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方舟)*
* 전시기간 : 2022-09-09 ~ 2023-02-26
* 전시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 5전시실 및 복도
* 방주(方舟):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만든 배.
이번 전시는 최우람 작가의 잘 알려진 기존 작업에 내재해 있던 질문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재구성한 하나의 공연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전에 없는 위기를 겪으며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의문을 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기후변화와 사회정치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감과 양극화의 심화는 방향상실의 시대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작가는 방주(方舟)라는 주제의 전시를 만들고 동시대를 구성하는 모순된 욕망을 병치시켜 관람객들과 오늘 우리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질문하는 장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시장 한켠에는 뜨겁게 붉음을 토해내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빨강(Red)›이 있다. 전시장 입구의 커다란 흰 꽃 ‹하나(One)›가 팬데믹을 겪은 동시대인의 아픔에 작가가 건네는 헌화라면, ‹빨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자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신만의 항해를 위해서는 절대자, 타인의 욕망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근본적 가치를 쫓아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한다. 최우람 작업의 근간인 설계도 드로잉이 암시하듯,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실존의 진정한 의미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폐차되는 자동차의 전조등과 후미등을 조립하여 별로 재탄생한 ‹URC-1›, ‹URC-2›가 눈부시게 빛나는 복도를 거닐며, 각자의 작은 우주를 항해하길 기대한다.
‹원탁› , ‹검은 새› (원탁 구동 시간 안내 : 10:20부터 시작, 5분씩 동작, 15분 휴식)
서울박스 중앙에 놓인 검은색의 ‹원탁(圓卓)›을 받치고 있는 것은 머리가 없는 18개의 지푸라기 몸체이고 하나의 둥근 머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여기저기로 굴러다닌다. 이는 하나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머리를 욕망하지 않아도 이 투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빗대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폐 종이 박스를 조각조각 붙여 완성한 세 마리의 ‹검은 새›가 천천히 회전하며 아래에서 벌어지는 힘겨운 싸움을 지켜본다. 누가 머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낙오자가 될 것인가? 누가 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이 커다란 흰 꽃은 2020년 팬데믹(Pandemic)의 혼란과 두려운 상황에서 제작되었다. 흰색의 한지 같은 꽃잎 부분의 소재는 타이벡(Tyvek:투습 방습지) 섬유인데, 코로나 검사와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착용한 방호복의 재질과 같다. 최우람은 이 꽃잎의 결을 검은색 물감으로 손수 정성스럽게 그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 ‹하나›는 거대한 한 송이의 국화꽃을 연상시킨다. 갑작스러운 전염병의 유행으로 사회가 일시 정지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죽음과 의료진의 노고를 지켜보며 위로의 마음을 보탰다. 또한, 우리의 기존 생활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다. 최우람 작가 역시 이 위기 속에서 작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그런 고민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바이러스로 야기된 세계적 혼란 한 가운데서 치열한 생과 사의 현장을 지킨 모든 관계자에게 존경과 감사,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담아 최우람이 바치는 시대에 대한 헌화(獻花)이다.
‹작은 방주›
전시실의 가운데에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거대한 배의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방주›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닫힌 상태에 있을 때는 높이 2.1 미터, 세로 12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을 유지한다. 그러다 흰 벽처럼 접어 둔 노를 높이 들어 올리면 다양한 움직임이 시작되는데, 이 움직임의 최대 폭은 7.2 미터에 이른다.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작품이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드러내는 이 방주의 몸체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자랑한다. 노의 장대한 군무를 통해서는 항해의 추진력과 웅장한 위엄을 드러낸다. 또한, 선체 위와 주변에 위치한 다양한 조각설치물과 어우러지며 5전시실을 하나의 퍼포먼스(performance)로 채운다.
