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1950년
저자 ‘존 리치’는 1950년 일본에 주재하는 특파원들과 수영을 하다 일본어를 하는 통역의 출타로 대타로 니콘사를 방문하여 통역 대가로 니콘 카메라 한 대를 얻는다. 그 후 몇 달 뒤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칼라 필름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50년이 지나고 사진을 스킨해서 이 책을 2010년 6월에 간행한 것이다. 이사진은 시대의 기록인 동시에 60년 전의 그 장소를 저자를 데려갔다. 한국독자들이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또 전쟁의 참혹함과 겪은 사람의 희생과 아픔, 그리고 강인한 소생의 의지를 떠올리기 바란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 3대 통신사 AP의 ‘러셀 브라인스’, UPI의 ‘어니스트 호버레트’, INS의 ‘하워드 헨델’을 데리고 ‘리치’는 동경에서 후쿠오카로 이동하여 부산으로 출항하는 미 해군상륙함에 올라 미국 포병부대와 같이 부산으로 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기습공격을 하여 8월에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한국군 13만 7,899명이 전사하고, 45만 742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7월1일 부산에 상륙한 이래 총 178만 9,000명의 병력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 중 3만 6,940명이 전사, 9만 2,134명이 실종,4,399명이 포로가 됐다. 유엔군의 미군의 비율은 육군은 50.3%, 해군은 85.9%, 공군은 93.4% 등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된다.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공산군 측에 넘어갔다가 51년 3월 15일에 재탈환한다. 한국은 이 전쟁으로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한다. 많은 고아들이 외국에 입양되었다. 전쟁속의 일상은 계속되어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는 아기를 업고 서울의 시장을 오가는 사진이 많이 등장한다. 초기 휴전 회담은 개성에서 열렸다. 회담 동안은 북한군과 미군이 평화롭게 활보했다. 회담 덕분에 개성은 한옥을 가장 많이 보존한 북한의 도시가 되었다.
1952년 8월 15일에 이승만 박사의 2대 대통령 취임식에 여러 학교의 여학생들이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는 사진이 있다. 창덕여고생이 중앙에 보이고 옆에 중앙여고, 서울여고 팻말 등이 보인다. 장소는 중앙청 광장이다. 통신사에서 일하는 기자는 기사를 간결하고 짤막한 문장으로 작성해서 책상에 순서대로 놓고 뒤집어 아래부터 검열하는 군인이 해당 기자를 부르면 도쿄의 본사에 전화를 걸어 한 문장 한 문장 씩 받아쓰기로 문장을 송고한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기사가 전달되었다. 점점 특파원 수가 많아지면서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고, 일부 특파원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날아가서 기사를 송고하고 다음 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 채택했다. 당시의 통신의 열악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자 중에 ‘모리슨’은 중국계 혼혈 여의사 ‘한수인’과 로맨스로 훗날 ‘모정’이라는 영화의 주인공도 있었다.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모리슨’과 ‘테일리 텔레그래프’사의 ‘리스토퍼 버클리’ 기자, 유엔한국위원단 인도 대표 ‘나얄’ 대령이 탄 지프차가 대전차지뢰를 밟아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파괴된 수원의 화성 장안문은 문루가 반은 날아가고 반쪽만 남은 사진이 있다. 외국군은 이곳을 지날 때 마다 기념촬영을 했다. 서울 북방지역에서 미군병사들이 민간인 복장을 입은 북한군을 심문하는 사진을 보면 모두 머리는 짧은데 한복 중의적삼을 입은 건장한 모습이다. 유엔군 최고사령관은 맥아더 장군이고 초대 주한미군 사령관은 ‘워커’ 소장인데, 50년 12월 23일 워커 장군이 탄 짚 차와 트럭이 정면충돌하여 교통사고로 6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한국정부는 미군을 위한 휴양시설을 건립하고 이름을 워커힐 호텔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종군 기사들은 숙소로 기차객차를 썼고 그 앞에 포즈를 취한 사진이 있다. 한국전을 지휘한 수뇌부는 ‘리지웨이’ 대장, ‘폴리트’ 대장, ‘클라크’대장인데 그 세분이 지휘하면서 들고 있는 지도와 ‘리지웨이’ 대장은 가슴에 수류탄을 매단 사진이 있다.
