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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 < 대각국사 의천의 차맥茶脈과 뇌원차腦原茶 연구>
최석환(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
고려 불교사에 영향을 미친 의천은 차문화사에서는 그간 잊혀가다가 요나라 천우황제가 경책經冊과 다향茶香을 보내와 사자(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되면서 고려 차뮨화를 중흥시킨 차승茶僧으로 새롭게 드러났다. <고려국 오관산 대화엄 영통사 증시 대각국사 비명 병서>
이 논고는 그간 간편적으로 의천을 거론해왔다. 또한 의천의 다법과 고려 왕실의 어차御茶로 높이 평가된 뇌원차의 실체를 밝히고 의천을 통해 송에서 고려로 이어진 용봉차와 고려의 뇌원차를 분석한다.
927년에 창건된 ‘혜인원’은 의천이 송나라에 머물 때 그곳에서 몇 달간 수행한 곳이다. 고려로 돌아온 의천은 경전과 이를 보관할 경각經閣을 건립하는데 앞장섰다. 모친인 인예태후가 금 2천 냥을 송나라의 ‘혜인원慧因阮'에 보내면서부터는 절의 명칭이 ’고려사‘로 변경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려사는 한국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런 역사적 의미가 잇는 고려사가 1958년 중국대약진 운동 시절 고려사의 마지막 건물이 허물어져 버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는데, 50년 만에 중건重建되면서 고려사는 고려시대의 한류韓流 중심지로 다시 떠올랐다.
필자는 고려사 중건 기념으로 2005년 항저우에서 열린 의천 탄신 9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에서 『의천의 다선일미』를 발표했다. 이어서 대각국사의 다법을 온전하게 복원하여 고려 차문화와 뇌원차의 실체를 밝히는 『고려 차문화를 중흥시킨 대각국사 의천의 차맥茶脈과 뇌원차 연구』로 의천이 고려 차문화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한 사실을 새롭게 드러냈다.
1. 천태차맥天台茶脈의 원류
1) 천태차맥의 비조 고구려 파야선사
대각국사 의천의 차맥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중국 저장성 천태산이다. 고구려 파야(波若, 562~613) 선사가 개항 6년(596)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가 ‘지의대사(智顗大師, 538~597) 문하에서 수선하고, 화정봉에서 ’차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다.
지의대사가 수행함에 있어 나태함을 경계하기 위해 파야선사에게 권했던 ‘차법’은 ‘천태차법’이었다. 그러므로 천태차법의 비조鼻祖는 고구려 구법승인 ‘파야선사’라고 할 수 있겠다.
파야선사의 행적은 《속고승전》권17 • 《신수과분육학승전》권3 • 《불조통기》권9 등에 기록되어 있다. 《불조통기佛祖統紀》에는 진나라 때 중국으로 건너간 파야선사는 금릉金陵에서 지의대사 강설을 듣고 깊은 뜻을 이해했다.
파야는 개황 연간에 진나라가 수나라에 병합되자 이곳저곳을 유행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개황16년(596) 천태산 북쪽 ‘불롱佛隴’으로 와 지의대사에게 법을 구하니,
대사는 “그대가 인연이 있어 여기에 왔으니 마땅히 한가하고 조용한 곳에[한거정처閑居靜處] 묘행妙行을 이루도록 하라. 이 천태산 최고봉인 화정봉華頂峯이 있는데 여기에서 육칠십 리 먼 길이다. 그곳에서 수행함이 어떠한가. 자네가 그곳에서 수행을 하면 반드시 큰 원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지의대사가 말했다.
그때가 개황18년(598) 파야선사는 스승의 뜻에 따라 수행처인 화정봉으로 올라가 밤낮으로 잠도 잊고 눕지도 않은 채 수행에만 전념했다. 오吳나라 때 높은 덕을 갖춘 도사 ‘갈현葛峴’은 이 산에서 수행할 때, 천태산 연화봉 남록 ‘귀운동의 운무차’를 차를 손수 법제하여 반야천의 물로 차를 달여 마셨다. 파야선사도 지의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천태산 화정봉으로 들어가 샘물을 파서 반야천을 일구었다.
16년간 천태산 화정봉에서 수행한 파야선사는 마침내 대업9년(613) 2월 홀연히 산을 내려와 불롱사佛隴寺에 도착했다. 이때 그곳에 있던 청청한 사람이 보니, 세 사람의 흰 옷 입은 이가 의발衣鉢을 가지고 뒤 따라 오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국청사에 이르러 은밀히 선우 동의同意에게 말하기를, “파야 스님이 자신의 수명이 장차 다해 멀지 않았으므로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고 했다. 과연 며칠이 안 돼 파야 스님이 병도 없이 단정히 앉아서 국청사에서 입적했다.
