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특한 은유에 능하다. ‘접시론’도 그 중 하나. 찻잔의 기품을 위해선 접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 때뭉에 주위를 밝히는 존재. 바로 김성근 감독(61)이다. 12일 LG 구리구장에서 만난 김 감독은 이번엔 ‘들국화론’을 폈다. 자신이 거친 들국화라면 삼성의 김응룡 감독은 화려한 장미란다. 닮은 구석이 없는 장미와 들국화가 어울려야 세상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이다. 김 감독의 절제된 자기평가는 희대의 명승부로 평가받는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또 한번 입증됐다. 김성근 감독과 LG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명승부가 나왔을 것인가.
●야구의 신, 김성근?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패배. 그에겐 진정한 승리자라는 헌사가 바쳐졌다. 적장인 김응룡 감독마저 “신(神)하고 싸우는 것 같았다. 투수교체나 대타기용이 기막혔다”고 찬사를 보냈다. 페넌트레이스 4위팀 LG가 현대와 기아를 연파하며 한국시리즈에 오른 것부터 이변이었다. 전력도 뒤지고 부상병동에, 7게임이나 치러 체력도 바닥이었다. 삼성이 4연승하며 끝낼 것으로 점치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LG는 놀랄 만한 투혼과 집중력으로 달려들었고 운명의 6차전에서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쳤다.
먼저 신(神)이 된 소감(?)을 물어봤다. “어허~무슨 그런 소릴.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김응룡이라는 산을 한번 넘고 싶었는데 못넘은 게지. 김응룡 감독은 역시 대단한 승부사야. 우승은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시즌 전에 선수들에게 ‘4강까지는 내가 하겠다. 그 이상은 너희 몫’이라고 했는데 이를 해줬으니 만족할 수밖에.”
●야구는 기억력이다
이번 시즌 그는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관리야구의 신봉자로 이기는 경기에 집착한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선이 굵은 야구가 펼쳐진 것이다. 데이터야구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 주체가 코치와 선수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김 감독의 관리야구가 선수들의 호응으로 신바람야구가 된 셈이다.
“데이터의 깊이는 무궁무진한 거요. 여러 개의 데이터로 다양한 조립이 가능하거든. 기아전도, 현대전도 내가 이긴 게 아니라 데이터가 이긴 거지.” 김 감독의 데이터야구에 대한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도루를 예로 들자. 이번 시리즈에서 그는 정규시즌의 데이터를 철저히 활용했다. 정규리그 삼성전에서 16개의 도루를 성공했는데 무사에서 2개, 1사에서 4개, 2사에서 10개가 나왔다. 여기에 당시 볼카운트까지 적용하면 100% 성공 타이밍이 나오는 것이다. “야구는 기억력(데이터)이다. 겨울(동계훈련)엔 몸이 책임지고 봄부터 가을(정규시즌)까지는 머리가 책임진다”는 말은 데이터야구의 근간을 이룬다.
포스트시즌을 장담할 수 없었던 만큼 심적 부담은 대단히 컸다. 5월 말부터 매스컴과의 접촉을 피하고 매일 밤 자료를 분석했다. 오전 서너시까지 가기 일쑤였다. 술도 끊다시피했다. “맥주 한잔이라도 먹으면 다음날 경기에서 순간 포착이 느려지거든.”
●25년 만의 눈물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장면은 역시 6차전이다. “9회말 수비 때 조인성에게 선두타자 김재걸을 조심하라고 해놓고 구체적인 지시를 빠뜨렸어. 2루타를 맞은 게 꼬였지.”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았을 때는 어땠을까. “눈물이 나오더구먼. 카메라에 안잡히려고 고개를 돌려서 몰랐을 거요.”