전함 아이오와 호가 16인치 함포를 북한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당시 함포 탄 한 발은 1만 달러 정도로, 캐딜락 한 대 값과 맞먹었다. 영국 순양함 ‘자미이카’호가 참전하고 미국 항공모함 ‘복사’호가 참전한다. 항공모함 갑판에 날개를 접고 있는 ‘코세어’기, 이 단발 프로펠러 함상공격기는 뛰어난 활약상을 펼쳤다. 미군의 해군과 해병대의 주력기로 1957년까지 활약했다. 한국전에 미군은 110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알루미늄과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로로 하는 네이팜탄은 3,000도의 고열을 내면서 반지름 30미터를 불바다로 만드는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살상무기로 현재는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등장한 헬리콥터는 한국전쟁에서 폭넓은 용도로 사용된다. 수직 이착륙과 제자리 비행, 저속비행 능력으로 병력투입, 부상병 후송에 긴요했다. 주로 ‘시코르스키H-5’ 활약이 컸다. 최초로 휴전 협상이 51년 7월 개성에서 열리고 유엔군 대표, 한국군 백선엽 소장, 통역장교 이수영 중령, ‘알레이 버크’ 미군 해군소장, ‘헨리 호즈’ 미 육군 소장이 참여 했고 사진이 있다. 북한군은 남일 중장, 중공군 대표 ‘덩화’와 같이 입장하는 사진이 보인다.
53년 4월 20일 부상당한 북한 포로들을 판문점에서 맞교환하는 사진이 있다. 북한군 400명 중공군 100명을 주고 유엔군 포로 한국군 50명, 미군 30명, 영국군12명, 터키군 4명, 캐나다군 1명, 마아공군1명 ,그리스군1명, 필리핀군 1명을 서로 교환했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28개 시설에 최대 17만 명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52년 4월 초에 북한군과 중공군의 포로 폭동 이후, 수용소는 5월 7일에 당시 수용소 소장이던 ‘프랜시스 도드’ 미군 준장이 포로에 3일간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휴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열린 회담에서 유엔군 협상 대표들이 포즈를 취한 사진에는 ‘존 대니얼 ’제독과 ‘월리엄 해리슨’ 중장, 남한의 대표 최덕신 소장이 보이고 남한 측 대표는 휴전을 반대하여, 결국 협정서에 서명을 거부한다. 협정은 결국 53년 7월 27일에 체결된다.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김일성의 서명이 보이는 사진이 있다. 그리고 53년 10월에 강원도 인제 관대리에서 열린 미 10군단 지휘권 이양 및 국군 3군단 창설식에 이승만 대통령과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이 단상에 서고 백선엽 육군참모총장과 최초 3군단장 강문봉 소장이 보인다.
저자 존 리치는 1917년 생으로 2014년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차 대전 이후 20세기 미군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 군인이나 종군기자로 종군한 분이다. 42년 해군에 입대하여 일본어를 공부하고 해병대장교로 임관한다. 태평양 먀설제도, 사이판 섬, 사이판과 티니언 섬, 일본 이오지마섬 등에 상륙작전에 네 차례 참전했다. 전쟁 후 ‘렌돌프 허스트’가 세운 INS통신사에 입사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다 맥아더 장군과 인터뷰를 하고, 일왕이 히로히토의 지방순회 때는 취재를 했다. 중국 국공내전에 상하이에 전황을 보도하다 미군 경비함을 타고 탈출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에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한국전을 취재한 종군기자가 되었다.54년은 베를린 NBC지국장으로 4년 근무하고 베트남 전쟁에는 도쿄와 베트남을 10년 왕래하면서 전쟁을 취재했다.
2020.08.15.
1950년
존 리치 화보 및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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