2) 일본보다 먼저 한국으로 이어진 천태산 차맥
일본으로 이어진 천태산 차맥을 먼저 살펴보자면 이러하다.
일본 천태종의 개조開祖 사이초(최징催澄, 767~822)는 정원21년(804년 9월 ~ 805년 4월 무렵까지)에 천태산에 들어가 천태의 가르침을 터득하고 귀국하여 일본의 독자적인 천태종을 개창하였다(806).
일본의 사이초 선사가 천태산에서 천태종을 구법해온 사실은, 고구려 파야선사가 천태산으로 구법을 간 역사적 사실에서, 200년 후가 된다. 그러므로 천태의 차맥은 고구려가 200년 앞섰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천태산의 차맥이 일본 천태종이 원류가 된 연원은 이러하다.
사이초 스님은 805년에 천태산에서 차씨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와 ‘히에이산(비예산比叡山)’에 심었다. 그로부터 일본에서 중국 천태산에서 차가 시작되었다.
훗날 토가노 산 매미산梅尾山 의 고잔지(고산사高山寺)에서 일본 화엄종의 중흥조인 ‘묘우에 상인’(명혜상인明慧上人, 1173~ 1232)은 두루마리로 된 ‘화엄종조사회권華嚴宗祖社繪卷’에 원효진영과 의상진영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신라의 원효대사를 흠모하였다. 불교춘추 취재팀<천태산 만년사>2000년,5월호 <불교춘추>202~210쪽, <나무위키, 고도 쿄토의 역사 기념물>
1191년에 천태산의 차씨를 일본에 전파한 에이사이 선사는 천태산 만년사에 주석하면서 1211년에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의 초고를 쓰고, 1214년에 완성하였다. ‘끽다양생기’ 서문에 “차란 말세에 양생의 선약仙藥이요, 사람으로 누려야 할 목숨을 늘리기 위해 기묘奇妙한 술법術法” 이라고 했다.
에이사이는 일본의 히에이산(比叡山비에산)에서 천태교학을 배웠는데, 1167년에 당본 《법화경》을 접하고 입송을 결의했다. 에이사이는 총 두 번의 입송入宋을 결행했다. 첫 번째는 1167년 26세 때 일본 구주九州에서 출발하여 닝보를 거쳐 천태산을 찾았고, 이때 ‘선禪’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송나라에서 천태종에 관한 주석서와 그 외의 불서들을 가지고 35세에 귀국했다. 1차 구법 송입한 나이는 26~28세에서 35~36세인 것 같다. *자료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기록한다.
두 번째는 1187년 46(또는 47)세 때 2차 입송을 단행 했다. 천태종 부흥에 ‘선禪’ 필요성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자대사육신탑智者大師肉身塔’에 참배한 후 천태산에서 ‘임제선臨濟禪’을 배웠다.
그는 신라의 도육존자가 머물렀던 천태산 만년사에서 주석하였는데, 이때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 초안을 잡게 된다. 그는 1191년에 천태산에서 감모양의 단지에 차씨 다섯 알을 넣어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50(51)세 였다. 이 차씨가 그 후 일본 ‘우지차’의 원조가 되었다. 에이사이 선사는 1191년 ‘차씨’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 지의智顗: 538~597 = 천태대사(天台大師) · 지자대사(智者大師) 또는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로 불린다. 수나라(581~618) 시대의 승려로, 천태종의 개조(開祖)이다.
묘우에 상인(명혜상인明慧上人, 1173~ 1232)은 에이사이 선사에게 받은 차씨를 토가노 산(매미산梅尾山)의 고잔지(고산사高山寺)에 심었다. 이 고잔지 차나무의 묘목 또는 차 씨앗은 그 후에 1202년에 에이사이 선사(이때 62세)가 임제종 선종 사찰인 ‘켄닌지’(건인사建仁寺)를 창건할 때, 묘우에 상인(이때 추정 나이 29세)이 차씨(또는 차나무)를 가져와서 다원을 조성하였다.
에이사이 선사가 차씨를 가지고 온지 1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토가노 차가 ‘본차’(本茶혼차)라고 불리며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외 지역의 차는 ‘비차’(非茶히차)라고 불리며 구분 짓게 되었다. 이 ‘본차’가 우지로 건너가 다원이 형성되면서 토가노 차는 우지차에 밀리게 되었다. * 일본 차역사는 좀 더 디테일한 자료가 필요한 것 같다.
3) 천태산 만년산에서 수행한 신라 도육 존자
<절강명차浙江茗茶>의 ‘화정 운무편’에 신라의 ‘도육道育’(미상~938)존자 이후 일본 천태종 고승 ‘엔진’스님(원진圓珍, 874~891)과 ‘에이사이’(영서榮西,1141~1215)선사에 의해 ‘차법’이 일본에 전해져 한·중·일 교류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적고 있다.
