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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수(湖水)
테오도르 슈토름[독일]
테오도르 슈토름(1817~1888)테오도르 슈토름(1817~1888)
노인 어느 늦가을 오후, 옷을 잘 차려입은 한 노인이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유행이 지난 단추 달린 구두가 먼지에 뒤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다. 그는 금손잡이가 달린 기다란 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침침한 눈으로 조용히 사방을 살피면서 눈앞에 전개된 저녁놀에 물든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흘러가 버린 청춘을 모두 담아 둔 듯한 눈은 빅설처럼 새하얀 그의 머리칼과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어쨌든 그는 다른 지방 사람 같았다. 얼떨결에 사람들은 그 엄숙한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자 않을 수 없었지만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어떤 높다란 뾰족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시가 쪽을 돌아보고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벨이 울리자 현관에 접해 있는 안방 창문의 녹색커튼이 걷히고 한 노파의 얼굴이 나타났다. 노인은 등나무 지팡이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직 불을 켜지 않았니? 하며 노인은 약간 남쪽 지방의 억양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가정부는 다시 커튼을 내렸다. 노인은 지체하지 않고 넓은 현관을 통해 홀을 지나 맞은편 출입문으로 해서 좁다란 복도로 나왔다. 홀에는 자기꽃병이 나란히 놓인 큼직한 박달나무 선반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복도는 좁은 계단을 통해 뒤채의 2층으로 통해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 계단을 올라서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구석진 데다 조용했다. 한쪽 벽에는 인물화와 풍경화가 걸려 있고 푸른 책상보가 덮인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펼쳐진 채 흩어져 있으며 그 앞에는 빨간 비로드 쿠션의 묵직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모자와 지팡이를 한쪽 구석에 놓고는 그 안락의자에 앉아 산책의 피로를 풀로 있는 듯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한 줄기 달빛이 유리창을 통해 벽에 걸려 있는 그림 위로 떨어졌다. 그 밝은 달빛이 서서히 옮겨짐에 따라 노인의 눈도 그 빛줄기를 쫓아가고 있었다. 얼마 뒤에 그 빛은 검은 액자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초상화 위를 비쳤다. 엘리자벳! 하고 노인은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 말을 하는 짧은 순간에 세월이 변해 버렸다. 이제 그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와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조그마하고 귀여운 한 소녀가 그에게로 달려 왔다. 그 소녀의 이름은 엘리자벳, 나이는 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는 소녀보다 꼭 갑절쯤 되는 나이였다. 소녀는 목에다 빨간 스카프를 둘렀는데 그것이 소녀의 자색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려 기가 막힐 정도로 귀엽게 보였다. 라인하르트! 하고 소녀가 소리쳤다. 우리 나가 놀자. 하루종일 수업이 없거든. 내일도 그렇고. 라인하르트는 어느새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석판을 재빨리 현관 아래에다 내려놓고 엘리자벳과 함께 대문을 빠져나가 들판으로 내달렸다. 뜻하지 않은 방학으로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벳의 도움을 받다 잔디풀로 집을 지어 놓았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한여름 밤을 함께 지낼 작정이었는데 아직 벤치가 미완성 상태였다. 그들은 즉시 일에 착수했다. 못이며 쇠망치며 거기에 필요한 판자는 벌써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엘리자벳은 둑을 따라 거닐면서 들에 핀 해바라기 열매를 앞치마에다 담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물쇠와 목걸이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못 몇 개를 쳐서 겨우 벤치를 만들어 놓고 다시 창 밖 밝은 데로 나왔을 때 소녀는 이미 멀리 떨어진 풀밭 저쪽을 걷고 있었다. 엘리자벳, 엘리자벳?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뒤돌아 볼 때 소녀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리와. 하고 그는 말했다. 벌서 우리들의 집이 다 됐어. 더웠지? 자, 안으로 들어와. 둘이서 새 벤치에 앉아 보자. 내가 얘기해 줄게. 그리고 두 아이는 새 벤치에 걸터앉았다. 엘리자벳은 앞치마에서 조그마한 고리 모양의 열매를 쏟아 긴 실에다 꿰었고 라인하르트는 예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세 사람의 실 뽑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아!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그런 얘기라면 난 훤히 알고 있는 걸. 언제나 똑같은 얘기라면 싫어. 라인하르트는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의 실 뽑은 여자 얘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사자의 굴속으로 잡혀간 가련한 남자의 예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이었어. 하고 그는 말했다. 알겠지? 아주 캄캄한 밤이었다구. 그래서 사지들은 졸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졸면서도 하품을 해서 새빨간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 남자는 벌벌 떨면서 빨리 날이 새었으면 하고 생각했지. 그때 느닷없이 그 남자의 주위에 밝은 빛이 비쳐 와서 눈을 떠보니 천사가 서 있는 게 아니니. 