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까지 코끼리표 일제 전기압력밥솥은 대한민국 주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한 선물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주부들은 더 이상 이 밥솥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코끼리표보다 성능이 뛰어난 한국 토종 밥솥이 출현했기 때문. 쿠쿠홈시스(주)의 ‘쿠쿠 전기압력밥솥’이 바로 그것이다.
2005년 12월 현재 쿠쿠홈시스(주)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베트남 등 세계 24개국에 밥솥을 수출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에서 생산하고 있는 밥솥은 물론 일본의 코끼리표까지 누르고 이 부문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회사의 2005년 매출은 2,700억 원으로 당초 목표했던 2,2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창업자인 구자신 사장을 도와 쿠쿠홈시스(주)를 밥솥 명가(名家)의 자리로 끌어올린 구본학 부사장(36세겚맛黴?사장의 아들)을 만났다. 그는 이 회사의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가마솥 밥맛을 실현한 전기압력밥솥 개발이 그 비결이에요. 우리 연구소에는 남자 연구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1년에 총 10톤 이상의 밥을 짓습니다. 이분들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밥을 잘 짓는 남자들일 겁니다.”
드라마 <대장금>을 본 주부들이라면 최 상궁과 한 상궁이 벌이던 한판 요리 대결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궁중 최고의 요리사인 이들에게 주어진 시험 과제는 요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밥 짓기였다. 승부의 결과는 한 상궁의 승리로 돌아갔다. 입맛에 따라 진밥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된밥을 좋아하는 이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 한솥에 여러 종류의 밥을 지은 한 상궁의 세심한 배려와 마음씀씀이 때문이었다. 쿠쿠는 이런 한 상궁의 마음을 담아 쌀밥, 현미밥, 야채밥, 잡곡밥, 죽 등 다양한 메뉴를 조리할 수 있는 밥솥을 개발했다.
웰빙 시대에 맞춰 일반 현미로도 발아현미밥을 만들 수 있는 현미 발아 기능 밥솥을 히트시켰고, 최근엔 장작불로 가마솥에 밥을 짓는 효과와 항균효과가 뛰어난 황금내솥을 출시했다. 구본학 부사장의 설명.
“저는 늘 고객들의 목소리를 체크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특히 직원들과 고객 게시판에 오른 내용은 모두 공유하죠. 고객들의 다양한 요구를 연구에 응용해 제품화하기도 하는데, 곧 출시될 밥솥은 유비쿼터스 시대에 맞춰 집 밖에서도 조작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쿠쿠홈시스는 2005년 대한민국 명품브랜드상 수상, 한국 서비스품질 우수기업 지정, 에너지 위너상, 에너지 기술상 수상, 2005년 노사문화우수기업 선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을 받았다. ‘세계 전기밥솥 시장 1위 업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낸 주인공은 구자신 사장이다. 구 사장의 성공 뒤에는 피눈물 나는 세월이 있었다.
●쿠쿠홈시스(주)의 창업주인 구자신 사장. 구본학 부사장의 아버지다. |
국내 가전 시장에서 성광전자가 생산한 밥솥은 금성전자 이름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던 중 과열로 인한 화재사건이 발생했다. 화재의 원인이 밥솥에 있는 것으로 나오면 성광전자의 생명은 끝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성광전자는 일단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전기밥솥을 모두 회수했다. 확실한 원인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제품을 계속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 구 사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소비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리콜을 했습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생각으로 이참에 품질을 강화해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리라 의지를 다졌죠.”
구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은 전기압력밥솥으로 최상의 밥맛을 내기 위한 비결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압력의 크기를 조절해 밥을 짓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 결과 최적의 압력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니 고압을 견딜 내솥 두께가 문제였다. 주물 공장을 찾아 기존의 두께보다 훨씬 두꺼운 내솥 제작에 착수했고 실험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밥맛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마솥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전기압력밥솥은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구 사장은 “세계 유일의 안전 특허 시스템을 갖추게 될 때까지 실험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국내 시장을 넘어 해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밥솥의 기능을 다양화했습니다. 나라마다 고유 음식문화가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지요. 가령 중국은 요리를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밥보다는 요리 기능에 중점을 두었고, 일본은 요리와 밥 중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할 것인지 논의하다 역시 폭넓은 시장성을 위해 기본인 밥으로 전략을 세웠습니다.”
쿠쿠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세계 가전 시장의 격전지 일본에서 선전하고 있다.
아버지는 수비수, 아들은 공격수
구본학 부사장은 구자신 사장의 장남이다. 그는 일요일이면 늘 아버지 등에 업혀 함께 출근하곤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공장 마당이 놀이터였고 학교였다”고 말했다.
구 부사장은 1992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회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6년까지 미국의 쿠퍼스 앤드 리브랜드(COOPERS & LYBRAND)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 1996년 쿠쿠홈시스㈜ 해외영업팀장으로 입사했다. 부사장에 임명된 것은 2004년 11월이다.
그가 잘나가던 미국 회계사 생활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한 까닭은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다. 외환위기 한파로 어려움에 처한 당시의 회사 사정을 구 부사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그때 회사를 접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셨습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죠. 제가 보기에 회사를 포기하기에는 사명감을 갖고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웠어요. 사장님은 요즘 수비수로 일하고 저는 공격수로 뜁니다. 저는 마케팅 쪽에, 아버님은 중국 칭다오의 현지법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요. 아버지와 저는 호흡이 가장 잘 맞는 파트너이자 업무상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논쟁 상대입니다.”
1998년 구본학 부사장이 제안한 쿠쿠의 론칭 광고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비용 문제 때문에 대기업들도 CF 제작을 망설이던 상황에서 그는 무모할 정도로 투자를 했다. “그때의 도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그는 말한다.
“TV 광고를 할 당시 은행 금리가 20%였어요. 월 매출이 30억 원이 안 될 정도였으니까 CF 제작은 무리였지요. 외상거래도 안 하고 TV 광고도 안 하겠다는 아버님을 ‘딱 5억 원만 투자해 보자’고 설득했습니다. 야무지고 깐깐해 보이는 탤런트 김희애 씨를 모델로 내세운 CF의 효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쿠쿠’ 하면 탤런트 김희애 씨를 떠올릴 만큼 CF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구 부사장은 가전제품도 패션 비즈니스 분야라고 주장한다. “하드웨어를 팔기도 하지만 현미 발아 등 음식과 건강을 파니 서비스업”이라는 것이다. 패션 비즈니스라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브랜드가 2005년 러시아에서 히트를 친 리오트(Living Innovation Highly의 의미를 가진 소형 생활가전용품 브랜드)다. 쿠쿠는 리오트 가습기를 10만 대 이상 판매하는 실적을 올렸다.
구자신 사장과 구본학 부사장. 이들 부자(父子) 기업가가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세계 가전 시장을 요리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