도육존자는 892년(진성여왕 6년)에 당나라로 유학 가서 천태산을 순례하였고, 그 후 평전사平田寺의 승당僧堂에 머물렀다. 모든 승려들의 음식을 먼저 살핀 뒤 남는 찌꺼기를 모아서 먹었다.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만물을 대하였고 벌레들이 자신의 몸을 뜯어먹도록 하였다.
이렇듯 40여 년간 한결같이 고행하며 두타행을 삶을 살았는데, 938년에 입적할 때 몸에서 붉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얻으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육존자는 만년사萬年寺에 주석할 때 날마다 나한羅漢에게 매일 차 공양을 했었다고 한다.
< 『천태산만년사지天台山萬年寺志』의 <역대고승歷代高僧>, 『신수과분육학승전』, 『송고승전』 >
천태의 차맥은 고구려 파야선사, 신라의 도육존자, 통일신라의 견당사 대렴,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한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에이사이 선사 이전에도 천태종을 받아들이긴 하였지만 천태 차가 발아하지는 못했다. 에이사이선사로 비롯된 천태산 차씨가 일본 천태 차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끽다양생기’ 와 ‘천태산 차씨’가 일본 ‘선차禪茶’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4) 천태차맥 신라로 이어져
천태산 차맥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견당사遣唐使 대렴大廉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 대렴이 왕명에 의해 당나라로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차씨를 심으면서 한국차 문화의 기원이 되었다.
그런데 대렴이 신라로 가져온 차씨가 당나라의 어느 지역에서 가져왔는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1999년 저장대 유학생인 ‘이은경’ 씨가 생물유전학적으로 지리산 차나무와 천태산 귀운동 차나무를 분석하여 입증시킨 바 있다.
텐타이현(천태현天台縣) 임업국의 쉬롄밍(허렴명許廉明) 선생은 그간의 연구 성과를 담은 <다엽 해상 차로의 연원>이라는 논문에서 DNA를 통해 지리산 차수와 천태산 차수를 과학적으로 비교 연구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리산 차나무 비교형태학의 연구’라는 주제로 하여 중국 저장(절강浙江) 천태산天台山 화정사華頂寺 서쪽의 서모봉西茅蓬과 북쪽 귀운동歸雲洞 천태에 심은 차나무와 한국 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쌍계사 사찰림寺刹林, 쌍계사 부근 전라남도 구레군 지리산 화엄사 사찰림의 차나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비교형태학의 방법으로 5개의 실험재료로 잎, 꽃의 외부 형태와 조직을 확대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L,S,R(최소유의범위Least Significant Range) 통계 방법을 이용하여 항목들을 측정하고 평균을 내어 비교 분석하였다.
3년의 연구를 통한 결과는 42가지의 비교 연구 항목 중에서 중국 천태산 화정 귀운동과 한국 지리산 쌍계사 부근의 실험 재료 사이에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 천태산 화정 서모봉과 한국 지리산 쌍계사 사찰림의 실험 재료 사이에선 3개 항목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중 1개 항목은 매우 큰 차이가 나타났다.
중국 천태산 화정 서모봉과 한국 지리산 화엄사 사찰림의 실험 재료 자이에는 8개의 항목이 차이가 났고, 1개 항목이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 쌍계사 부근은 중국 천태산 차씨가 전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쌍계사 사찰림도 중국 펀태산 차씨가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했다.
대렴이 신라로 가져왔던 차씨의 본적인 천태산 화정봉 귀운동에는 대략 1800여 년 전에 심었다고 하는 차밭이 있는데, 여기에 귀운동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념비가 있다. 전 중국국제차문화연구회 왕지아양(왕가양王家陽) 회장이 쓴 ‘갈현다포기념비葛玄茶圃記念碑(갈현다원기념비)’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갈현다포葛玄茶圃는 삼국三國 오吳나라 때 높은 덕을 갖춘 도사 갈현이 천태산에 머물면서 수련할 때 차나무를 심은 밭이다. 천태산 연화봉蓮花峰 남록南麓 귀운동歸雲洞 앞이다. 도처가 일 년 내내 운무에 덮여 있고 안개가 짙어 수풀을 따라 운금雲錦에 덮이는 기간이 많은 그곳의 차는 매우 훌륭하다. 역대 현자, 학사, 시인들이 많은 찬사를 보냈다.
시에서 ‘신선의 꽃송이가 찻그릇에 피어나네 [선파명완仙破茗碗]’ , ‘안갯속 새싹이 향룡지를 가득 마시네 [무아흡진향용지霧芽吸盡香龍脂]’ 라고 하였다. 수隋나라 때 고승 지자智者 대사가 연회에 꼭대기에 앉아 깨끗함을 지키며 차를 부처님께 바치고 다선일미茶禪一味를 깊이 깨달았다. 행히에까지 전해져 동쪽바다로 다도의 서막이 열렸다. ‘부처의 우로雨露, 황제의 정원, 신선의 술’이라고 찬양하였다.
