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일, 양구 수입천의 두타연을 찾았다.
두타연으로 들어가는 길을 걷다가 문득 숲 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산양이었다.
그것도 멀리 바위벼랑에 붙어 있는 산양이 아니라 탐방로 바로 옆, 철조망 너머에서 태연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산을 오래 다니다 보면 산양이 얼마나 조심성 많은 동물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된다.
사람 인기척을 느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운 좋게 발견한다고 해도 잠깐 모습을 보인 뒤 금세 바위나 숲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KBS나 EBS 자연다큐에서 산양이 화면 가득 잡히는 모습을 보면 가까이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하거나 무인센서카메라를 오랫동안 설치해 두고 얻은 장면이 많다.
그만큼 야생 산양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산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희귀 야생동물 가운데 하나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이자 천연기념물이다.
가파른 암벽과 험한 산악지대를 좋아하고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 북부 산악지역과 DMZ 접경지역 등을 중심으로 서식한다.
그런 산양이 이날은 사람 몇 명이 지나가는데도 별다른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두타연 안내를 맡은 근로자에게 물어보니 이 녀석은 하루에 한 번 정도 두타연 쪽으로 내려와 풀을 뜯는다고 한다.
"여기 풀이 특별히 맛있는 건가요?"
물어봤지만 그것까지는 모른단다.
혹시 사람이 사료나 먹이를 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더 궁금해졌다.
두타연 일대는 오랫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됐던 곳이고
지금도 군부대와 철책, 지뢰경고판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지역이다.
혹시 이 산양이 어려서부터 이 일대에서 생활하면서 군인이나 관리 인력을 반복해서 보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내자에게 그런 이야기도 해봤지만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루에 한 번씩 내려옵니다"라는 말뿐이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사람 손을 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야생동물도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자극이 반복되고 특별한 위협이 없다면 어느 정도 익숙해질 수 있고,
같은 종이라도 개체에 따라 경계심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두타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온 이 산양만의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산양보다 탐방객들이었다.
산양이 길 바로 옆에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냥 지나간다.
고개 한 번 돌려 숲을 바라보면 보일 텐데 산양이 있는지 없는지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산을 오래 다니다 보면 숲에서 색깔 하나가 다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만 보여도 눈이 먼저 간다.
그래서 산양을 발견한 것도 어쩌면 운 반, 눈썰미 반이었을 것이다.
산양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래전 독주폭능선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산양을 비롯한 야생동물의 움직임을 관찰하려고 능선에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는데,
하산 중 그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산양이 지나가면 움직임을 감지해 자동으로 촬영하는 카메라였을 텐데, 장난기가 발동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산양 찍으라고 설치해 놓은 카메라에 산양 대신 산꾼이 제 발로 찾아가 촬영분량을 만들어준 셈이다.
나중에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영상을 확인하다가
산양 대신 웬 머리 풀어헤친 날라리산꾼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나는 걸 봤다면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다.
혹시 그 뒤로 국립공원관리공단 내부에
WANTED, 독주폭능선 괴인 수배 중
이런 전단이 돌았는지는 모르겠다. ^^
그때는 내가 산양 대신 카메라 앞에 나타났는데, 이번 두타연에서는 진짜 산양이 먼저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도 지뢰경고판과 철조망 바로 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풀을 뜯으며.
두타연이라는 곳과 참 잘 어울리면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산양이 그곳으로 매일 내려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풀이 맛있어서인지, 그 자리가 안전하다고 느껴서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이어온 자기만의 하루 일과인지.
그 답을 모르는 것도 야생동물을 보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첫댓글 환경부에서 설치한 아프리카 돼지열병 방지 철책으로 우리나라 산양 90%가 아사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일부 길냥이 같이 아마도 인간에게 익숙해서이지 않을까
산양처럼 겁쟁이들이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 말야
킬문님 말씀에 사족...
산양이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려 죽은 이야기는 아니더라고요.
2019년 이후 야생멧돼지의 ASF 확산을 막으려고 강원, 경기 산악지역에 광역 차단 울타리를 길게 설치했는데, 강원지역에만 1,100km가 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폭설이 내리면 산양이 먹이를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철망이 이동을 막았다는 겁니다.
특히 2023년 겨울부터 2024년 봄 사이 강원 산악지역에서 산양이 대규모로 폐사했는데, 당시 집계로 약 750마리 이상이 죽었다고 해요.
폭설, 먹이 부족, 탈진이 직접 원인이었고 여기에 ASF 울타리가 이동을 막으면서 피해를 더 키웠다는 것이죠.
그래서 킬문님이 기억하신 "산양 90%"라는 숫자는 특정 지역이나 당시 보도 내용이 섞여 기억된 것 같고,
정부도 나중에는 울타리가 피해를 키운 측면이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2026년부터는 설악산, 소백산 국립공원 일대 일부 ASF 광역울타리를 단계적으로 철거하는 쪽으로 가고 있고요.
돼지열병 막으려고 설치한 철망이 멧돼지만 막은 게 아니라 산양의 생존길까지 막았던 셈입니다.
“고기로 흥(興)한 자(者), 고기로 망(亡)한다.”
제가 종종 하는 말입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막으려고 설치한 철책 때문에 산양의 이동로까지 막혀 대규모 폐사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보니,
결국 인간이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고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이어집니다.
저는 고기를 먹더라도 조금은 가려서 먹자는 쪽입니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海 → 空 → 陸'
바닷고기부터, 그다음 하늘고기, 마지막이 뭍고기입니다.
영양학적으로도 생선과 가금류는 일반적으로 붉은 고기보다 포화지방이 적은 편이고,
생선은 오메가3 지방산 같은 장점도 있어서 붉은 고기보다 생선과 가금류를 우선하라는 권고가 많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하는 '海 → 空 → 陸' 순서도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이죠.
사람도 포유류인데 같은 포유류인 소나 돼지를 이렇게까지 대량으로 길러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생선은 괜찮고 육고기만 나쁘다는 식으로 생명의 가치를 나누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저 지금처럼 고기를 너무 당연하게, 너무 많이 먹는 식생활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고기를 주(主)로 먹지 말고 부(副)로 먹자.
삼겹살이나 갈비처럼 고기만 잔뜩 구워놓고 그것을 주로 먹으면 아무래도 먹는 양이 많아집니다.
반대로 국에 조금 넣어 먹거나 채소와 다른 재료에 섞어 반찬으로 먹으면
고기는 여러 재료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자연스럽게 먹는 양도 줄어듭니다.
고기를 끊자는 것이 아니라 고기가 밥상을 지배하지 않게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닭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계란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좁은 케이지 안에서 평생을 보내는 산란계나,
짧은 기간에 빨리 살을 찌우도록 길러지는 육계의 사육환경을 보면
그것 역시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명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殺生有擇, 살생유택까지 가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적어도 고기를 덜 먹고, 가려 먹고, 어떤 환경에서 길러진 생명인지 한 번쯤 생각하면서 먹자는 겁니다.
돼지고기를 지키려고 산에 긴 철책을 쳤는데 그 철책에 멸종위기 산양의 길까지 막혀버렸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먹는 고기 한 점이 어디에서 오고 그 한 점을 위해 무엇이 희생되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봐도 괜찮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