천사는 그 남자에게 손짓을 하고는 바로 바위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 엘리자벳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 천사가? 하며 소녀는 물었다. 그 천사는 날개가 있었어? 그저 그런 얘기야. 하고 라인하르트는 대답했다. 천사란 없는 거야. 아이 참! 라인하르트! 하고 소녀가 말하면서 우두커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불안한 눈으로 노려보자 소녀는 의아해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왜 모두들 항상 천사가 있다고 할까? 엄마도 그러고 아주머니도. 또 학교에서도 그러잖아? 나도 몰라.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럼 말이야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사자도 없는지 몰라. 사자가? 사자가 없다고? 있어, 인도에 있지. 인도에선 중들이 사자를 수레에 매어 끌게 하면서 사막을 넘어간다구. 나도 크면 혼자서 가보려고 해. 거기는 우리 나라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지. 너도 같이 가야 해. 갈 거지? 응 하고 엘리자벳은 말했다. 그렇다면 엄마도 같이 가야지 뭐. 그리고 너의 엄마도. 안돼. 하고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그땐 벌써 엄마들은 할머니가 되어서 안돼. 그럼 나 혼자선 갈 수 없어, 꼭 가게 해줄게. 그땐 너는 내 색시가 되어 있을 테니 아무도 네게 뭐라고 억지로 시킬 수는 없어. 그러면 엄마는 울 걸. 우린 곧 다시 돌아올 텐데 뭐 하고 라인하르트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서 바로 말해봐. 나와 같이 갈 거지?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고 말 테야.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하고 소녀는 말했다. 나도 같이 인도에 갈게. 라인하르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녀의 두 손을 잡더니 풀밭으로 끌어냈다. 인도로 인도로! 하고 노래를 부르며 소녀와 함께 빙빙 돌았기 때문에 소녀의 목에 둘려진 스카프가 바람에 훨훨 날렸다. 그러던 그가 소녀의 손을 갑자기 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암만 해도 안 되겠어. 네게는 그럴 용기가 없는걸. 엘리자벳! 라인하르트! 그때 대문 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예요. 여기 있어요! 하고 아이들은 대답하면서 손을 잡고 집쪽으로 뛰어갔다. 숲속에서 그런 식으로 두 아이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소년에게는 가끔 소녀가 너무 얌전을 떤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녀에게는 소년이 지나치게 난폭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두 아이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노는 시간은 거의 함께 지냈다. 겨울에는 서로의 어머니들의 비좁은 방에서, 여름엔 숲 속이나 풀밭에서. 엘리자벳이 라인하르트 앞에서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 소년은 선생님이 노여움을 자기에게로 돌리려고 일부러 석판을 책상에 매어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눈에 뜨이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때부터 지리 수업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리고 대신에 한 편의 장시를 지었다. 시 속에서 그는 자신을 씩씩한 독수리에, 선생님을 회색 까마귀에 비유했다. 엘리자벳은 흰 비둘기였다. 그 독수리는 날개가 튼튼하게 자라기만 하면 회색 까마귀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시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으며 자기가 매우 훌륭해진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 그는 백지를 꿰매어 양피지로 겉을 씌운 다음 노트를 펴서 첫 페이지부터 그 처녀시를 공들여 베껴 넣었다.......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른 학교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 새로운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렇지만 엘리자벳과의 사이는 그런 것으로 인해 멀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소녀에게 몇 번이고 거듭 들려줬던 동화 중에서 특히 소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들을 베껴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의 생각도 거기에다 삽입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지만 웬일인지 그것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들은 대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런 다음에 그 노트를 엘리자벳에게 넘겨주면 그녀는 그걸 서랍 속에 정성껏 간직했다. 밤이 되어 때때로 그녀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노트를 꺼내 어머니에게 낭독해 주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는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7년이 흘렀다. 라인하르트는 상급 학교에 다니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엘리자벳에게는 머지 않아 라인하르트가 곁에 없게 되리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가 보통 때처럼 동화를 써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할 터이니 소녀 쪽에서도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회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엘리자벳은 무척이나 기뻤다.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떠나기도 전에 양피지 노트 속에는 이미 여러 편의 시가 담겨졌다. 그 책 전부도, 차례로 백지의 반을 메워 놓은 대부분의 시도 결국은 엘리자벳이 동기가 되었지만 그 사실만은 알리지 않은 채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6월이 됐다. 