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만화를 그리기 위해 삼국사기를 보다보면 몇줄의 짧은 기사로도 많은 생각이 들게 된다. 오늘은 성덕왕 22년에 당현종에게 미녀2명을 바친 기록과 당현종이 거절한 사유에 대해 유추해서 써보고자 한다.
예전에 <성덕왕때 정원과 포정은 왕의 고자매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에 덧붙여서 당현종이 돌려보낸 사유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삼국사기에서의 기록
성덕왕 22년(서기 723)
22년(서기 723) 봄 3월, 임금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한 명의 이름은 포정(抱貞)으로 아버지가 나마 천승(天承)이고, 또 한 명의 이름은 정완(貞菀)으로 아버지가 대사 충훈(忠訓)이다. 그들에게 의복, 그릇, 노비, 수레, 말 등을 주어 예를 갖추어 보냈더니, 당 현종(玄宗)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내종 자매로서 친척과 헤어져 고국을 떠났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도록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보냈다.
정완의 비석에는 ‘효성왕(孝成王) 6년 즉 천보(天寶) 원년(서기 742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덕왕 [聖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이게 기록의 전부고 예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듯
대사(大舍)는 신라의 관직으로써 4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관직
나말(奈末) ·내마라고도 한다. 17관등 중 11번째의 계급
대사와 나마의 등급은 매우 매우 낮은데다 당현종은 왕의 내종자매로 알고 있다. 즉 가왕자와 비슷한 식으로 보내진 것이다.
당현종은 왜 미녀들을 돌려보냈나?
중요한건 당현종이 돌려보낸이유다.
신라와의 외교를 생각하고, 신라왕을 존중해서 보낸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여러이유가 있겠으나, 먼 훗날 원성왕때의 기록을 보자.
8년(서기 792) 가을 7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바쳤다. 그녀는 나라의 제일 미녀로 몸에서 향기가 났다.
미녀를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즉 미녀를 바쳤고 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당시 황제도 다르고, 당현종의 취미가 다르거나 신라의 미의 관점이 달라졌을수도 있겠지만...
당시 당현종의 나이를 계산하자면
●성덕왕 22년(서기 723) =개원 11년=당현종 685년생=39세
당현종은 39세때 미녀를 돌려보냈다는 것이 된다.
원성왕 8년 미녀를 받은 때는 당덕종 13년이고
당덕종의 나이를 계산하자면
●원성왕 8년(서기 792) =정원 8년 =당덕종 742년생=51세
당덕종이 미녀를 받은 나이는 51세이다.
당시의 39세가 요즘으로 치면 50대라는 말이 있는걸 감안하더라도 당현종이 성덕왕이 보낸 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추측하자면...
①신라왕의 인척이 되는 순간 신라의 눈치를 봐야해서?
역사적으로 군주의 아내가 외국 공주출신인 경우 군주는 해당 국가와 적대적이거나 강경하게 나서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훗날 미녀를 거부함으로서 당나라는 신라에게 발해를 공격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짐.
신라공주출신 아내가 생긴다면 성덕왕에게 군사요청을 할 때 강하게 못나가거나 오히려 외교적으로 밀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너무도 낮다.
애초에 신라가 보낸 미녀는 공녀개념이다.
고구려 조차도 미녀를 보냄으로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고, 그 미녀를 받거나 거절하는건 황제의 권한이었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너희가 바친 사람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당서 고려(고구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애초에 공녀 몇 명 받아들였다고 눈치보이거나 그런거 존재하지 않는다.
②당과 신라의 미녀상이 달라서?
당시 당의 미녀상은 둥글고 풍만하고 통통한 외형이었다.
살찌는 것이 아름다움(以胖为美)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신라여인상과 비교해볼 때나 신라의 목욕문화, 화장문화에 비추어볼 때 가능하긴 하다.
그렇지만 애초에 얼굴색, 체형이 다르고 유무는 역시 가능성은 있어도 근본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③무혜비를 사랑해서?
물론 개드립성 가설이긴 하다. 한여자를 그렇게 사랑한 사람이 무혜비의 아들 수왕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를 뺏는가?
황제라고 하고픈짓 다하지 못하게 제어하는 역할을 무혜비가 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내려본다.
④ 이런 조공거절의 기록은 거절했기에 기록에 남았다?
고구려나 신라의 미녀조공기록이 역사속에 남은 이유는 꾸준히 미녀를 보내다가 국가간 관계정상화를 목적으로 보내거나 위기 모면용도로 보낼 때 혹은, 조공받는 국가가 거절할 때 정도이다. 즉 꾸준히 받아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당현종이 미녀보기를 돌같이 하는 황제였을까? 아니다.
성덕왕대에 꾸준히 미녀를 진상하다가 그날 마침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수도 있고, 복합적인 이유로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덕종의 예가 있겠지만, 당덕종이 미녀를 받은 기록은 그 미녀도 미녀지만 ‘몸에서 향이 났다’는 특이한점 때문에 더 주목을 받았다.
뭐 그런데 내가 당현종이 왜 거절했는지 어찌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