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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청교도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70년 교황으로 파문당한다. 그때부터 가톨릭은 영국에서 반역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보다 더 영국 국교회에 반항하는 세력은 청교도들이었다. 1564년부터 청교도란 말은 ‘개혁의 개혁을 위한’ 운동을 하는 이들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완전한 개혁을 요구한 이들은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급성장한 세력이다.
엘리자베스 시대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성공회) 안의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 추방당하거나 망명한 이들, 자발적으로 제네바에 가서 대륙의 개혁 교회 신학을 배웠던 이들은 엘리자베스 시대가 오자 대거 귀국해서 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영국을 제네바처럼 거룩한 도시로 만들기 원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혁 신앙이나 설교를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목회에 별관심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든 종교 행사는 국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를 것을 선언하였다. 그녀는 가톨릭을 방불하는 여러 가지 의식들을 통해서 영국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성경대로 확실한 종교개혁을 진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불만이었다.
청교도들이 논쟁에 나서게 된 것은 성직자들이 예배드릴 때 입는 예복 문제부터였다. 성직자들이 가톨릭의 신부들처럼 입는 것을 불평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줄 때 성호를 그린다든지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는 행위, 종교 축일이나 휴일이 너무 많은 점, 교회에서 올갠을 사용하는 것, 심지어는 결혼식 할 때 반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가톨릭의 잔재라고 비난하였다.
청교도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로 불린 것은 그들이 신앙의 순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파들은 감독 제도만 반대하였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인들은 장로회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질 것을 요구하였다. 분리파들은 국가와 교회가 분리됨은 물론 교회와 교회도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에는 침례를 주장하는 침례파도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토마스 카트라이트(Cartwright)를 비롯한 청교도 지도자들은 1572년, 성공회식 감독 제도 대신에 장로교식으로 조직을 개편하고자 주장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가르친 교회 체제를 따라서 당회를 조직할 것과 회충들이 목회자를 위임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예배 형태도 거의 외형상 가톨릭과 비슷한 예배를 대폭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왕과 주교들은 이러한 주장들이 안정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즉시 처벌이 내려졌고 카트라이트 교수는 유럽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지하 운동은 계속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무서운 벌을 가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운동을 근절하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지하 조직책들이 색출되면서 장로교 운동은 1592년경 일단 수그러들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단 국교에서 머물면서 왕에게 충성하며 개혁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칼빈도 영국 성공회의 체제를 특별히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인사들이 천대를 받으면서도 국교회에 계속 머물 수 있었다. 영국과 국왕을 향한 이들의 충성심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좀더 과격한 청교도들도 있었다.
최초의 분리주의자는 캠브리지에 거주한 로버트 브라운(Browne)이었다. 그는 교회를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회중은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감독들이나 장로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그는 목사, 교사, 장로들은 회중들이 선출하며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국교회를 떠나기를 주장했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독립파 또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었다. 1580년경 브라운은 노르위치에 이러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분리주의는 재세례파처럼 급진적인 형태였다. 정부는 놀라고 진노하였다. 이들에 대한 박해는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 대주교를 바꾸었다. 확실하게 자기 명령대로 집행하는 이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인 존 휫기프트(Whitgift)가 국교회에서 벗어나려는 청교도들을 벌하는 역할을 맡았다. 1583년 그는 청교도들이 국가의 질서에 순응해야 할 것을 선언했다. 그해 발표된 6개 조항은 교회에서도 국왕의 지존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를 거스른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200여 명의 교구 사제들이 그 직에서 쫓겨났다. 1586년에는 신학 서적을 검열하여 극단적 청교도들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런 일들 때문에 여왕이 가톨릭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때때로 그녀는 동정녀에게 기도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후에 이런 억측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제임스 1세 시대
1603년 엘리자베스가 죽자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로 이미 스코틀랜드 왕이었다. 그는 영국을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영국인들은 그를 항상 외국인처럼 대했다. 결국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연합은 제임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세력이 강해진 상인 계급은 귀족만을 우대하는 제임스를 싫어했다.
