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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
북국(北國)에서는 눈이 ‘펄펄’ 내리지 않고 ‘푹푹’ 내려 쌓인다. 어느 눈 내리는 밤, 소주를 마시면서 한 사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기다린다. 이 이국 이름의 여인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이미 활달하고 천진난만한 ‘귀여운 여인’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다가온 바 있다.(영화의 오드리 헵번을 상상해 보라) 나타샤를 알게 된 안드레이가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면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충전하는 장면 역시, 이 시편 속의 사내와 나타샤 위로 오버랩 된다. 이제 백석이 남긴 이 명편으로 인해 ‘나타샤’는 이상화의 ‘마돈나’와 함께 모든 가난한 청년으로 하여금 낭만적 사랑의 도피행을 꿈꾸게 하는 견고한 아이콘이 되었다.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출출이(뱁새)만 외로이 우는 마가리(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가려는 사내의 의지에 나타샤가 적극적인 호응을 한다. 그녀는 사내의 귀에 대고 자신들의 사랑이 세상에 져서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악한 세상을 거부하는 적극적 행위라고 속삭인다. 그때 비로소 우주의 화음처럼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사내와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처럼 새하얀 ‘흰 당나귀’도 ‘응앙응앙’ 울음으로 화창(和唱)을 한다.
백석은 ‘통영(統營)’ 연작을 통해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을 호소했고,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바다’)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그렇게 언제나 ‘고운 사람을 사랑’했던 청년 백석의 사랑은 이토록 짙은 낭만적 몽상의 분위기에 감싸인 채 우리의 기억 속으로 푹푹 내려 쌓이고 있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냄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광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 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 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승>전문
이 시는 시간적 순서로 구성하지 않고 소설의 플롯과 같이 역순행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감각적인 어휘의 사용으로 시상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는 농부의 일을 그만두고 금광을 찾아 가족의 곁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찾아 옥수수를 팔며 금광 주변을 떠돌던 아내, 그리고 떠돌며 지내던 중 죽어 무덤에 묻힌 딸에 대한 슬픔이 서사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많은 여인의 일생사를 들려주는 형식의 이 시는 일제 치하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도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世上事>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전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이 분이 사랑했던 여인이 바로 자야(子夜)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이다. 백석이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 지어준 이름이다. 38년도 작품인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나타샤는 아마도 자야가 맞을 것이다. 자야와 함께 백석이 '전쟁과 평화'를 감상했다하니(나타샤는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이다. 백석은 그 때 한창 러시아문학에 빠져있었다),
분명하게 38년 4월에 남긴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의 그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는 자야가 아니었다. 백석에게는 또 다른 사랑이 있었다. 곱게도 란(蘭)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시를 발표한다. 1935, 36년에 걸쳐. 바로 남해안 통영에 그가 그리던 처녀가 살고 있었다. 평북 정주 출신인 백석은 그 처녀를 보기위해 멀리 통영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바로 그 때 이 시들을 남긴 것이다.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족제비상을 하였다 / 얼굴 모습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 코의 모습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둥글고 굵은 셀룰로이드 테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영감들은 우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 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짐승같이들 사라졌다
<석양>전문
매우 희극적이고도 코믹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시이다. 저녁 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인생의 석양이란 의미까지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에는 눈물겨운 주체의 정서가 마디마디 서리어 있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북관 지방의 노인들이 그들만의 투박한 방언을 한바탕 왁자지껄하게 지껄이며 지나간 뒤의 고요……. 다분히 현장의 생동감을 중시하면서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을 다채롭고도 능란하게 구사했다.
이들의 인상을 묘사함에 있어 매우 해학적인 표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말상', '범상', '족제비상' 등은 동물과 관련지은 얼굴의 생김새이고, '개발코', '안장코', '질병코'는 그 생긴 모습들이 너부죽하거나 투박한 코의 생김새이다. 그 코가 재미있게 묘사된 것은 다음 행의 안경들을 걸치기 위한 것이고, 안경 속의 번뜩이는 눈빛들은 해질 무렵의 햇살과 조응한다. 그리고 투박한 북쪽 마을의 방언으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사나운 짐승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한 무리의 영감들을 연상할 수 있다.
