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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호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이를 앙다물었다.
바로 그때, 신나게 발길질 하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듯 놈들은 변강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말세야, 말세! 이렇게 어린놈들이 골목에서 행패나 부리고."
벼락같은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변강호는 담벼락에 몸을 의지해 겨우 일어나 앉았다.
피로 범벅인 된 눈을 비비고 앞을 살폈다.
황색 개량한복을 입고 수염이 희끗희끗한 사내가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냐?"
무리중의 한 놈이 호기롭게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내에게 달려들었던 놈이 맥도 없이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머지 놈들도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말로해서는 안 될 녀석들이군."
변강호는 하도 맞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몽롱했다.
그런 변강호를 뒤로 한 채 사내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순식간에 놈들이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사내가 쓰러진 놈들 앞으로 다가갔다.
"네 놈들이 이 골목을 어지럽힌다는 바로 그 양아치들이로구나.
두 번 다시 이 골목에 나타나지 마라. 내 눈에 다시 띄면 그땐 영원히 세상 구경 못할 줄 알아."
사내는 기합도 넣지 않고 담벼락에 엄지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담벼락은 힘없이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만약 내 귀에 또 다시 네 놈들 얘기가 들려오면 지구 끝까지 찾아가…."
사내가 이번에는 곁에 우뚝 서 있던 전봇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마치 두부를 찔러보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변강호는 두 눈을 비비고 눈을 크게 떴다. 사내가 전봇대에 찔러 넣은 엄지손가락을 빼내자,
시멘트 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어린놈들은 놀라서 그 길로 줄행랑쳤다.
"자네가 강호라는 사낸가?"
사내가 만신창이가 된 변강호에게 다가와 물었다.
"외삼촌!"
바로 그때, 골목 저편에서 이소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변강호는 반가운 마음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얼마 후 어둠 속에서 이소정이 모습을 나타냈다.
"넌 뭐 하러 나왔냐. 내가 데리고 간다니까."
"걱정이 돼서요."
변강호를 구한 사내는 다름 아닌 이소정의 외삼촌이었다.
언젠가 이소정에게 한번 들은 적이 있었다.
사내가 가볍게 변강호를 부축했다. 변강호는 삭신이 쑤셔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소정은 아담한 한옥으로 변강호를 안내했다. 사내는 변강호를 서재의 보료 위에 눕혔다.
한문 제목의 책들이 가득했고 한약 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 소정이 외삼촌인 박무달이라고 하네. 소정아 이 청년, 옷 좀 벗겨야겠다."
변강호가 말릴 새도 없이 이소정과 박무달이 변강호의 옷을 벗겼다.
박무달은 변강호를 엎어놓고 팬티를 벗겼다.
이소정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변강호의 벗은 몸을 지켜봤다.
변강호의 몸은 피 멍투성이였다.
"우두둑…!"
박무달이 몸의 경락을 따라 천천히 지압을 하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변강호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저절로 악, 소리가 날 만큼 통증이 심했다.
"어혈을 풀고 놀란 근육을 다스리는 거니까 좀 참아!"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이소정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 있는 것도 창피했다.
"원래 좋은 몸을 갖고 태어난 청년이군. 이제 앞으로 돌아누워!"
"여, 여기서요?"
변강호는 이소정을 쳐다보며 난감해했다.
"그래도 여자가 있는데…."
이소정이 웃음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 변강호는 그제야 주춤거리며 돌아누웠다.
박무달이 손가락 끝으로 혈자리를 눌러댔다. 역시 통증이 말이 아니었다.
"기 치료하는 거야. 내일 아침이면 거뜬할 테니까 좀 더 참아!"
박무달이 변강호의 사타구니에 이르러 치료하던 손길을 멈추었다.
"음, 물건은 훌륭한데 아직 덜 자랐군."
"네?"
변강호는 귀가 번쩍 틔었다.
"자네 거시기말야. 훌륭한 게 달려있는데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덜 자랐다고."
"이게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서도 자라나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지."
변강호는 느닷없이 박무달이 존경스러워졌다.
박무달의 치료 덕분인지 변강호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같은 시각, 평창동 일식집 '긴자'의 국화실. 대일 그룹 회장 변승우와 변강호의 어머니
강승혜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깔끔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술잔만 홀짝이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긴자의 마담인 양초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맞선 보세요? 말씀들을 안 하시게. 오랜만에 만나셨는데 회포도 푸셔야죠."
"부부란 게 원래 말이 없어도 통하는 거야."
변승우가 농담을 했다. 양초선은 미소를 지었지만 강승혜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잠깐만 나가 있을래?"
양초선이 문을 열고 조용히 나갔다.
