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金餠泰(1899~1946)】 "의열단(義烈團)김원봉비서, 제1지대 광복군”
독립운동가. 이명 빈(斌)ㆍ·빈(彬)ㆍ조국동(曺國棟). 부산(釜山) 사람.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이 일제의 관공서 파괴 및 일본 고위관리의 암살 처단을 목적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자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9월에는 김원봉과 협의한 후 동 단원 박재혁(朴載赫)을 국내로 밀파,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전개하여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데 적극 관여하였다. 또한 1928년 중국 상해에서 김원봉과 함께 침체의 늪에 빠진 의열단을 정비하고자 제3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활동방향을 재정립하였다.
193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되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촉발된 중국민의 반일의식을 배경으로 김원봉의 의열단에서는 중국 국민당정부(國民黨政府)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한중연합방안을 타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장개석(蔣介石)의 원조로 김원봉은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의 탕산(湯山)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김원봉과 함께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투쟁 사관생도를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의열단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유일당 건설을 결정하였다. 1935년 7월 모든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이 총 결집하여 유일당으로 건설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자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가 창설되자 광복군에 지원하여 활동하였으며, 1945년 3월 왕영재(王英哉) 등과 함께 인도(印度) 파견공작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김원봉이 귀국하여 1946년 8월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자 중국 상해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다가 중국 남경에서 병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보훈처 홈)
독립운동가. 이명은 김빈(金斌)ㆍ김빈(金彬)ㆍ조국동(曺國棟). 부산 출신. 1919년 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그 해 1919년 11월 10일 길림(吉林)에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9월 14일 같은 의열단원인 박재혁(朴載赫)과 함께 부산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던져 부산경찰서장을 폭살하였다. 당시 박재혁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으나 그는 탈출에 성공하였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의 윤봉길 의사(尹奉吉義士) 폭탄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남경(南京) 교외 탕산(湯山) 혹은 강소성(江蘇省) 강녕현(康寧縣)에 설립되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약칭 조선혁명간부학교, 이칭 조선혁명간부훈련반, 통칭 의열단 간부학교) 제2기 군사교관으로 1933년 9월 16일부터 1934년 4월 20일까지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25일에 의열단(남경에 근거)ㆍ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상해)ㆍ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남경)ㆍ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만주ㆍ북경)ㆍ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대표 9명이 상해의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회가 1934년 3월 1일 남경(南京)에서 개최되었다.
이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속을 다지고 대일항전의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5년 7월 5일 의열단ㆍ한국독립당ㆍ신한독립당ㆍ조선혁명당ㆍ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 대표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해체하고 민족유일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수립하자, 의열단파 민족혁명당의 간부 겸 김원봉의 비서로 능숙한 중국어 실력을 이용해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였다.
1938년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이에 관계하였고, 1941년 조선의용대의 김원봉 계열 부대가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에 참여, 1945년 왕영재(王英哉)ㆍ진춘호(陳春浩)ㆍ여정순(呂正淳)ㆍ호건(胡建) 등과 인도(印度) 파견 공작원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남경(南京)에 머무르며 활동하다 1946년경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