새 왕은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에 오자 국교회의 원리를 받아들였고 감독들과 대주교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에 대한 더 많은 개혁 요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천 명의 성직자들이 청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청교도 목사들은 교회 내 가톨릭적 요소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영국도 스코틀랜드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교회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 신학으로는 온건한 칼빈주의를 따르면서 예배 의식과 교회조직은 전통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녀와 국교도들은 당시 예배 의식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성경에 따른 예식들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왕관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더 많이 대두되고 있었다. 긴장 상태는 표면화되었다.
왕은 별로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이듬해 회의를 소집했다. 왕의 이장인 회의에서 청교도들은 장로교에서 쓰는 ‘노회’란 말을 사용하여 왕은 화가 났다. 감독들이 장로가 되면 왕은 물러나야 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회의는 중단되었다. 곧 300명의 성직자들이 국교회에서 직책을 박탈당했다. 많은 분리주의자들은 화란으로 이주했고 후에 아메리카로 갔다.
제임스는 자기 어머니와는 달리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로교 국가인 스코틀렌드에서 권력의 제한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자기의 권력을 더욱 증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감독 제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프랑스처럼 왕실이 절대 권력을 소유하기 바랐던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것은 양보할 수 있어도 감독제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회의는 중단되긴 했지만 전혀 쓸데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이 새로운 성경 번역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1611년 소위 흠정역이란 성경이 나왔다. 요즈음에 킹 제임스 역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로 나온 번역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모든 계층 사람들이 읽었다. 여기의 표현들은 영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이 번역은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이 흠정역은 국교회의 입장에서 서문을 실었다. 엘리자베스를 ‘빛나는 서구의 별’로, 제임스 왕을 ‘지엄한 주권자’로 불렀다. 이 서문을 쓴 주교들은 왕실에 아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동시에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읽지 못하게 한 교황을 비난했고, 청교도들은 교만하여 제멋대로 행하는 무리라고 욕하였다. 당시 주교들의 입장이 여기 나타나 있다.
제임스와 감독들의 입장은 청교도적인 입장에서 있었던 의회에 점점 더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은 얼마간의 국정 경험이 생기자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세금을 새롭게 더 부과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다. 1614년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번 구성된 의회는 전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는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은 세금만으로 버텨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주교들과 귀족들에게 막대한 금액의 돈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토와 왕위를 빼앗긴 개신교도 보헤미아 국왕 프레드릭은 그의 사위였다. 그러나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민들에게 비겁자로 보였다.
더 나아가 제임스는 태자를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계획하였다. 황제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청교도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이었다. 제임스는 재정의 압박으로 두어 번 더 의회를 소집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청교도 지도자들을 학해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와 내란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아들 찰스 1세였다. 그도 아버지처럼 왕실의 강력한 중앙 집권을 원했다. 그러므로 의회와 사이가 나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다. 결혼을 위해서 영국의 가톨릭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새 왕비와 수행원들은 가톨릭으로 의식을 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왕비는 구약의 음녀 이세벨로 비유되며 영국민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청교도적이던 의회는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찰스는 계속 모든 문제에서 의회와 충돌하였다. 1629년 그는 의회를 무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11년을 보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물가는 오르고 귀족들만 입장이 좋아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자문인 윌리엄 로오드(Lau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켄터베리 대주교였다. 그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국교회에 대항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형벌을 마련하였다. 큰 벌금을 부과하고 뺨에 선동자의 약자를 낙인으로 찍는 것이었다. 그 밖에 귀를 자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1645년 이러한 형벌을 받는 법률가 한 사람이 꾸민 조서를 말미암아 처형을 당하게 된다.
영국의국교회를 장악한 로오드는 스코틀랜드에도 자기의 정책을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이미 강력한 장로교를 시행하고 있었다. 1637년 그는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도 읽도록 명령을 내렸다. 반발은 즉각적이고 강력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교회가 감독에 의해서 처리될 수 없다며 대항했다. 두 지역은 즉각 전쟁 상태가 되었다.
찰스 왕은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심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재정난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의회를 소집하였다. 소집된 의회는 왕의 뜻에 대항해서 왕을 독재로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로오드를 체포하였다. 왕은 의회에서 자신에게 항거하는 주동자들을 체포하려고 몸소 부하를 거느리고 나갔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늦었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1642년부터 6년 간 의회파와 국왕파는 전쟁을 하였다. 국왕을 지원한 이들은 귀족들이었고 의회를 지원한 이들은 그 동안 고통을 겪어 온 계층들이었다. 양측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전투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왕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모든 청교도 분파는 단합하여 왕에게 대항했다.
