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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거의 한달만에 쓰는 일기라서 일기가 아니고 주기(?), 혹은 월기(?) 같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 내 펜이 무지하게 떨려서 글씨가 매우 안좋다.
초등학교 받아쓰기 이래 이렇게까지 글씨를 흘겨 쓴건 오늘이 처음이다.
샤프심도 자꾸만 부러진다. 내가 나도 모르게 힘을 너무 준 것일까.
아니다. 나의 분노를 펜과 샤프심마저도 같이 느끼고 있는게 분명하다.
지금 내가 이 일기를 쓰는 곳은 내가 상세하게 써놓은 기와집이 아니다.
성북동 일대의 어느 허름한 판자촌이다.
학교에서 독서 퀴즈대회, 독후감 대회를 할때나 읽은 그야말로 '소설속의 픽션'같은 집들이다.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이연수가 이렇게 될줄이야.
내가 말했듯, 3개월전, 아니 4개월전쯤 아빠가 가시고 나서 동네 아주머니며,
아빠 거래처 사람이라며 집에 많이 회식하러 오던 분들이며, 심지어 친가 친척까지 왔다.
사람이 너무 북적대는 것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처음에는 우리가 너무 커서 이제는 애들 취급 안해주는 구나싶어 좋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릴 애들 취급하기 이전에 먼저 '무시'를 했고 철저히 자기 볼일만 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엄마는 자주 집을 비우고 할머니 역시 전화 받기에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하루동안 집을 비운다며 점심과 저녁을 해놓고 그다음날 새벽에,
물론 아침밥은 해놓고 가셨지만, 아침밥은 같이 먹을 시간에 온다던 엄마.
그래서 그들에게 집은 그렇게 쉽게 함락 당했나보다.
집안은 이미 완수의 포켓몬 카드나 딱지보다 약간 큰 빨간 종이쪽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무얼 하러 와도 이건 너무 이르다. 그 종이엔
18일날 온다고 써있는데.
이른 새벽 잠이 없는 내가, 나무로 된 사립문을 무식하게 거의 부수려는 듯한 소리를 듣고
놀라 "누구세요!"하고 문을 연 순간ㅡ
'적군'은 '성채'로 무지막지하게 몰려들었다.
결사항전하지도 않았는데, 재미로 그 성안의 사람을 모두 죽이고 불지르듯이,
그들은 닥치는대로 뒤집어 엎어서는 끌어 내는 것이었다.
"연수야! 완수야! 이 거이 무신 소리데냐!"
할머니가 놀라서 뛰어 나오시다가 그만 쓰러지실 뻔했다.
할머니는 할머니 방으로 급히 들어가셨다. 그때 아마 전화를 하신 것 같다.
나는 정신 없이, 그들이 우리 집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한 완수를 달래어,
"완수야! 너 빨리 니 방에 있는 학원 가방, 학교 가방, 베낭 이런데다가
교과서랑 용돈 지갑이랑 엄마가 어제 정리해둔 옷 있지? 그거 다 집어 넣어 갖고 나와.
얼른!"
그러고서 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문은 잠겨있는지라, 나는 안방으로 통하는 부엌에 난, 웬만해선 찾기 힘들게
세탁기와 쌀농 사이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엄마 화장대를 뒤져서는
엄마의 바느질 상자에 엄마의 팔찌, 반지, 목걸이부터 시작해서 신용카드며, 저금통장이나
가계부 곳곳에 꽂힌 지폐들을 주워 담았다.
그들은 오래된 문이 너무 급하게 다뤄서 망가져서 오히려 문이 막혀버리자 문을 부수려했다.
그제서야 나는 안방 장롱을 뒤져 엄마의 옷가지와, 소중한 수첩따위를 모으고 모았다.
그리고 안방 장롱에 숨겨져있던 엄마가 모아 놓은 이상한 조선시대 그림들을 옷가지 사이에
숨겨 부엌의 쪽문 밑에 쟁여 놓았다.
가장 중요한 내 방을 잊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인부들이 뭐가 제일 많을거라고 생각한
안방의 문을 여는데 주력하고 있어 내방에는 컴퓨터를 해부하는 아저씨하나 뿐이 없었다.
내 방에 널린 가방들ㅡ학원, 학교, 베낭, 옆으로 메는 가방...ㅡ에 옷가지를 잔뜩 넣고,
입고있는 잠옷 위에 교복을 대충 걸쳤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입학때부터 군것질 할 돈을
모으고 또 모은 통장을 꺼내고, 서랍에서 나온 가족사진을 꺼냈다.
그제서야 문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연수야! 완수야! 어머님!"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에 엄마가 부른 셋중의 하나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을까봐서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할머니는 할머니방에서 그제야 나오셨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할머니들은 돈을 지갑에 모아 놓으면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벽뒤에나,
이불 밑 등 잡다한데다가 돈을 다 쑤셔 넣는다고.
그 돈을 다 회수하고 옷가지를 들고 나오시느라고 늦으신거다.
우리가 옷가지를 왜 챙겼을까?
돈은 왜 챙겼을까?
누군가 쳐들어와 집을 마구 부숴도 대항 한번 못하고 도둑이냐고 소리도 못지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짐을 챙긴 것은
몇달전부터의 석연찮은 일들의 반복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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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습니다. 에휴, 아빠란 사람 참 못된 거 같아요.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