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泰陵) - 사적
201호
▲ 태릉 남쪽 숲길 |
태릉 정문에 이르니 시커먼 피부의 매표소가 길을 막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머니인 내 호주
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그곳을
거쳐야만 태릉과 강릉은 물론 태릉~강릉 숲길까지 모두 누릴
수 있기에 입장료 1,000원을 흔쾌히 치루고 유료(有料)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이들을 모두 둘러보니 족히 2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오랜만에 왔으니 4자리 입장료가 아깝지
않도록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늦가을의 향연도 차분히 구경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태/강릉 능역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며, 늦가을 정취를 누리기에
도 아주 그만이다.
참고로 태/강릉이 속한 노원구(蘆原區) 지역 주민(주민등록상 기준)은 50% 할인 혜택이 있으
며, 문화가 있는 날인 매월 마지막 수요일은 입장료를 받지 않으니 이런 날을 활용해보는 것
도 좋다. |
▲ 금천교 주변 숲길 |
간만에 태릉 능역(陵域)으로 들어서니 늦가을이 그려낸 숲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나그네의 정
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태릉은 다른 왕릉보다 숲의 울창함이 꽤 깊은데, 이는 오
랫동안 신림(神林)으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의 위엄은 쓸
데없이 대단했다. |
▲ 옛 금천교(禁川橋)의 흔적 |
금천교는 조선 왕릉의 필수 돌다리로 능역 앞 개울이나 계곡에 세운다. 그 개울을 금천(禁川)
으로 삼아 능역 중심부와 바깥 부분의 경계로 삼았는데, 태릉 역시 그 원칙이 적용되었다. 허
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금천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금천교 또한 메워지면서 땅바닥에 박힌
화석처럼 되어버렸다. 태릉 동쪽에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그것을 활용해 금천을 재현할 순 없
을까? 금천이 없는 조선 왕릉은 마치 계곡이 없는 산과 같다. |
▲ 쌀쌀맞게 생겨먹은 태릉 홍살문 |
조선
왕릉은 고종과 순종의 능인 홍/유릉을 제외하고 대체로 능 앞에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의 시설을 둔다. 태릉 역시 그들을 싹 갖추고 있는데(수라간은 터만 남음) 콧
대 높은 곳에 세우는 홍살문을 들어서면 박석이 정연하게 깃든 향로(香路), 어로(御路)가 정
자각까지 펼쳐진다.
향로와 어로를 한 덩어리로 참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그 옆에 조
금 높이 솟은 향로<신도(神道)>는 제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그토록 사람을 대놓고 가리는 콧대 높은 돌길과 홍살문이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그
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가치가 저렴해진 것은 아니다. 어디까
지나 이용 대상이 넓어진 것 뿐이며 엄숙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유산 관람 예의는 반드시 지
켜줘야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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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곽에서 바라본 태릉 능역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
태릉은 일명 조선의
여왕, 여제(女帝)로 크게 악명을 떨쳤던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
1565)의 능이다.
그는 파평윤씨 집안인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1517년 중종(中宗)의 3번째 왕후가 되었다. 중
종은 3명에 왕후가 있었는데, 1번째 왕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1487~1557)는 중종반정(
中宗反正) 때 처단된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라 반정(反正) 패거리들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
었고, 2번째 왕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1491~1515)는 아들(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허
무하게 가고 말았다.
하여 새로운 왕후를 맞을 필요가 있었고, 마침 추방된 단경왕후의 복귀 이야기까지 나오자 반
정 패거리와 윤임(尹任, 장경왕후의 오라버니)은 그 시절 별볼일 없던 윤지임의 딸을 천거했
다.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추천도 있었음>
윤지임은 윤임, 정현왕후와 친척 관계로 그 시절에는 몰락양반급이었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만만하게 봤던 그 여인에게 자신은 물론 집안과 외손주까지 몽땅 털릴 줄이야...?
윤지임의 딸은 어머니 없이 자랐으나 총명하고 기억력이 대단했으며, 학문을 익혀 아버지로부
터 아들보다 낫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또한 중종실록에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
를 알았다고 쓰여있어 어려서부터 싹수가 있었다. 또한 11살에 모친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검
소한 생활을 하고 상례를 치르는 것이 성인과 같았으며, 부친을 섬기는데도 한결 같다며 칭찬
을 받았다.