‹작은 방주›는 육중한 철제와 폐 종이 박스를 재료로 최첨단의 기술로 구현한 상징적 방주이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와 함께 우주 공간의 탐사가 가속화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35쌍의 노는 우리를 배제시키는 벽처럼 머물러 있다가 날개를 펼치듯 움직이며 장엄한 군무를 시작한다. 흑백의 방주의 춤과 함께 배 위에 올라탄 ‹등대(燈臺)›,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 ‹두 선장›과 ‹제임스 웹(James Webb:허블 우주망원경)›, 힘 없이 축 늘어진 ‹천사(天使)›, 항해 중인지 정박한 상태인지 애매모호한 ‹닻›, 그리고 위기에 처해서도 끝없이 욕망을 쫓는 인류를 비유한 ‹무한 공간(無限空間)›은 양가적인 현실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며 우리의 시선을 ‹출구(出口)›로 이끈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다시 닫힌 문이 나오기를 반복하는 이 영상은 공간을 채우는 앰비언트 사운드(ambient sound: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소리)와 어우러져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하고 현재를 성찰케 하면서 많은 질문을 자아낸다. 무엇을 위한 항해인가? 어디를 향할 것인가? 과연 출구가 있을까? 이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등대›, ‹두 선장›, ‹제임스 웹›, ‹무한 공간›, ‹닻›, ‹천사›, ‹출구›
‹작은 방주›의 중앙에는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5.5 미터의 ‹등대›가 세워져 있다. 등대의 철제 프레임 상부에는 두 개의 조명 장치가 서로 등을 맞댄 채 회전하며 전시장을 비춘다. 그런데 등대는 일반적으로 배와 떨어진 지점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야간에 불을 밝혀 선박들에게 항로나 위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 등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방주 한가운데 솟아오른 등대의 위치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게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회전하던 등대의 두 조명은 나란히 붙으면서 전시장 곳곳을 탐색하거나 관람객을 감시하는 눈처럼 움직인다. 이 등대의 눈은 사회적 규칙과 지침이란 명목으로 감시와 통제를 벌이는 현실을 일깨운다. 길을 밝혀주는 대신, 우리를 감시하는 등대를 싣고 이 방주는 어디로 향하려는 걸까? ‹등대›를 기준으로 양방향에는 두 명의 선장이 앉아 있는데, 이들은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선장은 배의 항해를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이지만, 이 배의 선장들은 버려진 종이박스로 만들어져 다소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다. 선장의 옆에 있는 오목한 원형 안테나 모양은, 나사(NASA)에서 개발한 최신 우주 망원경 ‘제임스 웹’이다. 우주의 탄생과 기원을 밝히기 위해 과학적 관측 자료를 수집하는 이 망원경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먼 우주로 선장의 시선을 이끈다.
두 명의 선장이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배 - 현재의 목적지가 아니라 저 멀리 우주의 시간을 탐색하며 등대로 주위를 감시하는 이 작은 방주는, 대홍수의 시대에 인간을 구원했던 방주와는 달리, 정체도, 목적지도 불분명해 보인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항해 관련 장치들은 이런 느낌을 강화시키는데, 배의 뒤쪽으로는 두 점의 ‹무한 공간›이 설치돼 있는데, 이중 거울 구조로 된 이 설치물은 그 안에서 증폭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생존의 위기를 눈앞에 둔 재난의 시대에도 방주에 투영하는 우리의 욕망은 끝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장치이다.