라인하르트는 이제 떠날 날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 모두는 라인하르트에게 보다 더 줄거운 하루를 만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근처에 있는 숲 속으로 소풍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숲 속까지는 마차로 가고 거기서부터는 음식물을 넣은 상자를 들고 내려서 걸어갔다. 우선 전나무 숲을 빠져나가야 했는데, 그 숲은 냉랭하고 어둠침침했으며 땅바닥엔 온통 침엽들이 깔려 있었다. 반시간 가량 걸은 다음에 전나무 숲의 어둠으로 빠져 나와 상쾌한 떡갈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무엇이나 밝고 푸르렀으며 이따금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가지에서 가지로 건너뛰며 따라왔다. 일행은 떡갈나무 고목이 둥근 천장을 이루고 있는 넓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상자 하나를 열었고 노인 한 분이 음식 준비를 맡아 나섰다. 모두 내 곁으로 모이시오, 젊은이들! 하고 그 노인이 소리를 쳤다. 내 말을 들으시오. 이제부터 아침 식사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른 빵을 한 개씩 드리겠소. 버터를 가져오지 않았으면 빵에 발라먹을 것은 여러분 자신이 구해야 합니다. 숲 속에는 딸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내는 분들에게만 그럴 뿐입니다. 못 찾는 사람은 맨 빵을 그대로 먹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을 알아듣겠소?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젊은이들은 대답했다. 그렇다면 됐군. 하고 그 노인은 말했다. 내 말이 끝난 건 아니오, 우리 늙은이들은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 나무밑 집에 남아있을 겁니다. 그래서 감자를 깍고 불을 지펴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따 모은 딸기의 반을 내놔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후식으로 쓰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동쪽이든 서쪽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떠나십시오. 약속을 꼭 지켜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모두들 얼굴을 찡그렸다. 잠깐만! 하고 그 노인이 또 한 번 소리를 쳤다.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겠지만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 늙은이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명심해 두시오. 이제 여러분은 오늘 하루 귀중한 교훈을 많이 얻을 것이며 거기다 딸기까지 얻게 되면 인생에 있어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젊은이들도 노인의 말에 동갑이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리와, 엘리자벳. 라인히프트가 말했다. 나는 딸기가 많은 데를 알아. 엘리자벳에겐 맨 빵을 먹이지 않겠어. 엘리자벳은 밀짚모자에다 푸른 리본을 동여매어 팔에 걸었다. 그럼 가.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바구니도 됐으니. 두 사람은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점점 깊이 들어가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축축한 나무 그늘을 뚫고 나갔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는데 그들의 머리 위 공중에서 보이진 않지만 오직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깊은 풀숲을 빠져나갔다. 숲 속은 너무 무성해서 라인하르트가 앞장서서 가지를 꺾기도 하고 넝쿨을 헤치기도 하며 나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엘리자벳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부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라인하르트.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훨씬 떨어진 뒤쪽에서 관목과 싸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겨우 보였다. 그녀의 귀여운 머리가 이빨 같은 나뭇잎 속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 엉킨 관목 사이에서 그녀를 끌어내어 넓은 공지로 데리고 나왔다. 거기는 푸른 나비들이 외로운 꽃 사이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라인하르트는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에서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줬다. 그런 다음에 밀짚모자를 씌워 주려고 했으나 그녀가 마다했다. 그래도 그가 다시 억지로 씌워 주려고 했으므로 그녀는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런데 아까 말한 딸기는 어디 있어? 하고 그녀는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여기쯤에 있었는데! 하고 그가 말했다. 두꺼비란 놈이 우리보다 먼저 다녀갔나 봐. 족제비나 요정인지도 모르지. 그런가 봐.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줄기는 그대로 있는데....... 하지만 이런데서 귀신 얘기는 말아 쥐. 더 가봐. 조금도 피로하지 않으니 좀더 찾아봐. 그들의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또 숲이 보였다.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벳을 두 팔로 껴안고 냇물을 건넜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다시 넒은 공터로 나왔다. 여기는 꼭 딸기가 있을 거야. 하고 소녀가 말했다. 냄새가 참 좋은데. 딸기나무와 가시가 이리저리 뒤엉켜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풀과 땅 위를 덮은 히드의 짙은 냄새가 진동했다. 여긴 쓸쓸해.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돌아갈 길에 대해서는 라인하르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나 사실은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다. 조용히 해.