이 와중에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보조를 같이 하기 위해 감독 제도를 폐지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해서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면서 신앙 문제에 자문을 담당할 수 있도록 신학자들을 소집했다. 이것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종교 회의(Westminster Assembly)이다. 여기에는 의회에서 임명된 121명의 성직자, 30명의 평신도 그리고 8명의 스코틀랜드 대표들이 참석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문서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규칙은 성경 자체”라고 선언하였다. 모호한 내용은 더 명백한 내용을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말하면서 또한 “그의 깊으신 뜻대로 장례 사건들을 착오 없이 미리 정하셨다고”고 예정을 말한다.
그 밖에도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한 구원을 말하였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택한 백성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또는 영원히 떨어져 나갈 수 없으며 반드시 끝까지 견인해 영원한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문서를 읽으면 도르트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의 한 위대한 이정표를 얻게 된다.
이제 의회와 스코틀랜드는 영국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개혁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 법령은 1644년 실행에 옮겨졌다. 다음해에는 윌리엄 로오드가 처형되었다. 차츰 전투가 시작되자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이 역사의 앞부분에 나타났다. 그는 단지 재산이 많은 하원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기병대를 조직하면서 중요한 인물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 청교도가 되어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는 국왕의 주력 부대가 기병대임을 알고는 여기에 맞서는 군대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는 기병대는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거룩한 전쟁에 임한다는 확신으로 시편을 노래하며 전투에 나섰다. 차츰 의회파의 전체 군대는 같은 확신으로 용기백배하여 내스비 전투에서 국왕의 군대를 물리쳤다.
의회 군은 왕의 본거지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왕이 외국 가톨릭 군대와 손잡은 것을 폭로했다. 다급한 찰스는 스코틀랜드인들과 협상을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사로잡아 의회 군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우열곡절 끝에 청교도 군은 의회를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찰스에게 동정적인 의원들을 제외시킨 뒤 왕의 재판을 진행하였다. 찰스는 1649년 참수당하였다.
호민관 시대와 왕정 복고
찰스의 처형으로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때 권력을 잡은 이는 크롬웰이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안을 정돈시켰다. 우선 아일랜드의 반란을 평정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왕과의 폭동도 진압했다. 크롬웰은 내친 김에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그는 호민관의 칭호를 채택했다. 이제 그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장로교, 침례교 그리고 일부의 온건한 감독파들까지 공존할 수 있는 종교 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다. 경건한 청교도였던 그는 주일 성수, 경마, 투기, 극장에 관한 여러 가지 입법을 통해서 영국의 풍속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세운 경제 정책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어서 귀족층과 극빈자들은 자연히 호민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의 많은 교역자들은 새로이 ‘심사관들’에게 승인받은 이들로 대체되었다. 이 심사관들은 청교도 여러 분파의 지도급 인물들이었다.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서 신앙을 강요할 수 없음을 이 새로운 정부는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교황주의나 감독 체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관용적이었던 크롬웰은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크롬웰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평안하게 영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전의 왕들처럼 의회와는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좌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거룩한 왕국을 추구했던 그는 1658년, 자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이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같은 능력을 가지지 못한 아들은 이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크롬웰의 죽음과 함께 청교도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이 소망하던 나라는 사라지고 옛날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너무도 경건한 신앙을 영국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제네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옛 왕조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제 청교도에 대한 강한 반동이 일어날 상황이었다.
의회는 장로교의 제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감독 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그리고는 반대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이제 국교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교회에 발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장로교 목사들은 그 자리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반란과 폭동이 발생하였다. 장로교 측 반란군은 처절한 살육전 끝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며 나중에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2세도 그리하였다. 영국인들은 장로교도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영국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렌지 공 윌리엄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제임스는 통치 3년 만에 프랑스로 도주하였다. 얼마나 오랜 투쟁과 투쟁의 연속이었던가!
이제 영국에서는 누구든 왕실에 충성하고 1520년의 39개 조항에 서명하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성공회 국가로 남은 것이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교리로 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의 이상은 계속 남아 영국 사람들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대륙에 미국을 건국하는 토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