망령이며 나보다 더 어떤 신앙이 좋고 훌륭한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그것도 망령입니다.
망령이 계속 발전하면 사람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짓을 합니다.
아사가 망령되이 행함으로 선견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 그 선견자를 가두었고 사울왕이 망령되이 행함으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사위이며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한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고 했으며 끝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따르고 쫓은 것입니다.
역대기를 보면 열왕중에서 다윗의 신앙만큼 좋은 사람도 찾기 쉽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무슨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만 구하고 물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제일처음 싸움에 나아갈 때 골리앗과의 싸움에도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쳤고 그가 왕이 된 후에 블레셋이 알고 쳐들어 왔을때도 그는 하나님께 물음으로 뽕나무 위에서 소리가 들릴 때 치라함으로 그 소리를 듣고 블레셋을 이긴 것처럼 언제나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만 구하는 사람입니다. 시24:4-6절에 보면 이렇게 쓰여져있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망령과 달리 여호와께 복을 받고 은혜를 받는 자는 허탄한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의 고백처럼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집도 구하고, 차도 구하고, 명예도 구하고, 부도 구하는데 여호와의 얼굴은 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구차하게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자녀도 잃고 물지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살 수는 있는데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살 수 없다고 과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저것도 있고 하나님도 적당히 믿고 천국가면 되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며 관심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미지근함입니다. 미지근하면 성경은 토해버린다고 합니다.
이 시대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탄이 쓰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적당히 입니다” 교회도 적당히 나가고 교회 일도 적당히 하고 기도도 적당히 하고 말씀도 적당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살고 철처하게 예수 믿자 그리고 적당적당 살고 적당적당 먹고 철저하게 예수 믿자”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거꾸로
“철저하게 먹고 철저하게 살고 적당하게 예수 믿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계략이고 올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라면 환경은 언제나 적당하게 라고 합니다. 적당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망령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은 절대 적당이라는 것이 용납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절대와 오직이 그의 신앙의 전부인 것입니다.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 올 때 에봇을 입고 하체가 드러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는 열심히 춤을 추며 하나님을 환영하는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신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절대적인 것은 바로 절대적이신 분인 하나님만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는 것을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 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이 따라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것저것 해보고 않되니 이제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하는데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것에 대한 의지는 결국은 호흡이 끊어지면 당일로 흙으로 돌아가서 그 의지하던 모든 것이 호흡이 끊어짐과 동시에 사라진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방백도 의지하지 말고 도울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며 오직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이요 또한 길인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며 그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지 못합니까?
다름아닌 하나님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입니다,
사도행전13:2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예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그 뜻이 그의 후손으로 통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데만 신경을 쓰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이 뜻을 앞에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이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든 인생을 거기에 몰입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자신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렇게 고백한 예언적 선포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팔리고 고난당하는 그 모습마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배척당하시고 팔리시고 고난당하신다고 명백히 고백을 합니다.
시대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모두 다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조정하며 언제나 그 뜻을 이룰려고 노력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꾸어 말하여 신앙인의 열심이라고 붙혀보고 싶습니다. 신앙인의 열심과 열정 다름아닌 하나님의 뜻 곧 하늘에서 이룬 그 뜻이 자신을 통해 그 뜻이 이루어 지도록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데 열중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정 바로 왕국을 건설함으로 하나님의 선한 그 뜻이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구속의 역사가 펼처지고 만국열방에 이 구속의 역사가 퍼지고 퍼지는 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다름아닌 주의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열정이 그를 삼키었고 그 열정으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그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빌립집사의 집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가 이 띠의 주인이 당할 매임 그리고 빌립의 딸들도 바울이 매임을 당할것을 예언했으며 성령께서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당하여 살 가망이 없음을 보여주었음에도 바울은 이런 것 때문에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단지 한마디 그의 열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는 그의 열정인 것입니다.
로마서12: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아멘!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는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이지 분별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에 기초하여 11절에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우리의 열정 예배이며 또한 그열정이 예수님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정을 잃어버리면 엉뚱한데 신경을 쓰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에서의 열정을 보십시오! 그의 열정이 오히려 부모의 우환과 두통거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을까요? 야곱은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것에 열중하였지만 에서는 자신의 것에 열중하고 자신의 것으로 계속 부모를 대하듯 하나님을 섬기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과 에서의 차이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을 받은 이유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크나큰 성장과 부흥을 가져왔음에도 지금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IMF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선교하는 일에 열정이 있었고 구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건만 IMF가 터지면서 선교헌금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구제하는 일도 적어졌으며 이제 교회들이 자기들의 사는 길만 찾고 찾다가 교회재정이 좀 돌아갈만 하니 이제는 리모데링이요 성전확장이요 하는데만 전체적으로 누락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 교회가 지탄을 받고 욕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성전건축도 해야 합니다. 그렇나 더 중요한 것은 선교하는 일이며 구제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선의 길은 다름아닌 선교밖에 없습니다. 오직 선교가 하나님의 관심이요 선교가 하나님의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소원을 두어야 하며 그 일에 우리의 생명을 걸고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명이 사라지면 사명이 살명으로 됩니다.
한 나라의 왕이기에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남부럽지 않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주의 뜻을 사모하며 그 뜻을 이루기위해 열정을 다했으며 마침내 그 열정이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뜻중에 가장 큰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의 피줄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열정을 부으면 마침내 약속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나타나고 보입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덕은 바로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진미요 신앙의 참된 색깔인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물 같은 인생이 포도주를 나타내는 맛깔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 스펄즌이라는 유명한 설교가가 있다면 미국에는 디엘 무디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습니다.
무디가 어렸을 때 구두수선을 하면서 정시에 전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무디얘기가 나오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왜 무디는 말할 때마다 성령, 성령을 말해 자기가 성령을 독점한 것 처럼 말이야”
그 말에 어떤 신사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내가 무디가 성령을 독점한 것은 모르겠는데 분명히 성령이 무디를 독점한 것만은 사실이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무디의 기도는 이것만은 그의 기도의 절정이라고 합니다. “주여 썩어서 버려지는 것보다 달아서 없어지는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의 절정인 것입니다.
무디의 이런 열정이 미국을 부흥의 불길로 이끌었으며 그의 이런 열정이 그로 유명한 목사로 부흥사로 만들어 간것입니다. 그의 열정은 오직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하는데만 열심을 내었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를 섬기는 데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열정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면 우리가 마침내 부흥을 맞이하며 우리가 이 타오를 열정에 뭍혀있다면 그 열정이 당신의 인생을 바꾸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끌고 당신을 불러 이 거룩한 소원을 이루고 성취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구주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말을 한번 외치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지게 하나님 저를 써주시 옵소서! 우리에게 열정을 주옵소서 주를 섬기는 일에 열정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 한나님의 뜻을 이루는 열정을 주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주님 하나님에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 마침내 주의 약속이 우리를 통해 다시 한번 확증이 되고 실현되길 원합니다. 주님 정말 우리들이 이제 주를 섬기는 일에 열정을 둠으로 우리의 인생이 값진 인생이 되며 우리의 인생에서 선하신 주의 뜻이 성취됨으로 마침내 주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길 원합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