16세의 나이로 내명부(內命婦)의 1인자인 왕후(王后)에 올랐으나 나이 많은 후궁들의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세자 외에 경빈박씨 소생의 복성군(福城君) 등 후궁 소생의 왕자
들도
여럿 있어 결코 환영받지를 못했으며, 윤임의 눈치까지 무지하게 살벌했다.
그렇게 후궁들에게 밀려 독수공방의 세월이 길었고, 딸만 내리 4명<의혜(懿惠), 효순(孝順),
경현(敬顯), 인순(仁順)>을
낳으면서 체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여 장경왕후와 가까운 친척(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9촌 사이임) 사이와 장경왕후 소생 세자
(世子)의 보호자란 명분으로 세자를 끼고돌며 조용히 몸을 굽혔다. 그것이 왕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1527년 2월, 세자의 생일 때, 동궁(세자의 거처)의 해방(亥方) 자리인 은행나무에 불에 탄 쥐
1마리와 방술이 적힌 방서(傍書)가 발견되었다. 문정왕후는 평소 대립하던 경빈박씨를 때려잡
고자 그의 1번째 연극을 펼치게 되는데, 김안로(金安老)를 움직여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고자
왕세자를 저주하는 그을린 쥐를 대전 침실에 몰래 넣었다' 음해를
했다.
중종은 세자를 지키고자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경빈박씨와 복성군 모자(母子)를 궁 밖으로 추
방해 서인으로 강등시켰으며, 그들을 지지했던 남곤(南袞), 심정(沈貞) 패거리를 제거하니 이
것이 그 유명한 '작서(灼鼠)의 변(變)'이다.
경빈박씨 모자는 1533년 사사(賜死)되었으며, 1541년에 이르러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金禧)가
조작한 것임이 밝혀져 뒤늦게 신분이 회복되었다. 허나 죽은 이후에 회복되면 무엇하랴..?
그렇게 정적 하나를 제거한 왕후는 1534년 그렇게나 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했다. 그가 바로 경
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이다.
30대 한복판이 되서야 한줄기 빛을 얻은 왕후는 아들을 지키고 그를 왕위에 올리고자 적극적
으로 권력 싸움에 뛰어들었다. 하여 동생인 윤원형(尹元衡)과 윤원형의 애첩인 정난정(鄭蘭貞
)의 도움을 받아 윤임 패거리와 적극 맞섰으며, 세자에게도 온갖 까칠함을 아끼지 않았다.
이
에
윤임은 1537년 김안로 등과 왕후 폐위 계획을 세웠으나 들통났으며, 결국 김안로는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
▲ 수라간터
수라간은 제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작은 건물이다. 허나
어느 야속한
세월이 잡아갔는지 집은 없고 터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중종이 점점 상태가 안좋아지면서 왕후는 세자를 내치고자 온갖 용을 다 썼다. 그러던 중, 세
자가 머무는 동궁전에서 화재가 났는데,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간 정씨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
어가 그를 구했다. 그 공으로 정씨는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그 여인이 바로 그 유명한 송
강(松江) 정철(鄭澈)의 누이이다.
윤임은 화재 사건의 배후로 문정왕후를 지목하며 세자를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심성이
착했던 세자는 계모의 편을 들면서 또다시 왕후 제거에 실패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가 그 뒤를 이어 조선 12대 군주인 인종(仁宗)이 되었다. 그러자
세자의 외삼촌인 윤임이 권력을 꽉 잡으면서 문정왕후 패거리는 잠시 살얼음판과 같은 처지가
된다. 대신 왕의 계모란 지위를 이용해 영 좋지 않은 말을 마구 내뱉는 정신적 공격으로 왕을
괴롭혔다. 심지어 왕에게
'나와 내 아들이 주상의 손에 죽는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언제쯤 죽일 건가요?' 대놓고 협박
하듯 따지기도 했다.
인종은 마음이 좋고 검소함을 추구했던 인물이나 안타깝게도 병약하여 즉위 8개월만인 1545년
에 30살이란 한참 나이에 승하하고 만다. 그의 죽음에는 문정왕후가 준 정신적 스트레스도 적
지 않았을 것이다. (인종은 조선 군주 중 가장 재위가 짧은 왕임)
인종은 아들이 없어서 자연히 문정왕후 소생인 11살짜리 경원대군에게 대권이 돌아갔다. 그가
엄한 어미로 고생을 좀 했던 조선 13대 군주 명종(明宗)이다. 하여 왕후는 대왕대비(大王大妃
)가 되었고, 어린 아들의 뒤를 받쳐주고자 직접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펼쳤다.