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저쪽을 한 번 불러봐. 라인하르트는 입에다 손을 대고 외쳤다. 이쪽으로 와요. 이쪽으로 와요! 하며 그쪽에서도 대답이 들려 왔다. 대답을 하는군! 엘리자벳이 말하며 손뼉을 쳤다. 아니야, 저건 산울림이야.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무서워! 하고 소녀가 소곤거렸다. 괜찮아.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무서울 것 없어. 여긴 멋진 곳인데. 저쪽 나무 그늘 밑에 있는 풀밭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가자. 다른 사람들을 꼭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엘리자벳은 떡갈나무 밑에 앉아서 조심스레 주위에 귀를 기울였고, 라인하르트는 거기서 2, 3보 떨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묵묵히 소녀 쪽을 보고 있었다. 태양은 바로 머리 위에 떠 있어 찌는 듯한 한 낮의 더위였다.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조그만 날벌레들이 날개를 펴 공중을 빙빙 날아다녔다. 그들의 주위에는 붕붕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고 가끔씩 숲 속에서는 딱따구리의 나무 찍는 소리와 그 밖의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저 소리를 들어봐.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종소리가 울려오는데... 어디서? 하고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우리 뒤쪽에서 들려 오나 봐. 정오의 종소리야.: 그렇다면 우리 뒤쪽에 시가가 있는 셈이군. 그러니 이쪽으로 똑바로 뚫고 나가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거야. 그들은 귀로에 올랐다. 엘리자벳이 피곤해 했기 때문에 딸기 찾는 일은 단념해 버렸다. 마침내 나무 숲 뒤에서 일행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땅바닥에 하얀 천조각이 희끗희끗 비치고 있는 것도 보였는데 그것이 식탁 대용이었고 그 위에는 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까 그 노인이 단추 구멍에 냅킨을 꽂고 열심히 불고기를 자르며 젊은이들에게 설교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기 낙오자가 돌아왔다. 엘리자벳과 라인하르트가 나무 사이를 빠져 나오는 것을 보더니 젊은이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이쪽으로 와요. 하고 노인이 불렀다. 수건을 비우고 모자를 뒤집어 봐요! 얼른 찾아낸 것을 여기에 내놓도록.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뿐입니다. 하고 라인하르트가 대답했다. 그게 전부라면 하며 노인은 산처럼 담아 올린 큰 접시를 두 사람 쪽으로 내밀어 보이기만 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걸 잘 지켜야지. 여기선 게으른 사람에겐 먹일 수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 노인은 부탁을 들어줬다. 식탁 정리가 끝나자 그와 때를 맞추어 울창한 노간주나무 속에서 새소리가 들여 왔다. 이렇게 그날은 지나갔다...그러나 라인하르트는 역시 무언가 한 가지는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록 딸기는 아니지만 역시 그것도 숲 속에서 자란 것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낡은 양피지 노트에다 그걸 적어 뒀다. 여기 산허리엔 나뭇잎 흔드는 바람도 없고 나뭇가지들은 나직이 드리워 있는데 그 아래서 소녀는 쉬고 있네. 소녀는 티미안꽃 속에 앉아 향기에 묻혀 앉아 있네. 푸른 날벌레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숲은 말이 없는데 소녀의 맑은 눈은 그 속을 응시하고 갈색 머리 위에 넘쳐흐르는 태양빛. 멀리서 껄껄거리는 두견새 마음에 오고 가네. 소녀는 지쳤네 숲 속 여왕의 금빛 눈초리를. 거리의 아이 크리스마스 이브. 아직 해는 하늘 높이 떠 있는데 라인하르트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 시청 지하실에 있는 주점에서 낡은 나무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그 지하실은 벌써 어두컴컴해졌기 때문에 벽에 걸린 램프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손님은 드문드문 앉아 있고 급사는 피곤한 듯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과 칠현금을 타는 집시 풍의 처녀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악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들의 테이블에서는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셔라. 내 보헤미안의 연인이여! 하고 귀공자 티를 내는 어떤 청년이 샴페인이 가득 든 컵을 처녀 쪽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싫어요 하고 처녀는 자세도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그럼 노래라도 불러봐. 하고 그 귀공자는 떠들면서 은화 한 닢을 그 처녀의 무릎 위에 던져 주었다. 그 아가씨가 검은 머리칼을 조용히 매만져 올리고 있는데 바이올린 켜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다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러나 아가씨는 머리를 제치며 턱으로 칠현금을 눌렀다. 저런 사람을 위해서는 타기 싫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라인하르트가 컵을 손에 들고 그녀 앞으로 내달려 갔다. 왜 그러시죠? 네 눈이 보고 싶어서. 내 눈이 댁과 무슨 관계가 있죠? 라인하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그 여자를 내려다봤다. 난 잘 알아. 그 눈은 나쁜 눈이야. 그녀는 뺨을 손으로 가린 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의 아름답고 죄많은 눈을 위하여! 하며 그 술을 마셨다. 여자는 웃으면서 머리를 뒤로 제쳤다 그러던 여자가 느닷없이 주세요! 하면서 그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남은 술을 마셔 버렸다. 그런 다음 삼화음을 울리며 열정적인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오늘, 오직 오늘 뿐 아름다운 내 모습도 내일이면, 아아 내일이면 온갖 것이 전부 변하고 말 걸! 이 순간만 그대는 나의 것. 