이들 인상이 하나같이 기묘한 데도 두렵거나 무섭게 느껴지지 않고, 우리 장터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낯익은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백석이 그의 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이다. 이 어법은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가장 짙게 풍기는 것이었고, 이러한 어법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식민지 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버티어 대항할 수 있는 독자적 방언이 되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 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랜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백석의 시는 길게 서술하는 듯 하다가도 짧은 호흡의 시구를 섞어 내달리는 문장에 매력이 있다. 외형 면에선 기형도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둘 다 어리고 가난한 시절을 시의 자양분으로 삼는 공통점이 있다.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말의 진수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름답다가도 아련해지는 시다.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차가운 북방지역 마도강(만주, 간도)으로 떠났다.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향산천(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과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쓸쓸하게 묻어난다.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고귀한 마음하나 간직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라는 구절에서 연약한 듯하지만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 모알 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 알만한 잔(盞)이 보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군들이 따라와서
엄지의 젓을 빠는 망나니도 있었다.
<주막>전문
이 시는 시집 『사슴』에 실린 초기 대표작으로 옛 삶의 모습과 정경을 토속적으로 그린 한 폭의 풍속화다 한 세대도 더 지난 주막의 풍경에서 왠지 따스하고 뭉클한 무엇이 느껴진다. 백석의 연인 子夜는 이 시에 대하여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시라고 했다 ‘늘 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범이라는 주막집아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시는 나를 사로잡았다’고 했다
백석의 절제되고 정결한 시어에는 그 시대의 고난스런 현실과 민중들의 냄새가 묻어있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 사라져가는 모국어를 살리고자 안간힘으로 쓰인 것이어서 더 아름답고 눈물겹고 감동적이다내 어린 시절의 풍경도 그랬다 여름날이면 붕어며 모래무지 잔고기 등속을 천렵해온 아버지는 호박과 감자대를 넣고, 붕어지짐을 만들어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소주판을 벌였다 어머니는 동네아낙들과 평상에 앉아 수제비를 끓이고 울바자엔 노란 호박꽃이 앞산에 보름달을 불렀다 가난한지도 모르고 인정이 넘쳐흘렀던 그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보였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디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전문
세상살이 설움 중 가장 큰 게 병들어 아픈 것일 테다. 더욱이 객지에서 혼자 앓아누우면 외로움조차 가슴에 사무칠 테다. 고향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북관은 함경도를 이른다. 화자 고향은 평안도 정주인데 함경도 끝까지는 대략 서울에서 울산쯤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는 쉽게 오갈 수 있던 거리가 아니다. 그러한즉 화자에게 북관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거의 이국같이 느껴졌을지 모른다.
시 속의 의원은 관공(관우)처럼 수염이 치렁치렁하고 새끼손톱을 길게 길렀다. 중국인은 손톱 기르기를 좋아한다. 의원의 긴 새끼손톱은 가까이 있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북관 남자의 개인적 취향일 테다. 화자 눈에 이색적인 데가 있는 그 의원은 진료를 하다가 문득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 환자의 말투나 풍기는 기색이 여기 사람은 아닌 듯하다.
