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만남
성수교회 김재규 목사님 추천서를 받아 대한 신학교에 들어갔다.
벌교 중앙교회에서 올라온 김철온 형제를 알게 되었다.
우리 대광교회 자매와 교제한 사실을 드러내 놀랐다.
학교 기숙사에 거하며 자신감이 넘쳤다.
중학교 2학년 때 매형 초청으로 부흥회 참석하여 소명을 받은 자였다.
어려운 형편에 부친은 상고 진학을 원했다.
하지만 미션 학교 매고로 갔다.
목회자로 쓰임 받기 위해 신학교 입학하였다.
두꺼운 원서를 들고 도서관에서 살았다.
칼빈 학회에 소속된 공부 잘한 선배들과 어울렸다.
난 주경야독하며 학습에 열중한 그가 부러웠다.
수업 마치면 도서관에 들려 막차로 집에 왔다.
그는 외국인 만나러 가는 선배가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서인지 생소한 조직 신학 논술 시험 점수를 높게 받았다.
그 똑똑함에 학기 초 교육 전도사로 나섰다.
소액의 사례비 받으면 기숙사에 달걀 한 판 들고 오는 원칙을 지켰다.
서울대 다닌 친구 노록수를 불러들였다.
야간에 최복규 목사님 강의를 듣게 한 열정 파였다.
무릎 선교회 회지를 같이 만들며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
노록수의 깨알 같은 기드온 삼백 용사 설교문은 청년을 깨운 글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병을 치유받은 자답게 가슴이 뜨거웠다.
하지만 소탈한 성격에 잘 어울리며 거침없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을 봤다.
우리 시골 교회 헌신 예배에 초청하여 은혜를 받았다.
결국 고신 대학원을 진학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나갔다.
학회 선배들은 다 교수로 섬겼다.
김철온 전도사를 여름 방학 때 학생회 수련회 강사로 세웠다.
섬진강변 농촌교회로 1박 2일 갔는데 물놀이 시간이었다.
한 중학생이 수영 미숙으로 물에 빠졌다.
그도 강 건너편서 소리 지른 아저씨 덕분에 알았다.
물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를 발끝으로 튕겨 올려 심폐 소생술로 살렸다.
아찔한 순간을 보내고 수련회를 무사히 마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김철온 전도사는 대광교회 자매와 헤어졌다.
같은 반에서 공부한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였다.
여러 면에서 뛰어났다. 3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
군종으로 새벽 기도를 인도했다.
광주 일고 출신 상관의 배려에 신학 서적을 탐독했다.
제대 후 고신대로 편입해 갔다.
대한신학교에서 3학년 학비 미납으로 고신대 2학년에 들어갔다.
그 바람에 소식이 끊겼다.
20년 전, 첨단지역 교회에 청빙 받은 사실을 알았다.
200명 교인을 보고 무얼 해도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눈덩이 불어나듯 교회가 성장하며 기독교 방송에 설교도 내보냈다.
반응이 커서 질투를 샀다.
기고한 글을 써서 모아 책을 냈다.
40대 초반 무서울 것 없는 역동적인 목회에 교회에서 왕처럼 모셨다.
하지만 3년 섬기다 노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의 직언에 괘씸죄를 걸어 찍어 내려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노회 선배들의 교권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 죽을 것 같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교회 개척에 나섰다.
노회, 시찰회를 접고 독립 교단으로 옮겼다.
우여곡절 끝에 상가건물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꾸몄다.
여기저기서 그의 소식 들을 때마다 만나고 싶었다.
며칠 전, 기숙사에서 그와 동고동락한 이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김철온 목사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소식이었다.
장소만 알려 주면 가겠다고 응했다.
40년 세월이 흘렀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그날을 기다렸다.
평소 첨단 가는 길에 그 교회 앞을 지나쳤다.
세월을 뛰어넘어가 보고 싶었다.
건물을 구입하여 예쁘게 리모델링한 예배당이었다.
어제저녁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예향정! 먹자골목이라 주차하기 불편해 멀리 차를 대고 걸었다.
‘달빛에 구운 고등어’ 식당이 새로 생겼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 끌린 집, 다음에 가 볼 생각이었다.
먼저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변함없는 얼굴에 반갑게 손을 잡았다.
흰 머리카락 하나 없고 빽빽하여 청년 시절 그대로였다.
날 착하고 선한 모습 여전하다고 치켜 세었다.
식당 벽에 ‘건강한 한 끼를 대접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문구가 눈에 찼다.
신선한 채소가 열 가지 넘은 쌈밥 집이었다.
불 맛 나는 두루치기 3인분과 청국장을 시켜 먹었다.
이야깃거리가 많아 음식이 식었다.
초등학교 친구인 한강중앙교회 최창규 목사 근황을 드러냈다.
매고에서 짝꿍으로 만나 전도한 일을 자랑삼았다.
대광교회 선배 소식도 노록수 선교사 통해 손바닥처럼 알았다.
청빙 받은 교회에서 사역을 지속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운을 띄웠다.
‘설교 내용을 따지러 들어온 장로가
화를 못 이겨 목양실 출입문을 발로 차고 나갔어요.
며칠 후 그 아내 권사와 선물을 내밀고 들어와 무릎을 꿇었지요.
발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원인을 못 찾아 겁나서 온 거예요.
간절하게 기도해 드렸는데 회복되었지요.
또 주일 영업 문제로 다툰 장로는 두 번의 암 수술 끝에 세상 떴어요.
조용한 교회인데 금식과 통성 기도시킨다고 시비 건 사람도 생각나네요.
믿음 생활을 지옥 갈려고 하는 중직 자 같았어요.
이 목사님 교회에서 옮겨왔던 집사도
여전도회 회장과 대판 싸우고 나갔어요.
목회! 마음대로 되지 않았지요.’
이 목사님이 거들었다.
‘매일 내 자가용 새 차하던 장로가 말없이 나갔어요.
예배 마치고 심방을 다녔는데 다른 교회로 나가더니
결국 쉰천지 마니교로 빠졌다네요.’
두 사람이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한 끈끈한 정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0년 흘러도 모든 것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일로 알고 일어났다.
2023. 2. 11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