즉음 뿐, 아아 죽음 뿐 오직 나 혼자 떨어져서. 바이올린 주자가 빠른 템포로 후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손님이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 너를 데리러 왔어. 네가 떠난 뒤에는 네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왔어 하고 그가 말했다. 헛소리 말아! 네 방은 전나무와 크리스마스 케이크 냄새투성이던데. 라인하르트는 컵은 내려놓고 모자를 집었다. 왜 그래요? 하고 그 처져가 물었다. 곧 돌아오겠어.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 그대로 있어요.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다정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라인하르트는 주저했다. 그렇게는 안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킬킬거리며 그를 꼬집었다. 가세요. 하고 그 여자는 말했다 당신은 소용없어요. 전부 쓸데없는 일이에요. 하며 여자는 등을 돌려 버렸다. 그 동안에 라인하르트는 천천히 지하실 계단을 올라왔다. 거리는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에 겨울 바람이 와 닿았다. 여기저기 창으로부터 전나무에 켜 놓은 불빛이 흘러 나왔고 때때로 집안에서 피리나 양철 나팔의 요란스런 소리와 거기에 섞여서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려 왔다. 거지애들이 떼를 지어 이 집 저 집으로 몰려다니며 계단의 난간에 올라서서 창 너머로 자기들에겐 소용없는 호화로운 방 안 풍경을 엿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때때로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째질 듯한 목소리가 이들 어린 손님들을 밝은 집안으로부터 어두운 길바닥으로 내쫓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현관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불리고 있었는데 소녀들의 맑은 목소리도 거기에 뒤섞여 들려왔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귀에는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거리에서 거리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숙집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층계를 올라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냄새며 고향의 크리스마스 날 어머니 방에서 맡던 냄새와 똑같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불을 켰다. 책상 위에 큼직한 소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끌러 보자 낯익은 갈색의 축하 케이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케이크에는 사탕으로 만든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엘리자벳의 솜씨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뜨개질로 짠 고급 하의와 손수건과 커프스를 싼 조그만 보따리,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엘리자벳의 편지도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우선 엘리자벳의 편지부터 뜯었다. 깨끗한 사탕 글자는 케이크를 만들 때 누가 도와 주었는가를 당신께 말해 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커프스의 자수도 놓았습니다. 오해 이곳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정말로 쓸쓸할 것 같군요.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9시 반만 되면 물레를 한 구석으로 치워 버린답니다. 당신이 여기 오시지 않는 겨울은 정말 쓸쓸해요. 게다가 당신에게서 받은 홍방울새가 지난 일요일에 죽어 버렸답니다. 나는 무척이나 을었어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새를 잘 보살펴 주기는 했어요. 그 조그만 새는 오후가 되어 새장에 햇빛이 비치기만 하면 언제나 울었답니다. 당신도 아시죠? 어머니는 그 새가 울면 못 울게 하느라고 가끔 보자기를 그 위에 하느라고 가끔 보자기를 그 위에 씌웠습니다. 이젠 방안이 한층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가끔 당신의 옛친구 에리히씨가 찾아와 줍니다. 언젠가 단신은 그 사람은 자기가 입고 있는 자색 외투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답니다. 그분이 문 쪽에 나타나기만 하면 나는 항상 당신의 그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이상해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어머니께 하시지 마세요. 어머니는 금방 화를 내실 거예요...내가 당신의 어머니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뭣을 드릴지 알아맞혀 보세요. 모르시겠죠? 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에리히씨가 지금 목탄으로 저를 그리고 있거든요. 벌써 세 차례나 모델이 되어야만 했답니다. 언제나 꼭 한 시간씩이에요.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내 얼굴을 익히게 하는 데 싫어서 죽을 뻔했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는데도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부리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베르너 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거라구요. 라인하르트.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군요. 옛날 얘기를 적어 보내기지 않으니 말예요. 나는 이따금 그것 때문에 당신 어머니에게 불평을 쏟아 놓지요. 그러면 어머니 말씀은 당신은 지금 너무 바빠서 그런 어린애 같은 짓을 할 틈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아요. 필시 무슨 다른 곡절이 있을 거예요. 라인하르트는 어머니의 편지도 읽었다. 두 통의 편지를 다 읽은 뒤에 찬찬히 접어 밀쳐 놓았다. 주체할 수 없는 향수가 밀려 왔다. 그는 잠시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길 잃은 나그네 갈 길 몰라 헤맬 때 길가에 선 어린 소녀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네! 