환자와 의원은 말을 주고받다가 한 사람의 막역지우가 다른 한 사람이 ‘아버지로 섬기는’ 고향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친구의 친구는 친구. 인자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묵묵하니’ ‘말없이’ 맥을 보며 웃음도 ‘빙긋이’ ‘넌지시’ 짓는 아버지뻘 연배의 의원한테서 흠뻑 고향냄새를 맡는 화자다.(황인숙 시인)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딸은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어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전문
구수한 향토적 정감이 물씬 풍겨 나오는 시이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밤에 국수 만드는 일로 들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정겨움과 서로 돕고 서로 어울리는 공동체적 삶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특히 국수를 만드는 재료인 메밀이 익어가는 과정을 계절별로 드러낸 부분(실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도 독특하지만, 국수가 우리의 정서에 맞는 전통 음식임을 드러낸 부분(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 사리워 오는 것이다)도 인상적이다. 이 시에서는 국수를 해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석의 시는 공동체적 삶에의 회귀, 향수와 같은 과거 지향이 주를 이룬다. 그가 평안도 사투리를 질박하게 쓰고, 말투 또한 생활 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도 이런 과거 지향 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에의 그리움은 자연히 애련한 정서를 불러오고, 온전한 사람에의 복구를 염원하는 사회적 성격도 개입하게 된다. 이른 바 서술시에는 지나친 사회의식의 발로로 구호 차원의 주제 진술이 두드러진다. 사회 의식적시를 쓴 동시대의 부류 중 백석과 이용악이 돋보이는 것은, 그런 서정적 힘을 동반한 가운데 주제 의식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에는 백여 가지 음식물 이름이 등장하며 그는 특히 음식물이라는 소재에 집착을 보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시에서 음식물은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이다. 음식이란 단순히 식욕을 채우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통해 어릴 적 토끼 사냥, 꿩 사냥하는 추억, 겨울밤 쩡쩡 얼은 동치미 국물 마시던 추억을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한 개인 내지 집안,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결정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음식물은 경우에 따라 성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먹으면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정의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 객지를 유랑하다가 국수를 통해 자기 몸속에 흐르는 핏줄을 확인하고 현재의 삶과 상실된 과거의 민족적 삶을 대비시켜 역설적으로 식민지 삶을 환기시키고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아들 승(承)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촌누이 사촌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전문
이 시는 명절날 여우난골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큰집에 모여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서사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어린 화자가 명절을 맞아 집에서 큰집으로 가는 시점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묘사하면서 고향의 훈훈한 정취와 일가친척의 넉넉한 인정, 풍요로운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또한 토속적인 소재와 평안도 방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고향’이라는 원초적 공간에 대한 그리움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간절한 회복의 소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전문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2>전문
이 시는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왔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시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갓 같은 모양, 짭짤한 바람과 물, 여러 가지 특산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 통영의 정취와 특징을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소개하고, 통영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통영을 소개하던 화자는 살며시 ‘난’이라는 여인에게로 시상을 전환한다. ‘난’이 사는 명정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곳 샘터에서 물 긷는 처녀들 중에 ‘난’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 혼기가 찬 ‘난’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낸다.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화자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뱃사공처럼 통영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난’의 고운 자태를 떠올릴 뿐이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 모임에서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출신인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그녀에게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고, 후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아오지만 ‘난’이 겨울방학이 끝난 무렵이라 서울로 상경한 탓에 길이 엇갈린다.
‘난’의 집이 바로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고, 백석은 이 시에서 명정골의 이름과 유래 등을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난’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그러나 이러한 백석의 사랑은 친구의 배신으로 끝나게 된다. ‘난’을 소개해 주었던 친구인 신현중이 백석과 ‘난’의 혼담을 방해하고, 도리어 ‘난’의 집안으로부터 자신과의 혼인 승낙을 받아 낸 것이다.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인연마저 끊어지게 된 백석은 시를 통해 괴로움을 토로한다.
백석(白石)은 1912년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수원백씩 백용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백기행이지만 작품을 발표할 때는 백석 이라는 필명을 애용하였다.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문단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어서 인데 그는 곧 <조선일보>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였다. 1934년 청산학원을 졸업한 그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출판부 일과 계열사인 <여성>지를 편집을 하면서 수필 「耳說 귀ㅅ고리」를 쓰고, 「臨終 체흡의 6월」이라는 서간문을 번역 소개하였고, 「죠이스와 애란문학」이라는 마르키스의 논문을 번역하였고, 단편소설 「마을의 유화」와 「닭을 채인 이야기」를 발표하였다.
그는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국문학과 관계된 글을 번역. 소개하였고, 등단 장르였던 소설을 두 편 발표하였으며 수필을 한 편 썼다. 이것으로 보면 문필활동 초기에 그는 산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발표한 첫 시는 1935년 1월 20일, 33편의 시를 묶어 시집 『사슴』을 상재하였다.