김성근 감독이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번째는 충암고 지휘봉을 잡았던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교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당시 황금사자기대회 8강전에서 충암은 한동화 감독의 신일과 맞붙었다. 9회말 1사까지 2-0으로 앞섰다. 상대는 노히트노런으로 허덕였다. 그런데 박종훈과 양승호에게 연속 안타를 맞더니 김남수에게 끝내기 3점홈런을 맞고 말았다. 대입특기자 혜택이 부여되는 4강을 눈앞에 두고 패한 선수들은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그때 주전포수였던 조범현(현 SK감독)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난 이제 어떡하노. 대학 우째 가노’하고 울부짖는 거야. 허 참 나도 울고말았지….” (충암은 그해 마지막으로 출전한 봉황기대회에서 극적인 첫 우승을 차지했다)
포스트시즌에서 김 감독은 중요한 걸 깨달았다고 했다. 절대 서두르면 안된다는 것. “마음을 가라앉히니까 상대 움직임이 저절로 읽히는 거야. 예전엔 안달복달해도 잘 안됐는데…. 내가 변하니까 다 바뀐다는 걸 깨달았어.”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로
야구인생 45년에도 여전히 배운다는 김성근 감독. 불 같은 끈기는 어디서 배태된 것일까. 그는 학연도 지연도 없었던 재일동포 2세다. 경남 진양이 고향인 부모님이 결혼 후 일본으로 이주해 1942년 교토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야구를 시작한 것은 교토의 시조중 2학년 때. 문전박대당하다 겨우 유니폼을 입었지만 전혀 소질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험치고 들어간 가쓰라고교 시절도 별 볼일 없긴 마찬가지. “발이 어찌나 느렸던지 센터 앞에 안타를 치고도 1루에서 아웃되는 거야. 체육선생님을 찾아가 하소연했지. 어떡하면 발이 빨라지냐고. 내리막길을 달리라고 하더군. 그날 밤부터 매일 집 앞 언덕길을 50번씩 달렸지.” 배팅볼투수에 불과했던 그는 고3 때 난카이(현 다이에)팀에서 동계훈련을 위탁받으면서부터 기량이 급속히 늘었다.
59년 8월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박영길 김응룡 유백만 백인천 등 쟁쟁했던 선수들과도 이때 만났다. 62년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김성근의 활약에 힘입어 최강 일본과 접전을 펼치는 등 선전했다.
그를 눈여겨본 야마모토 에이치로(현 일본야구협회장)가 이런 제의를 했다. “일본에 오는 대로 사회인팀에 들어가라. 1년 안에 프로로 선발하겠다.” 그런데 한국에서 열린 대표팀 환영식에 참석한 게 운명의 갈림길이 됐다. 교통부와 기업은행 등 신생팀이 “김성근이 오면 창단하겠다”고 달려든 것이다. 일본에서 갖은 차별을 받았던 그는 모국팀의 환대에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가족과 헤어지면서 결심했지. 반드시 최고 투수가 되겠다고.”
왼손 투수 김성근의 위력은 대단했다. 63년 대통령배실업연맹전에서 인천시청을 상대로 탈삼진 13개를 기록하며 사사구 한개만 내줘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이듬해(20승5패)에는 9연속 완투승이라는 초인적인 기록도 세웠다. 1루코치를 겸하며 상대 투수와 포수를 면밀히 관찰하는 훈련을 했다. 데이터야구의 기초는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가 있기에 행복했다
오랜 시즌을 끝냈으니 꿀 같은 휴식을 취할 법하건만 예상을 깨끗이 저버린다. “2군 선수들의 훈련계획을 점검하느라 정신없어요. 11일 큰딸(미화)생일 때 온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한 게 다행이었지.” 올해 12월 13일이 환갑이지만 잔치는 애당초에 글렀다.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야구장에 있으면 그게 생일잔치인데 뭐, 허허허.” 어느 삼성팬의 말마따나 2002시즌은 김성근 감독이 있기에 행복했다. “당신은 적장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경기의 고비고비, 게임의 갈피갈피마다 스며 있는 당신의 마음과 선수들의 땀을 봤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승자입니다. 칼 끝에 앉은 승부처에서도 담담한 모습으로 데이터를 뒤적이고 전력을 다하며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도 마해영의 끝내기가 터진 후 망연히 응시하던 눈길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돌아보면 물같이 흘렀을 야구, 당신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참으로 많은 세월이 떠오르는군요. 내년에도 멋진 승부의 세계를, 당신이 가진 멋진 승부사의 기질을 보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