변승우에게 초선을 소개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강승혜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변승우가 유일했다.
"들으셨지요?"
변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강호가 대일에 들어가는 걸 강력히 반대했어요. 그런데 이게 뭐죠?"
변강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승혜야, 내겐 온실에서 키운 그럴듯한 꽃은 많아.
그런 꽃은 온실이 사라지는 순간 죽어버리지.
내겐 정글이나 혹한에서도 살아남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잡초 같은 놈이 필요한 거야.
내 말 알아듣지?"
강승혜는 변승우의 깊은 의중을 헤아린 후 다소곳이 일어나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변승우는 그런 강승혜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변장수는 집에서 나와 김세희의 오피스텔로 달려갔다.
이제 신선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누라로부터 해방이었다.
그럼에도 늘 애처가라는 인상을 주는 건 그녀가 금우그룹 둘째 아들의 맏딸이기 때문이었다.
"응, 거의 다 도착했어."
변장수는 휴대폰을 접고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를 주차 시킨 후 휴대폰을 점검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생활 습관을 길들이지 않으면 맘 편히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여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번호는 모두 삭제, 여자에게 건 전화번호도 삭제.
밤늦게 김세희에게 건 전화도 삭제했다. 발신자 이름을 남자로 해놓는 건 이제 구식이다.
수시로 통화하는 사람이 수백 명인데 그건 사실 불합리한 방법이기도 했다.
모든 게 마누라의 의심을 일소시키기 위한 변장수의 생활 습관이었다.
행여 집으로 어갈 때 지우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오면 휴대폰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건 기본이어야 한다.
마누라가 볼 수 있는 곳에 휴대폰을 놓고 은근히 그녀가 볼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것도
바람을 맘껏 피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회사 하나를 주물럭주물럭 하는 데 마누라는 그게 왜 안 되나 모르겠어.'
김세희가 사는 오피스텔 벨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그녀가 다짜고짜 달려들어
변장수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실장님 생각하느라고 잠도 못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나오셨어요?"
"샤워했어?"
"그럼요, 실장님 오신다는데 그냥 있으면 제가 일급 비선가요."
변장수가 껄껄거렸다.
"실장님 요즘 앓던 이가 빠져서 속이 시원하시죠?"
변장수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왠일인지 침대가 축축했다.
'샤워하고 물기도 안 닦고 누워 있었나?'
"꼭 그렇지도 않아. 강승혜랑 우리 회장님이 오늘 만났다는 전화가 왔어."
김세희는 무릎을 꿇고 앉아 변장수의 바지를 벗겼다. 팬티를 벗기자 검고 늙은 물건이 나타났다.
물건은 축 늘어져 있었다.
김세희가 장난스럽게 몇 번 만지작거리자 변장수의 물건이 불뚝 일어났다.
"어머머머, 정말이지, 실장님 같은 실력파에 물건만 이 정도면 당장 시집가겠어요."
"내 물건이 아직도 쓸 만하지?"
"쓸 만하다 뿐이에요. 최고라니까요."
전략 영업부로 발령받아 온 직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쇼핑몰 부서가 해체된 후 남은 고길수, 전자 부서의 고객 만족 팀에서 일한 맹순희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여자 신입사원으로 신정하와 이소정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은 강무혁 부장이었다.
"변 대리는 부산 출장 다녀오느라 부서가 바뀐 걸 몰랐겠군."
강무혁이 임달호에게 인사 철을 넘겼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사원들의 면면을 살피던 변강호는 기가 막혔다.
고길수는 아이큐가 높고 똑똑하다고는 하지만 회사 내에서 알아주는고문관이었고 맹순희는
우직해 보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맹한 사원이었다.
신정하는 제법 예쁘고 몸매도 그럴듯했지만 턱을 꼿꼿하게 들고 서 있는 폼이 공주병 초기의 여자인 했다.
그나마 이소정이 센스 있고 똘똘해 보였다.
"저 부장님, 이 인원만으로는 부서 두 개를 운영한다는 게 좀…"
손을 앞으로 모으고 말하는 임달호의 입가에 억지웃음이 그려졌다.
"이봐요, 임 과장. 통합되어 있던 쇼핑몰을 나누기로 한 거 몰랐습니까?
도대체 회사 왜 다닙니까?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내가 지난 회의 때도 그랬죠. 일 설렁설렁하면 인사고과에 분명히 반영한다고."
강무혁은 변강호를 한번 힐끔 쳐다본 후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쇼핑몰 나눈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저, 과장님. 지난주에 작업 다 끝냈거든요."
고길수가 우물쭈물 말했다.