오랫동안 간절히 소망하던 것이 흔쾌히 이루어지자 왕후는 본색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자신
을 괴롭힌 윤임 패거리와 그에게 붙었던 사림(士林) 패거리를 단죄하고자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를 일으킨 것이다. 그 시절 윤임 패거리를 대윤(大尹), 문정왕후 패거리를 소윤(少尹)
이라 불렀는데,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尹元老)가 일을 꾸미다가 실패하자 윤임 패거리와 안
좋은 감정이 있던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이 바로 나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8번째 서자)을 옹립하려 한다고 무고를 했다.
또한 인종이 승하하자 윤임이 계림군(桂林君. 성종의 3번째 서자)을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즉 대윤파를 역모로 몰아 보기 좋게 때려잡은 것이다. 그로 인해 왕후의 권력은 조
선 제일이 되었으며, 그의 형제인 윤원형과 윤원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1547년 9월에는 그 유명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 터졌다. 과천 고을의 양재역(현
재 서울 양재동)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李沂)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란 익명
의 벽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에 윤원형은 윤임 패거리를 다 처단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 주
장했고, 왕후는 왕을 시켜 송인수(宋麟壽) 등을 처단하고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 20여 명을 유배 보냈다. 그중에는 사림패거리가 많았다.
또한 중종의 8번
째 서자인 봉성군도 역모의 빌미를 이유로 처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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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복방(守僕房)
방과 창고를 갖춘 맞배지붕 3칸 건물로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복의 거처이다. |
2번에 걸쳐 정적들을 제거하니 이번에는 왕후의 형제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웠다. 윤원형과 윤
원로가 서로 갈등을 빚은 것이다. 이들의 사촌인 윤춘년(尹春年)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아 윤
원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왕후는 고심하다가 윤원형을 선택하고 윤원로에게 사약을
보내 죽이면서 집안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 그 사건으로 윤원로의 아들인 윤백원(尹百源)은
크게 앙심을 품고 명종의 왕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에게 붙어 숙부(윤원형)와
당숙(윤춘년)을 공격했다. 허나 왕후는 조카인 그를 감싸며 보호해주었다.
왕후는 지독하게 수렴청정을 펼쳤는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조정을 좌지우지했고, 인사권
도 마음대로 했다. 또한 왕인 아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주상(主上)은 이 어미가 아니면 어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소~!' 호통을 치고 심지어
회초리를 들고 때렸다. 그리고 일일이
정치를 지시했으며, 관료들과 늘 격돌하면서 자신의 주
장을 관철시키는 등, 왕성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1553년 수렴청정에서 물러나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정사에 관여했으
며, 사실상 죽을 때까지 권력을 행사했다. 어미의 지독한 권력욕에 뚜껑이 폭발한 명종은 을
사사화 때 처단된 사림 패거리들을 신원하고 사림들을 등용해 나름의 세력을 만들려고 했으나
어미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면서 정치에 대한 의지를 잠시 잃게 된다.
문정왕후하면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왕후의 권력 강화에 크게 도움을 준 영의정 이기가 불
교 양종(교종, 선종)을 다시 세우자고 건의했는데, 신하들의 반대로 주저하다가 1551년 윤원
형, 이기의 격한 지원을 받으며 불교 중흥책을 밀고 나간다. 이때 왕후는 절이 도둑의 소굴이
되므로 이를 개선하자는 이유를 내세웠다.
허나 신하와 선비들의 반대가 극심하자 나서지 말라고 호통을 치며 그들을 제압했고, 윤원형
등에게 불교 종단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1550년 봉은사를 선종(禪宗) 중심 사찰로, 광릉의 원찰(願刹)인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
중심 사찰로 삼아 선종교 교종 양종을 부활시켰으며, 윤원형, 상진(尙震)과 함께 전국 300여
절을 국가 공인 정찰(淨刹)로 삼아 지원했다. 그리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과(僧科)를
치루면서 우수한 승려들을 뽑았다. 그 과정에서 그 유명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
溟大師)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정난정의 추천으로 알게 된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신임해 봉은사 주지로 삼았고, 심지어
병조판서(兵曹判書) 자리까지 주었다.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곁에 묻히고자 그 옆에 높이 자리를 닦았는데, 지대가 낮다 보니 비
가
오면 늘 침수가 일어났다. 하여 1562년 보우의 건의에 따라 봉은사 자리로 정릉을 옮기고
봉은사를 정릉 자리로 옮겨 크게 중창했다. 또한 불교 행사도 거창하게 열었다. 역시나 신하
들이
반대를 했으나 왕후 앞에서는
그저 개미들의 부질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1565년 왕후는 큰 병을 얻었고 그해 5월 5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64살의 나이로 영원히 잠들었
다. 천하를 움켜쥐며 요란하게 악명을 떨친 조선의 여제, 문정왕후는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가버린 것이다.