그런 다음 책상으로 다가가서 돈을 꺼내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거리는 벌써 조용해졌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등불도 꺼져 버려 배회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쓸쓸한 거리에는 바람이 불었고 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들이 집에 모여 단란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제2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지하실 주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래쪽에서 바이올린과 칠현금을 타는 처녀의 노랫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그때 주점 문의 벨이 울리고 검은 그림자가 희미한 계단을 급히 올라왔다. 라인하르트는 집 그늘에 몸은 숨기며 빠른 걸음으로 거길 지나쳤다. 얼마 뒤에는 불이 켜진 환한 보석상에 들어가서 빨간 신호로 만든 조그만 십자가를 산 다음 다시 온 길로 돌아섰다. 하숙집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서 초라한 옷차림을 한 소녀가 어떤 집 문간에 서서 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보였다. 도와줄까? 하고 그가 말했다. 소녀는 아무 대답도 않더니 육중한 손잡이를 놓았다. 라인하르트가 이미 문을 열었다. 안될 걸. 하고 그가 말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 나를 따라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줄 테니. 그는 문을 다시 닫아 보리고 소녀의 조그만 손을 잡았다. 소녀는 아무 말없이 그를 따라 하숙집까지 왔다. 그는 나갈 때 램프를 그냥 켜 두었었다. 케이크를 줄게. 하면서 케이크를 되는대로 반쯤 집어서 소녀의 앞치마에 담아 주었다. 사탕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만은 주지 않았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거라. 어머니께도 나누어 드려야 한다. 소녀는 몹시 주저하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그런 친절은 처음이었기에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모양이다. 라인하르트는 문을 열고 소녀에게 불을 비춰 줬다. 소녀는 케이크를 갖고 참새처럼 계단을 뛰어내려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라인하르트는 난로불을 피우면서 먼지 낀 잉크병을 책상에 놓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와 엘리자벳에게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손도 안 댄 채 곁에 놓아두었으나 엘리자벳이 보내 준 커프스는 끼워 보았다. 그의 흰 셔츠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겨울의 아침해가 얼어붙은 유리창에 비쳐와서 맞은편에 걸린 거울에 창백하고 진지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을 때도 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고향에서 부활절이 되자 라인하르트는 고향으로 떠났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그날 아침으로 엘리자벳을 찾아갔다. 아름답고 훤칠한 한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을 때 그가 말했다. 많이 컸어. 소녀는 얼굴을 붉히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인사를 하면서 그가 잡은 손을 소녀는 살그머니 빼려고 했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소녀를 쳐다봤다. 이젠에는 소녀가 결코 그러지 않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엇인지 서먹서먹한 것이 끼인 느낌이었다. 그가 꽤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소녀를 찾았으마 그러한 상태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만 있게 되면 이따금 말이 막혔는데 그것이 그로서는 몹시 괴로워서 그걸 미리 막아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방학 동안 무언가 하나의 일정한 즐거움을 갖기 위해 엘리자벳에게 식물학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식물학으로 말하면 그가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몇 달 동안 열심히 연구한 과목이었다. 엘리자벳은 무슨 일이든 그의 말을 따르는데다 공부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꺼이 그 계획에 찬성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번씩 들이나 숲으로 식물을 채집하러 나갔으며 한낮이 되어 풀과 꽃으로 가득해진 녹색의 채집 상자를 집으로 갖고 돌아오면 라인히르트는 몇 시간 뒤에 다시 와서 그 공동의 채집물을 엘리자벳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그럴 목적으로 막 방에 들어섰을 때, 엘리자벳은 창가에 서서 전에 본 일이 없는 금박 새장에다 갓 꺽어 온 별꽃풀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새장에는 카나리아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며 엘리자벳의 손가락을 쪼고 있었다. 전에는 바로 거기에 라인하르트가 보내준 새가 있었던 것이다. 나의 불쌍한 홍방울새가 죽어 카나리아로 환생한 건가? 그는 쾌활한 기분으로 물었다. 홍방울새하면 저러지 않지. 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실을 자고 있던 엘리자벳의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 낮에 자네 친구 에리히씨가 그분의 농장에서 엘리자벳에게 보내 왔어. 어느 농장 말입니까? 아직 그것도 모르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한 달 전에 에리히씨는 임멘 호반에 있는 부친의 제2농장을 인수했지. 그런데 왜 제게 여태 그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죠? 아! 하고 어머니가 대꾸했다. 자네도 그 친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려주지 않더군. 그분은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젊은이야. 