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비입고 현지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주유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민이.
상민이는 배낭여행 중에 캄보디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해가면서 지내다가 나와 연락이 되었다.
지금 묵고 있는 집에 방이 남는다고 해서 오토바이 뒤를 쫓아갔는데
이것은 집이 아니고 완전 궁궐이다.
집에 짐만 풀어 놓고 상민이가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도착한 첫날부터 외박(?)을 하게 되었다.
상민이의 친구 인휴네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프놈펜에서 알아주는 국수집이 바로 옆집이라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인휴는 ‘까로나의 손짓발짓 캄보디아어’ 책 저자이자 캄보디아어 선생이기도 하다.
콜라처럼 생긴 차를 우선 한 잔씩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국수가 나왔다.
아니, 이건 베트남에서 자주 먹던 쌀국수 퍼(Pho)가 아니던가?
캄보디아 시골에서는 국수를 먹어도 만날 다 식은 소스를 부어서
말아 먹는 게 아니라 비벼 먹는 수준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뜨거운 국물이 있는 국수를 보니 너무 반갑다.
캄보디아에서는 이 국수를 ‘꾸이띠우’라고 하고 베트남처럼 어떤 고기를 넣느냐에 따라
꾸이띠우 쌓꼬(소), 꾸이띠우 쌓쭈룩(돼지), .. 쌓모안(닭), .. 써못(해물) 등으로 바뀐다.
맛있는 쌀국수가 만들어지려면 모든 재료가 중요하겠지만 아무래도 육수가 좌우하지 않을까.
소문난 집이라 그런지 이집 국물 역시 시원하고
접시 위에 넉넉히 떠있는 건더기를 집어서 소스에 찍어 먹는 맛도 괜찮다.
참고로 중국의 샹차이, 태국의 팍취, 한국의 깻잎이 있다면 캄보디아엔 ‘찌’가 있다.
(우리가 샹차이 못 먹듯이 외국인이 한국에 가면 깻잎 못 먹는 사람 많음. 향이 너무 강하다나?ㅋ)
내 몸은 모든 것을 받아서 문제 되지 않지만 찌를 못 먹는 사람들은 외워둬야 하는 간단한 문구가 있다.
바로 “꼼 닥 찌” 라는 말이 “찌를 넣지 마세요.”라는 말이다.
기억하기 쉽게 그냥 코딱지를 약간 강하게 발음해도 운 좋으면 통한다.ㅋ
낮에는 툭툭을 반나절 빌려서 시내 투어를 시켜준다고 한다.
관광 하고 싶은 마음 보다는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프놈펜에 오게 되면 갈까 말까 무지 고민을 하게 했던 장소가 있다.
가면 후회 할 것 같기도 하고 안 가도 후회 할 것 같아서
가고 후회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바로 뚜얼슬렝 민족학살 박물관이다.
여행 중에 만났던, 나보다 먼저 프놈펜에 거쳐 간 여행자들이 보여줬던 이곳의 사진과 이야기들.
캄보디아의 첫 여행지가 이곳이었던 한 여행자는 이곳을 거친 이후 다른 도시를 둘러보아도
모두 이곳에서 봤던 기억들 때문에 다른 것을 봐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32년 전만해도 여자 고등학교이었던 이곳을 개조해서 고문장으로 만들고
지금의 박물관으로 바뀐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대량 학살 장소였던 삭막함이 아직 살아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각오하고 오기도 했고
웬만한 사진들은 리얼한 설명과 함께 많이 들어서 조금 무덤덤해지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불과 30년 전에 이런 일이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뿐이다.
짧은 지식으로 간단히 캄보디아 의 역사에 대해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좋았던 시절, 안 좋았던 시절, 그리고 최악의 시절로 간단히 나눌 수 있겠다.
캄보디아 민족을 캄보디아어로 크메르라고 하는데 이 민족은
왕국(Kingdom)도 아닌 크메르 제국(Empire)으로 불렸으니
그 당시의 규모는 말도 못한다. 불가사의한 앙코르 유적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좋았던 시절이고
1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주변 국가들의 꾸준한 침략으로 좋다고 할 수 없는 시절이 온다.
그리고 최악의 시절은 1970년대가 아닐까 싶다.
월남전 당시 중립을 나타냈음에도 공산 게릴라 세력 내전과 베트남전 여파로 외세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외세의 공격을 받은 이유는 베트콩의 보급로가 되어 주어서이기도 하고
베트콩이 캄보디아로 도주하였다가 다시 기습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의 공습으로 네이팜, 고엽제, 클러스터가 다량 투하되었고 수십만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하고
경제적인 봉쇄를 당해 질병이나 굶주림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윗 사진 한 장은 호치민의 전쟁박물관 사진)
그 유족은 분노에 이끌려 월남전이 거의 끝나는 1975년에 폴폿이 이끄는 크메르루즈를 지지하게 된다.
크메르 루즈(붉은 크메르)라는 공산 무장단체는 농업적 공산주의 사회를 주장하며
도시에 있던 사람들을 시골로 보내고 농사를 지으라고 한다.
반대세력과 지식인들을 학살하고 반동이라는 명목으로 죽인다.