왕후가 가자 명종은 크게 곡소리를 내며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후가
왕의 원기를 챙길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내용을 내세우니 왕은 그 말에 겨우 숟가락을 들어
죽을 먹었다. 허나 이후 1달 동안 거의 밥을 제대로 들지 못했을 정도로 명종은 슬픔에서 쉽
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지관이 서울 북쪽 태산(泰山)에 능을 쓰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 건의하여 명종은 그 자리를
찾아 현재 자리에 무덤을 썼다.
보통 왕후의 단독 능은 이름을 여성스럽게 지으나(정릉, 사릉, 온릉, 공릉, 순릉 등) 문정왕
후의 위엄에 걸맞게 제왕 능보다 더 비싸보이는 이름인 태릉을 능 이름으로 삼았다. 또한 능
규모도 기존 왕비 능보다 훨씬 크고, 심지어 제왕 능보다도 더 크게 닦았으며, 능 석물은 다
른 능보다 1.5~2배 이상이나 크게 만들었다. 이는 왕후의 큰 위세도 있겠지만 어미를 미워하
면서도 한편으로는 태산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의지했던 명종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 하겠다.
명종은 왕후의 외척으로 권력을 무지하게 남용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아 원망이 많았던 외삼촌
윤원형을 단죄했다. 목숨을 붙어주어 정난정과 함께 강음현(江陰縣, 황해도 평산)으로 귀양을
보낸 것인데, 정난정이 독약을 먹고 스스로 골로 가자 윤원형은 그를 껴앉고 통곡하다가 독약
을 먹고
따라가면서 인생무상을 몸소 실천했다.
또한 왕후의 신임을 받았던 보우는 1566년 4월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으며, 왕실의 원찰
이던 회암사(檜巖寺)가 유생들에게 박살나고 불교는 다시 고통을 받게 된다.
명종 이후 사림패거리들이 많이 등용되었는데, 왕후가 일으킨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
로 크게 고통을
받아 그 한이 백두산 이상이나 쌓여있었다. 게다가 여자가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락하고 그 형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의붓아들인 인종을 죽게 했고, 억불숭
유(抑佛崇儒)를 어기고 불교까지 진흥을 시켰으니 그야말로 까기가 좋았다. 하여 그들은 명종
실록(明宗實錄)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했다는 뜻이다'로 왕후를
깎아내렸으며,
불교 정책에 대
해서도
'불사(佛事)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
히 주고 받아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았으며,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제도에서 방자하게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로 모여들었다'
며 악평했다.
또한 백성들도 왕후가 골로 가자 '불여우 같은 년, 독한 년'이라 환호까지 했다
고 전한다.
문정왕후는 신분을 크게 가리지 않고 정난정 등의 미천한 신분의 사람과도 교류했으며, 서얼(
庶孼)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서얼호통법(庶孼號筒法)을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자 전국
에서 많은 노비들이 윤원형 집으로 몰려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한 한때 라이벌이
었던 중종의 후궁들을 궁궐에 살도록 배려해주는 센스도 보였다.
그 외에 불교 쪽에 여러 업적이 있으나 권력 강화와 유지에만 너무 몰두했을 뿐, 다른 분야는
딱히 업적이 없다. 그
시절 백성들의 삶은 꽤 고단했고 남해바다에서는 왜구(倭寇)들이 설치
고 있었으나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적어도 민생과 국방을 챙겼으면 욕을 덜 먹었을텐
데 그것도 아니다.