시를 처음 발표한 시기부터 시집을 낼 때까지의 기간이 다섯 달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때부터 1941년까지 그는 집중적으로 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시집을 낸 직후인 1936년 4월초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으나 1938년엔 영생고보를 사임하고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만주의 신경으로 떠나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북만주 산간 오지를 여행하기도 하며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만주 안동에서 세관원 생활 등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다 해방 후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그대로 북한에 남아 있었다. 해방 후 발표된 그의 시는 친구인 허준이 가지고 있다 발표한 것이고 그 이후 확인된 작품을 보면 백석은 1961년 까지는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창작을 하고 번역을 하였으며 아동문학평론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시세계는 시집 「사슴」을 내던 시기와 사슴 이후 시기, 그리고 북한에서의 활동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전개한 문학 활동은 당의 정책을 전폭적으로지지. 선전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어 해방직후까지 발표한 시만을 대상으로 그의 시세계를 고찰한다.
묘사의 시학
첫 작품을 발표하고 첫시집 「사슴」을 낼 무렵 백석이 견지하고 있는 시작 방법은 묘사이다. 그 방법이 지니고 있는 모더니티를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은 김기림이다.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던 그는 백석이 시집「사슴」을 낼때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시집이 발간되자 제일 먼서 서평을《조선일보》에 실었다.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도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철석(鐵石)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조 선다. 그 점에「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사슴을 안고」,<조선일보>1936. 1. 29.
모더니즘 시인들이 그야말로 신선한 감각으로서 문명이 던지는 인상을 붙잡고 음으로서 말의 가치, 시각적 영상, 의미의 가치도 여러가지 가치의 상호작용에 의한 전체적 효과를 의식하고 일종의 건축학적 설계 아래서 시를 쓰는 것이라면 백석은 고향의 풍물과 민속,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백석은 모더니스트 시인들과 달리 시의 대상은 고향의 풍물과 민속에 두었지만 감정과 정서는 철저하게 절제했는데 그 방법이 묘사인 것이다.
백석이 묘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가 소설로 등단하였고 시를 발표하기 전까지 소설을 두 편이나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기도 한다. 소설은 서술자의 의도나 감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행동, 인물의 성격, 또는 풍경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즉 간접화시키는 장르인데 대상에 대한 생각과 정서를 직접 서술하지 않고 대상을 묘사함으로서 간접화시키는 백석의 시작 방법론은 시를 창작하기 전 훈련한 소설의 장르적 성격에서 연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은 사건을 서술하는 장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는 인물, 풍경, 심리, 행동 등 묘사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풍물 묘사만으로 시적 깊이를 획득하기 어렵자 사건을 끌어들이면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하는 지적도 타당성이 있지만 이때 이 사건은 소설에서 다루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즉 백석이 시에서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묘사인 것이다.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딴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듯이 무서운 밤 딥 뒤로는 어느 산골짝이 에서 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군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 멍석을 저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가진 조마구 뒷산 어늬뫼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군병의 새깜안대가리 새깜안 눈알이 들여다 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르러 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중략)
섣달에 내빌날이드러서 비빌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새하얀 할미귀신의 눈귀신도 내빌눈을 받노라 못난다는 말을 든든히녁이며 엄매와 아는 앙궁옿에 떡돌옿에 곱새담옿에 함지에 버치며 대낭푼을 놓고 치성이나 들이듯이 정한 마음으로 내빌 눈약 눈을 받는다.
이눈세기물을 내빌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 가며 고뿔이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고야>전문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옛 밤'을 소재로 한 것인데 밤이면 기억나는 어린 날의 밤풍경 다섯 개를 병렬시켜 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밤풍경이지만 밤이라는 시간을 풍경화로 제시하여 공간화시키는 이 시는 바로 그 기법의 측면에서도 모더니즘적이다.
백석의 시를 처음 대할 때 느끼는 곤혹감은 낯선 평북 방언 때문이다. 그러나 방언이 주는 곤혹감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듯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니며 독자들에게 언술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고 그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해도 환기하는 정조에 젖어들게 만든다. 백석시가 보인 관심 중의 하나는 고향 산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특히 다음 시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독백의 시학
시집 「사슴」의 발행일자는 1936년 1월 20일인데 백석은 그 직후인 1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시 「통영」을 발표하였다. 이 시는 물론 이제까지의 시의 기법인 묘사를 통해 통영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의 상태를 진술하고 있는데 이 점이 시집에 실린 시들과의 차이이다. 이전의 시에서 생각이란 시어가 보이는 것은 「고야」에서인데 그것은 없어도 기본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는 보조서술어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통영」의 마지막 연에 보이는 '녕 낮은 집 담 맞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에서 '생각한다'는 그 앞에 묘사된 통영의 풍물과 대조시켜 시적 화자의 상태, 그 중에서도 생각을 직접 진술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백석이 발표하는 시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 중의 하나가 '생각하다'이다.