"원단은 원단 파트만, 의류는 의류 파트만, 전자는 전자 파트, 그리고 화학 파트는 화학 파트대로
건설은 건설대로 떼어놨습니다."
"그런데 왜 나만 모르고 있지?"
"사내 홈피에 다 올린 이야긴데…, 맞고만 치지 마시고 가끔 사내 홈피에도 들어가 보세요.
요즘 사내 게시판에 공고 안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임달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그래? 내가 맞고나 친다고? 사무실에서 인터넷 서핑하거나 맞고 치는 놈들 앞서서 몰아낸 사람이 나야."
고길수는 불그죽죽한 임달호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미소를 지었다.
"에이, 과장님도 참. 사내에 소문이 짜 합니다. 임 과장님이 맞고의 달인이라고 말입니다."
"야!"
임달호가 가슴을 쳤다. 그래도 고길수는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언제 맞고 기술 좀 전수해 주세요. 사이버 머니 그거 돈 된다고 하던데. 과장님은 돈 많이 버셨겠는데요."
임달호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고길수 뒤에 서 있는 맹순희는 그저 맹한 표정만 짓고 있었고
신정하는 눈을 흘겼다. 이소정만 변함없이 다소곳이 서있었다.
"서로 인사들 나누고 있어요."
임달호는 씩씩거리며 변강호를 회의실로 끌고 갔다.
"아주 꼴통만 모아 놨구만. 인사 과장 이 자식을 박살내든가 해야지."
임달호가 인사 서류철을 변강호에게 넘겼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를 내며 나갔다
돌아온 임달호의 얼굴은 더 붉으락푸르락했다
급조된 전략영업부. 말은 그럴 듯하지만 임달호의 말대로 꼴통들만 모아 놓은 부서였다.
어쨌든 부서원 여섯 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중요한 부서라고 그러던데 맞죠?"
다리를 꼬고 앉은 신정하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변강호 뿐만 아니라
임달호는 물론 고길수 역시 그녀의 반들반들한 다리에 눈길이 꽂혀 있었다.
신정하는 그런 눈길을 즐기는 지 반대쪽 다리를 들어 다시 꼬았다.
잠깐 치마가 들썩였다."주, 중요한 부서지. 시장을 새로 개척해야 하는 거나 다름없는 부서니까."
임달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변강호는 신정하의 다리에서 눈길을 뗀 후 그녀의 신상명세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신상명세서를 훑던 변강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를 추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오탁번 상무였다. 변승우 회장 첫 번째 부인의 동생이었다. 변강호는 그녀의
신상명세서를 임달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때까지 풀어져있던 임달호의 눈이 빛났다.
"분명히 말하겠는데 저는 커피 심부름, 결재 심부름, 사무용품 심부름 같은 거 절대로 안 합니다."
신정하가 맹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회사는 그런 회사 아냐."
해외영업부로 간 민금선에게 걸핏하면 커피 타 오라는 둥 복사 해오라는 둥 잔심부름을 시키던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저는 성희롱 같은 건 절대로 못 참는다는 거 명심해 두세요."
"요즘 그런 남자들도 있나?"
오탁번의 추천이라면 큰 빽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한편으론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변강호의 잔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오탁번의 추천을 받았다면 기조실이나 비서실 그도 아니면 인사부나 총무부로
가야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새로 급조된 전략영업부로 왔다. 뭔가 뒤 구린 데가
있는 여자가 분명했다. 반면 이소정은 S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녀의
전략영업부 발령 역시 이해되지 않았다.
삐거덕거리긴 했지만 전략 영업부의 업무는 시작되었다. 쇼핑몰을 새로
구축하는 일에서부터 과거 대일전자의 업무를 파악하는 일까지 산더미 같았다.
비록 밥통과 스팀 청소기만 제조해 판매하긴 했지만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1주일은 더 필요할 듯했다.
고길수는 쇼핑몰을 꾸미느라 끙끙거렸고 맹순희는 묵묵히 전자 부서의 업무들을
제조와 판매 운송 등의 업무로 분류해 정리하고 있었다. 이소정과 신정하는 그들을 도왔다.
A/S 업무와 고객만족 부분은 변강호가 담당했다.
"강 실장이 빨리 보고서 올리라고 난린데…."
인터넷을 뒤지고 있던 임달호가 중얼거렸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과장님, 저는 야근 안 해요. 야근 수당 안 받으면 되는 거죠?"
하루 종일 거울만 들여다보던 신정하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며 말했다.
한참 일하던 직원들이 신정하를 멀뚱하니 쳐다봤다. 빽을 믿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몸을 비트는 그녀가 밉지 않았다.
"첫날인데 신입사원 환영식 같은 건 안하나요?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