명종은 1567년 승하했는데 어미의 능 동쪽 1km에 능을 썼다. 어미가 그만큼 그리웠던 모양이
다. 명종 능은 강릉(康陵)이라
부르는데, 태릉과 강릉을 한 덩어리로 묶어 태강릉 또는 강태
능이라 부른다. 이들 능은 불암산(佛巖山)의 남쪽 끝을 잡고 있으며, 능역도 넓고 숲도 매우
짙다. ('서울 태릉과 강릉'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201호로
지정되었음)
허나 왜정(倭政) 때 능 남쪽에 경춘선(京春線)이 닦이면서 능역 남쪽이 적지 않게 떨어져 나
갔다. 왜정이 망국의 왕릉을 엿먹이고자 일부러 철로를 그렇게 깐 것이다. 또한 나중에 도로
(화랑로)까지 닦이면서 능역 남쪽은 더욱 줄어들었다. 게다가 태릉과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
과
태릉국제스케이트장 등이 들어앉으면서 그 사이 공간을 갉아먹었으며, 태릉 서쪽에는 태릉
국제종합사격장이, 강릉 동쪽과 북쪽에는 삼육대(三育大)가 넓게 들어앉으면서 그 넓던 능역
은
절반 이상 축소되었다.
그리고
태릉과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자리하면서 이들을 잇는 길이 끊어졌고, 그로 인해
강릉은
오랫동안 금지된 왕릉이 되어 철저히 봉인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비로소 개방이
되었고, 태릉과
강릉을 잇는 고갯길도 활짝 열려 같이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단 고갯길은 1
년에 딱 4달만 공개되므로 그 외에 기간에는 태릉을 둘러보고 화랑로를 따라 강릉으로 이동해
야 되며, 태릉 입장권으로 강릉까지 관람할 수 있다. (강릉에서 입장권을 사고 태릉으로 가도
됨)
태릉 능역에는 조선왕릉전시관이 닦여져 태릉을 비롯한 조선시대 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
다. 그러니 그곳도 태릉 후식거리로 둘러보기 바란다.
* 태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화랑로 681 ☎
02-972-0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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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릉 비석(표석)을 머금은 비각(碑閣) |
▲ 비각에 고이 담긴 비석(표석) |
태릉 비석(표석)은 1753년에 세워진 것으로 태릉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다. 비석 앞면에는 '朝
鮮國 文定王后 泰陵'이라 쓰여 있는데 이는 홍계희(洪啓禧)가 쓴 것이며, 뒷면 글씨는 낙풍군
이무(洛豊君 李楙)가 썼다. |
▲ 정자각(丁字閣) |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6.25때 파괴된 것을 1994년에 다시 일으킨 것
으로 싹둑 다듬은 돌로 석축을 높이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
겨서 정자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능 제향을 올리는 공간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
측
계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 때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으며, 매년 양력 5월
16일에 태릉 제향이 열린다. 하여 그때만 잠깐 북적거릴 뿐, 그 외에는 썰렁하다. |
▲ 고색이 묻어난 정자각 우측 돌계단
왼쪽 돌계단은 참배를 온
제왕이,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지금은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 없음)
▲ 붉은 피부의 제삿상들 (정자각 내부)
▲ 신위평상(神位平床)
제향을 지낼 때, 태릉 주인의 위패를 두는 곳이다.
▲ 관세상(盥洗床, 왼쪽)과 축상(祝床, 오른쪽)
관세상은 세뢰(손을 씻고자 관세를 담던 것)와 세(관수를 받아 씻는 그릇)를
올려놓는 상이고, 축상은 축문을 놓는 상이다.
▲ 정자각에서 바라본 태릉 능침(陵寢) |
능침이라 불리는 저 언덕 높은 곳에 문정왕후의 유택(幽宅)이 크게 깃들여져 있다. 다른 조선
왕릉과 마찬가지로 능침은 금지구역으로 묶여있어 이렇게 밑에서 휴전선 너머 땅을 바라보듯
해야되는데, 문정왕후의 위엄을 먹고 자라 다른 조선 왕릉보다 능침 규모와 석물 규모가
크다.
특히 석물은 1.5~2배 이상 크고 묵직하다.
난간석과 병풍석(屛風石)을 지닌 커다란 봉분<封墳, 능상(陵上)> 주위로 석호(石虎) 2쌍과 석
양(石羊) 2쌍이 둘러싸고 있으며, 봉분 뒷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
遊石)과 고석(鼓石), 장명등(長命燈)이 있고,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무인
석(武人石) 1쌍, 석마(石馬) 1쌍이 자리해 능을 지킨다. |
▲ 확대해서 바라본 태릉 능침
▲ 태릉 동쪽 숲길 ①
태릉을 다녀간 늦가을이 곱게 수채화를 그렸다.
▲ 태릉 동쪽 숲길 ②
▲ 태릉 동쪽 숲길 ③
태릉~강릉 숲길 출입구 직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