36년 3월 <시와 소설>1호에 발표한 「탕약」에 사용된 '생각하다'는 시어에는 보다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의미가 포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간성은 연 구성의 원리로도 작용한다.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웋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봉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올으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딸인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여 만년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곻이 약그릇을 들고 이약을 내인 옛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탕약>전문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백하는 방식은 이제까지의 시에서 보여주던 간접제시의 방식과는 다른 방법론으로 시인의 관심이 객관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것에서 주관적인 생각과 마음의 세계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백석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낭만주의적 시작태도를 가지면서 시간성과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낭만주의의 기본 속성으로 볼때 당연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감성적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유기체적 세계관은 생명체적 자연인식인데 생명체란 탄생, 성장, 소멸의 지속성이 그 본질을 이루는 것이기에 낭만주의자들은 시간과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첫 작품을 발표하고 첫 시집 <사슴>을 낼 무렵 백석은 감정과 정서를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어린 화자의 시선으로, 평북방언으로, 고향의 풍물과 민속,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학을 묘사의 시학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당시 문단을 풍미하였던 모더니즘의 영향이면서 동시에 소설 장르의 영향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시집을 발표한 이후 백석의 시작 방향은 생각과 정서를 직접 술회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이 시기의 시학을 독백의 시학이라 이름 붙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많은 기행시는 여전히 여행지의 풍물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과 정서를 철저하게 배제하던 「사슴」시기와 다르게 이 시기는 화자의 생각과 감정에 기울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36년에서 38년 사이에는 단순히 생각과 마음의 세계를 발견한 화자의 모습만 나타나 있다면 그 이후의 시는 화자의 생각과 감정을 진술하거나 토로하고 있음을 불 수 있다. 이런 낭만주의적 시작태도를 보이면서 백석은 공간성보다는 시간성과 역사성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시기가 시인 개인으로서도 어렵고 굴곡 많았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민족 전체로서도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제어하기 어려운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면서도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는 시를 많이 남겼지만 그런 중에도 자연과 대지의 생명력에 힘입어 생기는 회복해 보려는 시도 남기고 있다.
백석은 한국이 낳은 가장 자랑스러운 시인이며 수필가이며 번역가이다. 이러한 위대한 백석이 진정 우리들 곁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백석은 시인으로만 평가하더라도 세계의 어느 유수한 시인들과 비교를 하여 볼 때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백석이 점차로 알려지던 그 때 보다는 오히려 그들보다 월등한 수준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분단이라는 많은 제약과 굴레 그리고 억압 속에서 그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백석은 그 동안 꾸준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를 받아왔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평가를 받으리라는 예견이 이미 시인이자 평론가인 박용철에 의해서 동시대에 대두되었다.
문학은 우리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문학은 생업으로 삼은 백석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백석은 이러한 고난을 온몸으로 체감하여 한 시대를 누구보다도 치령하게 살아왔다. 최고의 시인이면서도 언제나 평범한 기자로 또한 교사로 공무원으로 농부로 변역가로 독립운동가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해방이 되기 전까지는 광산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으며 세관원까지 하였다. 해방 후에는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를 하기도 하였으며 세계적인 소설문학가로 활동했다. 그 와중에도 몇 번의 결혼 실패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은 언제나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이 훌륭한 시들은 고난의 시기를 비껴나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시들이며 또한 고난 그 자체를 포용하는 놀라운 작품들이다 또한 지조 있고 고결한 작품들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있다. 우선 백석은 우리 학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또한 어설픈 외래화보다 내실 있고 한국화를 요구하고 있다.
백석은 자신의 첫시집 <사슴>에서 33편을 실음으로서 보이지 않는 항일을 하고 있다. 그의 시는 대부분 민족적 자존심이 가득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극도로 자신에게 엄격한 백석은 자신의 삶 전부를 청렴결백으로 일관했다.(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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