배를 정박하는 데 쓰이는 닻(an anchor)은, 배의 몸체에서 분리된 채 놓임으로써 정박된 상태도, 항해 중인 상태도 아닌 방주의 모호한 상태를 보여준다. 뱃머리에 장식되는 ‹천사› 조형물 역시 제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전시장 천장에 매달려 있다. 아름다운 황금으로 치장하곤 있지만, 안전한 항해의 성공을 기원하는 조형물답지 않게 천사는 지친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작고 지친 초라한 인간처럼 말이다. 이런 천사의 모습은, 신과 같은 절대자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함을 역설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벽면에 상영되는 ‹출구›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면, 하나의 문 뒤에 또 다른 형태의 문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갖가지 모양의 문이 끊임없이 열리지만, 우리가 찾는 출구는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 열림과 닫힘의 이 끝없는 순환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출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현실과 모순된 욕망을 실은 우리의 작은 방주는, 과연 위기의 시대를 벗어나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최우람 작가는 이렇듯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를 통해 5전시실 전체를 현실과 욕망이 중첩되는 상징적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설계 드로잉
최우람의 움직이는 조각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흡사한 정교한 움직임, 장인의 경지에 비유되는 디테일과 세련되고 유기적인 형태로 설명되곤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거대한 방주가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는 설계 도면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기술도면을 바탕으로 작은 나사에서부터 방주에 도열한 노의 군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이 실현됐는데, 작가는 ‹작은 방주›, ‹빨강›, ‹하나› 그리고 ‹등대›를 위한 설계 드로잉의 일부를 캔버스 위에 전사한 뒤, 아크릴 물감으로 선 하나하나를 그려 드로잉 액자를 완성했다. 외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작품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고, 그것을 다시 작품의 형태로 완성함으로써, 사회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들춰내고 수치나 통계, 가격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로잉 액자는 그 자체로 기계미학을 보여줄 뿐 아니라, 현대문명 사회와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고 재해석해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샤크라 램프(Chakra Ramp)›
산스크리트어로 ‘바퀴’라는 뜻을 가진 샤크라(Chakra) 혹은 챠크(Chak)라는 연꽃과 수레바퀴의 형태로 상징되곤 한다. 최우람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한 쌍의 ‹샤크라 램프›는 한가운데서 맑은 빛으로 깨어나 연꽃과 같은 꽃을 피운 다음 그 주변으로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정교하게 세공된 이 작품의 유려한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많은 구심점이 층을 이루고 있는데, 각자의 원운동을 지속하는 이 층들은 서로 겹치고 부딪힐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복잡한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결코 충돌하지는 않은 채 자신들의 움직임을 이어가며 에너지의 균형과 조화를 세상으로 퍼뜨린다.
‹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Ala Aureus Nativitas)›
‹샤크라 램프›가 설치된 벽감 안쪽 오른쪽 구석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기계생명체들이 빛을 품은 채 움트고 있다. ‹알라 아우레우스 나티비타스(Ala Aureus Nativitas)›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생명체들이 꽃잎 같은 황금 날개들을 펼치면, 마치 한 마리 곤충이나 작은 동물로 변신하는 듯 보인다. 최우람 작가에 따르면 이 ‘황금빛 날개’들은 달이 지고 별빛이 밤하늘을 밝히는 맑은 새벽녘에 잠든 인간들 곁으로 날아가 그들의 꿈을 엿듣는 존재라고 한다. 도시의 숨겨진 틈새에서 탄생한 이 날개들은 인간의 꿈과 희망, 그리고 의식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은밀한 진심을 삼키며 또 다른 황금 날개들을 잉태한다.