어머니는 커피를 끓이러 밖으로 나갔다.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에게 등을 돌린 채 조그만 새집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곧 끝낼 거예요. 라인하르트로부터 보통때와는 달리 대답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갑자기 이때까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고뇌의 흔적이 가득했다. 왜 그래요? 라인하르트 하고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내가? 하고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물으며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 슬퍼 보이는군요. 엘리자벳, 나는 저 노랑새가 싫단 말이야. 그녀는 기가 막힌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참 이상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그대로 맡기고 있었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다시 들어왔다. 커피를 마시고 나자 어머니는 물레를 향해 앉았고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벳은 옆방으로 들어가서 채집해온 식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꽃술의 수를 세기도 하고 잎이나 꽃을 곱게 펴서 종류마다 두 개씩 표본으로 말리기 위해 커다란 책갈피 속에 끼우기도 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조용한 오후였다. 근처에선 어머니의 물레 소리가 들려 올 뿐이고, 이따금씩 식물명을 중얼거리며 분류하는 소리와 엘리자벳의 신통찮은 라틴어 발음을 교정해 주는 라인하르트의 중얼거림이 들렸을 뿐이다. 은방울꽃이 없어졌어. 하고 채집물의 분류와 정리가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양피지 노트를 꺼냈다. 이 은방울꽃을 줄게. 하며 그는 반쯤 마른 은방울꽃을 꺼내며 말했다. 엘리자벳은 뭔가 가득 쓰여진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또 동화를 지었어요? 동화가 아냐 하며 그는 그 책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것은 시뿐이었는데 대부분은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울 정도의 길이였다. 엘리자벳은 한장 한장 들췄는데 제목만 읽는 것 같았다. [그녀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 [그들이 숲 속에서 길을 헤맬 때], [부활절의 동화에 부쳐서], [그녀가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 왔을 때] 등으로 거의가 그런 거였다. 라인하르트는 살피듯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겨 감에 따라 드디어 그녀의 맑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그것이 차차 얼굴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으나 엘리자벳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아무 말없이 책을 그의 앞에 놓았다. 그런 식으로 그 책을 돌려주지 마!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양철통 속에서 자색 풀잎 하나를 꺼냈다. 당신이 좋아하는 풀을 끼워 드립니다. 하며 그의 손에 책을 놓았다. 드디어 방학도 다 끝나 떠나야 할 아침이 되었다 엘리자벳은 우편마차가 있는 곳까지 전송하고 와도 좋다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았다. 우편마차의 정류장은 집에서 몇 마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문을 나서자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하고 그는 그 날씬한 아가씨와 나란히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지금부터 긴 작별을 고하기 전에 무언가 귀중한 것을 그녀에게 말해 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자신의 장래의 모든 가치라든지 행복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불안해졌고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늦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성 마리아 성당의 종이 벌써 쳤어요. 그래도 그의 걸음을 빨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엘리자벳, 앞으로 2년간은 만나지 못할 것 같은데.......그때 다시 돌아올 때도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 주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을 변호해 드렸어요. 하고 그녀가 잠시 뜸을 뒀다가 말했다. 나를 변호했다구? 누가 나보고 뭐라고 했길래? 저의 어머니가 그랬어요. 어젯밤, 당신이 돌아가신 다음에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당신 얘기를 했어요. 당신은 옛날만큼 그렇게 좋은 분이 아니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라인하르트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진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귀여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절대로 전보다 나빠지지 않았어, 그것만은 믿어 주겠지, 엘리자벳? 네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와 같이 바쁜 걸음으로 마지막 거리를 지나갔다. 작별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에는 점점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는 너무나 빨리 걸어서 그녀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였다. 왜 그래요, 라인하르트? 내게는 비밀이 있어, 아름다운 비밀이! 하며 그는 기쁨에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오면 그때 가르쳐 줄게.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우편마차가 있는 데까지 왔다. 마악 출발하려는 때였다. 다시 한 번 라인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안녕! 