교사, 의사, 기술자 등등 안경 쓴 사람, 피부가 하얀 사람 심지어는 집에 책이 많았던 사람까지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총자루를 쥐어주고 엘리트 위주로 전 국민의 1/4인 200만 명을 죽였으니
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얻는다.
정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면서부터 ‘킬링필드’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크메르루주는 학살의 대명사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킬링필드는 인류역사의 큰 참변이다.
다른 나라에 의한 것도 아니고 자기나라 지도자가 자국민들을
수백만 명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것은 가히 역사에서도 드문 비극이다.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을 당시 캄보디아는 넓은 운동장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살았다고 하는데
킬링필드 학살사건으로 인해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가장 못하는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어떤 주장이 옳든 간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것이다.
지금도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킬링필드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박물관에 갔다가 죽은 사람 혹은 살아있는 사람까지 묻었다는 Cheong Ek Genocidal Center까지 가보니
내 생의 최악의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역시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면서 지금 현재 살고 있는 크메르인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가지고 살면서 무지 아플텐데 웃음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박물관 다녀온 뒤로 역시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은 중국식당.
역시 기분은 먹는 것으로 푸는 것이 가장 좋다.ㅎ
중국음식을 보고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음식과 함께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프놈펜에 있으면서 맛있는 것 먹을 기회가 많이 생겼다.
대학 다니는 현지 친구의 졸업 파티에도 가서 맛있게 먹고
상민이의 조기축구 형님들이 사주셔서 배 터지게 먹곤 했는데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있다.
바로 ‘평양랭면’이라고 하는 북한 음식점!
김치가 반찬이 아닌 음식으로 취급되어 김치 값 3$를 따로 받는 다는 것 외에는
이북 음식이야 한국에서도 종종 먹어 볼 수 있어서 별로 신기한 것이 없지만 또 다른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이북 여인이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왜 있는지의 깨달음이 저절로 올 정도.ㅋㅋ
금강산에 가더라도 현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법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불법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궁금한 것도 물어볼 수 있고 참 좋았다.
물론 북한남자들의 군복무 기간이 보통 얼마나 되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한지 모르겠다.
나도 남조선 사람이라고 하니깐 못 믿겠다는 듯이 텔미춤을 한번 춰주면 믿어 주겠다고 한다.ㅎㅎ
텔미춤은 또 어떻게 아는지..ㅋ
하긴 TV(三星)나 노래방기기(金永)도 남쪽에서 왔더라.^^
저녁시간에 가면 그들의 공연도 볼 수 있다.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로 시작해서
클래식 바이올린으로 유진박의 전자 바이올린 노래를 연주하고 아리랑 안무까지.
약 30분간의 공연이 끝나면 모두 무대로 내려와서 다시 서빙을 본다.^^
내가 공연을 너무 좋아하자 상민이는 시엠립에도 같은 식당이 있다고 가보라고 한다.
시엠립에는 음식점이 이곳 보다 크고 공연을 두 번 한다는데 꼭 가봐야겠다.^^
여기저기 더 둘러보고 하다보니 프놈펜에서의 5일도 금방 지나갔다.
상민이 덕에 좋은 추억거리 많이 만들고 더 오래 있다 가라고도 하지만
엉덩이의 뿌리가 내려 앉아버리면 대책 없이 오래 눌러앉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
아, 그리고 프놈펜으로 오는 길에 생겼던 피부트러블은 ‘한포증’이라는 병명에 가장 근접한 것 같다.
(댓글로 처방전을 알려주고 함께 걱정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시하눅빌 해변에도 다녀오고 해서 살이 벗겨지려고 하는데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상태에서 땀을 흘리니
표피상층이 두꺼운 부위에 땀의 출구가 막혀서 표피 속에 땀이 괴어 물집이 생긴 것이다.
바로 그날 밤에 샤워 하면서 밀어보니깐 아주 쉽게 밀리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 개운해 졌다.
1년 넘게 목욕탕엘 가지 않아서 그런 건가?
그럼 결론은 때라는 말인데..
더티찰리라는 소리 안 듣고 다니려면 잘 씻고 다녀야겠다.ㅋ
2008년 6월 21-25일
www.7lee.com
察李의 자전거 세계일주
첫댓글 피부 트러블이 회복되어 다행입니다!
건강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늘 즐거운 여행 되시고 보람된 하루하루가 되시길...
다행이군요 피부트러블 항상 건강조심하시고..... 늘 기도 하겠습니다 당신의 여행을 위해....
결국 물집이 때! ㅋ~~~ 지나고 나니 웃는 추억이 되버렸습니다... 너무 부러운 사나이 찰리. 건강하세요
당행입니다, 목욕 자주해야겠네요
프놈펜....언젠가는..챨리처럼...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건강하시다니...보기에 참 좋습니다....앞으로도 좋은 정보 많이 올려주세요...감사합니다...
우연찮게 챨리님의 글을 접하고 부텀은 매일 새로운 글이 올라와있나 기웃거리게 됩니다. 타국에서 항상 건강부터 챙기시구요. 젊음이 부럽습니다 ^^
저두 매일 기웃기웃....거립니다요~~ㅎㅎ
잘봤읍니다 건강하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