‹사인›
전시실 출구 쪽 벽면 위쪽에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맞이하는 픽토그램 네온사인(pictogram neon sign)*이 있다. 이 네온사인은 ‹사인(sign)›이라는 제목의 뜻처럼 출구의 오른쪽과 왼쪽에 작품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단순한 기호일 수도 있지만,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둥그런 선들을 보면 신과 같은 신성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성스러운 후광이 연상되기도 한다. 혹은 헬멧을 쓴 채 저 높고 먼 우주를 탐험하는 우주인의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십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당 지붕에서 볼 법한 거대한 예수상 같은 익숙한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오래전부터 십자의 형태는 하늘과 땅이 통하는 지점, 즉 우주의 축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성을 지녀 왔다.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움 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십자는 열린 방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십자의 형태는 신이나 우주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그린 인체 비례도 소묘를 떠올려 보시면 될 텐데, 인간은 이렇듯 우리 자신 안에도 우주의 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사소한 바람에서부터 절대자에게 드리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외부에서 주입된 욕망이 실현되길 기원하곤 한다. 또한 영향력 있는 타인의 말을 쫓아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기도 하다. 그러나 복잡한 이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릅다.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서 비롯된 욕망을 바라보고 거기서부터 자신의 방향을 찾아야 할 때임을 최우람 작가의 ‹사인›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 픽토그램 네온사인(pictogram neon sign): 픽토그램은 그림을 뜻하는 picto와 전보를 뜻하는 텔레그램(telegram)의 합성어로 사물, 시설, 행위 등을 누가 보더라도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림문자를 네온 기체를 넣은 유리관 속으로 전류가 흐를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빛이 나도록 만든 일종의 전등
‹빨강(red)›
전시실 입구에서 보셨던 흰 꽃을 기억하죠? 이 붉은 방의 벽에서는 강렬한 붉은색 꽃 한 송이가 빛을 발하고 있다. 꽃잎을 이루는 종이 같은 재질은 서로 스치듯 움직이면서 꽃이 피고 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고대 신화에서 붉은 꽃은 땅에 흘린 신의 피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했다는데, 이 신화처럼, 붉은 벽 위에서 피고 지는 꽃의 움직임은 아픔과 힘겨움 또한 순환하는 생명의 일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빨강이 발산하는 뜨거운 힘과 에너지는, 언젠가는 저물어야 하는 운명임을 알면서도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자연의 성실함과 생명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과 사의 운명이 무수하게 중첩된 역사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URC-1›, ‹URC-2›
여기 서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원형 조각은 자동차 조명으로 이뤄져 있다. 최우람 작가는 폐차 직전의 자동차에서 분해한 전조등과 후미등을 모아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 즉 별을 만들었다. 크기나 진화의 정도, 표면 온도 등에 따라 고유의 색을 띠는 별들처럼, 이 조각들도 다양한 패턴의 빛과 색을 만들어내는데, 전조등을 사용한 별은 흰빛을 내고, 후미등을 모아 만든 별은 붉은빛을 띠고 있다. 이 두 개의 별 조각에는 최우람 작가 이름의 이니셜을 제목에 사용하고 있다. ‘U-Ram Catalog’에서 약자를 따온 뒤 제작한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이 작품에 사용된 자동차 조명들은 시장에 나올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폐기된 자동차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작가는 신차를 개발하는 연구소에서 폐차되는 실험용 자동차들을 목격한 뒤, 유령처럼 잠시 존재했다 사라져가는 이 자동차들의 조명을 수거해 두 개의 별로 다시 탄생시켰다.
수 광년 혹은 수천 광년 떨어진 별에서 날아온 빛이 우주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것처럼, 다시 태어난 이 조명들은 별빛의 다양한 움직임을 구현하면서 과거의 사건과 우리를 연결해준다. 속도 경쟁을 상징하는 욕망의 산물, 자동차에서 떨어져 나온 이 별빛은 광대한 역사의 시간 속을 달리고 있는 우리를 도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줄까? 작가는 이 별빛처럼, 끝없는 욕망의 재생산 과정에서 사라져간 것들 속에 우리를 밝혀줄 빛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는 것 같다.
✵ 최우람 조각가는 1970년 서울에서 출생 하였다. 중앙대학교 조소과 졸업 (B.F.A), 중앙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조소전공 졸업 (M.F.A) 하였다. 수상 및 레지던시 경력은 2014 시그니쳐 아트 프라이즈 최종 후보, 아시아 퍼시픽 브루어리 파운데이션, 싱가폴 오토데스크 아트 인 레지던시 프로그램, 샌프란시스코, 미국/ 2009두산 갤러리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 '김세중 조각상', 청년 조각 부문 수상, 김세중 기념 사업회. 한국 '오늘의 젊은 예술가 상', 순수 미술 분문 수상. 문화 관광부 한국/ 2006. 포스코 스틸아트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 공식사이트:
http://www.uram.net/kor_new/intro_kr.html
출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전展 전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