귀운동 입구에는 차숲이 있는데, 진화형 고차수에 속하고 ‘갈현’이 직접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그는 선산仙山 천태에 남긴 유적이 많지만 이곳도 그중 하나다.
2008년 4월 닝보(영/녕파寧波)에 '해상차로로 본 닝보의 차문화‘란 주제로 국제 학술연토회가 개최되었다. 발표자로 나선 필자는 중국의 차종茶種이 신라로 전파된 경로를 밝혔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명주항(밍저우항)=영파=닝보/중국 저장성 동부 용강 하류에 발달한 도시. 명주=밍저우항 1842년에 개항. 그 이전 당·송 시기에도 한국과 일본의 바닷길이기도 하였다.
한국차의 전래 시기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나, 삼한 시대에 ‘백산차白山茶’라고 불리는 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한 시대부터 토착 차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왕후許王后에 의해 인도로부터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김해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竹露茶가 있었는데,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차종이라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한다.
“ 수로왕의 17대 손인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661년 조정의 명을 받을 받들어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이 선왕先王인 수로왕 무덤에 제사를 올릴 때 차와 떡 그리고 과일, 밥을 사용했다.”
는 기록이 있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의 기록에는
‘대렴大廉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종을 가지고 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는’
라는 기록이 있다.
흥덕왕 3년(828년) 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차씨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 입당 경로에 대해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근래 DNA 추출 검사를 통해 당시 대렴이 기져온 차씨가 중국 저장성(절강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 화정봉華頂峰 아래 ‘갈현다포葛玄茶圃’로 밝혀지면서 대렴 차 연구가 한 단계 진전되었다. 게다가 근래 대렴이 저장성 밍저우항(명주항明州港)에서 한국의 남단 완도의 ‘청해진항淸海鎭港’으로 이어진 ‘해상차로海上茶路’를 통해 귀국하여 저장성 천태산 차씨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속속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로 당시 대렴이 귀국할 때 장보고 선단을 통해 완도의 청해진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필자의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자 다양한 반응이 일어났다. 중국 <건축과 문화/2008년 5월>에 필자의 논문이 실렸고 중국차학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차문화는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흥덕왕 시기 성행하였다. 신라말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을 때 입당 구법승이 영파항을 통해 대거 당에 들어가 조사의 심인을 이어와 영파항을 통해 청해진의 장보고 선단을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
중국 구화산에 신라의 차씨를 심었던 신라의 김지장과 선차지법을 제창한 신라의 무상선사 등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중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은 고려高麗의 뇌원차腦原茶와 宋의 ‘용봉단차龍鳳團茶’를 수입, 본격적인 차 무역이 성행했을 정도로 송과 고려는 차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었다.
필자의 논문을 분석한 린쉬민(임토민林土民 - 영파문물고고연구소장寧波文物考古硏究所長)은 ‘밍저우항과 조선반도의 해상차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당나라 때 많은 고승들이 천태산으로 들어왔는데, 2가지 바닷길이 있었다. 첫 번째 해상로는 일본의 명승이며 일본 천태종의 창시자인 최징(사이초 最澄) 대사가 이용한 바닷길이다. 그는 당 정원 20년(804)에 밍저우항을 통해 당나라로 들어왔었고, 정원 21년(805) 일본으로 귀국할 때는 천태산에서 상우上虞 풍삼도량豊三道場에서 배를 타고 밍저우부 삼강구三江口로 다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두 번째 해상로는 천태산에서 직접 밍저우로 가서 밍저우항에서 뱃길로 한국 완도 청해진항으로 가는 것이다. 이 ‘해상차로’는 당나라 때 이미 개통되었다. 한국 <차의 세계> 잡지사 최석환 발행인은 “신라시대 장보고의 선단을 통해 차씨가 전해졌다”고 말했다.
장보고는 해운상단이었고 동아시아무역권의 청해진항, 일본의 하카타츠(박다진博多津), 밍저우항과 산동, 저장연해 일대에서 항상 활동하였다. 황암黃岩의 ‘신라방新羅坊’ , 임해臨海의 ‘신라초新羅礁’ , ‘신라서新羅嶼’ , ‘신라산新羅山’ , 상산象山의 ‘신라오新羅奧’ , 주산舟山의 신라초 등 문물사적은 장보고 선단이 활동한 가장 좋은 역사적 증거이다.
천태산은 밍저우항이라는 바닷길로 통하고 있어서 명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길은 매우 잘 통해 어떤 학자는 ‘당시唐詩의 길’이라고도 칭했다. 그래서 당 태화 2년(828) 신라에서 사신 대렴이 귀국할 이용한 뱃길은 위에서 말한 명승이 간 길과 같다."
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