잘 있어, 엘리자벳! 지금 일을 잊지 말아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마차가 덜그렁거리며 시가지의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는 또 다시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돌아다봤다. 천천히 돌아서 가는 그녀를. 편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라인하르트는 연구를 함께 하는 친구를 기다리며 램프불 앞에서 책과 노트 속에 묻혀 있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그러나 막상 들어온 사람은 하숙집 아줌마였다. 편지가 왔습니다., 베르너씨! 하고 그 여자는 다시 내려가 버렸다. 라인하르트는 고향에 다녀온 뒤로 엘리자벳에게는 편지를 한 번도 쓴 적이 없었고 그녀로부터도 한 통의 편지도 받지 못했다. 이번 것도 그녀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라인하르트는 겉봉을 뜯어읽어 내려갔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네 나이 때는 해마다 모습이 다른 법이란다.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여기서도 여러 가지로 변한 일이 많았단다. 만약 평소의 내 생각이 틀림없다면 이 일은 아마 너를 괴롭게 만들게다 에리히가 마침내 엘리자벳에게서 승낙을 받았단다. 2월중으로 두 번이나 간청해도 안되더니 그녀도 단단히 결심히 섰던 모양이다. 드디어는 그렇게 했으니 말이야. 뭐니뭐니 해도 아직 어린 나이가 아니냐. 결혼식을 머지 않아 올릴 테지. 그렇게 되면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여기를 떠나게 될 것이다. 임멘 호 다시 몇 해가 지나갔다........따뜻한 어느 봄날 오후, 나무 그늘이 지 내리받이 좁은 숲길을 햇빛에 그을리고 기운 차 보이는 한 청년이 걷고 있었다. 진지해 보이는 회색 눈은 잔뜩 긴장한 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단조로운 길이 어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 눈치였으나 그러한 변화는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드디어 짐수레 하나가 천천히 그 길로 올라왔다. 어이! 여보세요 하고 그 청년은 짐수레를 따라오는 농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임멘 호수로 가자면 이 길로 가면 되는지요? 끝까지 똑바로 가십시오. 하면서 농부는 둥그런 모자에 손을 붙이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곳까지는 아직 멀었나요? 바로 코밑이죠.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못 돼 호수에 닿을 겁니다. 저택은 바로 그 옆이죠. 농부는 지나갔다. 청년은 나무 그늘을 따라서 한층 더 걸음을 재촉했다. 15분쯤 지나자 왼쪽으론 갑자기 나무 그늘이 끝나고 길은 산 위로 경사가 졌다. 그 경사면 아래부터는 백년이나 된 떡갈나무 가지가 이마를 겨우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가지 너머로는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햇빛을 받으며 전개되어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 호수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데 암청색 물이 햇빛을 듬뿍 받으며 녹색 숲에 둘러싸여 있고 오직 한쪽으로만 조망이 전개되었으나 그것도 마침내는 푸른 산으로 막혀 있었다. 맞은 편의 푸른 숲 속에 눈 같은 것이 깔려 있었는데 그것은 과수원이었다. 그 가운데 호수 언덕 위에 붉은 지붕의 흰 벽돌집이 우뚝 서 있었다. 황새 한 마리가 그 집의 연통에서 날아올라 윤무를 하듯 수면 위로 유유히 빙빙 돌았다. 임멘 호로군! 청년이 외쳤다. 이제야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거기에 버티고 서서 꼼짝도 않고 발 밑의 나뭇가지들 너머로 저택의 그림자가 아련히 수면에 넘실거리고 있는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또 걷기 시작했다. 길은 급한 경사가 져서 산을 내려갔기 때문에 나무들이 다시 그늘이 졌으며 그와 동시에 호수가 내려다 뵈는 조망도 가려지고 말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호수가 번쩍번쩍 빛나 보일 뿐이었다. 길은 다시 평평해지다가 오르막길이 되었으며 길 양쪽으로는 수풀이 없는 대신 잎이 무성한 포도밭이 길을 따라 길게 뻗쳐 있었고, 그 양쪽으론 꽃이 한창 만발해 있는 과수들이 서 있어서 꿀벌이 윙윙거리며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그때 자색 외투를 입은 당당한 사나이가 청년 쪽으로 걸어왔다. 그 사나이는 근처까지 와서 모자를 흔들며 명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서 오게나, 라인하르트. 잘 왔네, 잘 왔어, 임멘 호반의 농장까지! 잘 있었나, 에리히? 이렇게 환영을 해주어 고맙네 하고 나그네도 그를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가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정말 자네가 틀림없지? 하고 에리히는 옛날 동창생의 근엄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물론 그렇지. 에리히! 자네도 틀림없지? 전에 비하면 훨씬 쾌활해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 즐거운 듯한 미소가 에리히의 단순한 얼굴을 더욱 밝게 해줬다. 라인하르트 하고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 이후로 운이 좋았거든. 자네도 잘 알겠지만. 그러고는 손을 비비면서 즐거운 듯 지껄여 댔다. 놀랄 거야. 자네가 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테니. 놀라다니 ?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도대체 누가 놀란단 말인가? 엘리자벳 말일세. 엘리자벳이?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온다는 얘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나? 한 마디도 안했지, 라인하르트. 그 여자는 자네에 대한 것 생각지도 않아, 어머니도 그렇고. 내가 너를 편지로 부른 것은 전연 비밀로 해뒀어. 그만큼 기쁨이 커지도록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옛날부터 이런 식으로 남몰래 계획을 세우기 좋아했거든. 라인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길 오른쪽으로는 그 넓은 포도밭이 없어지고 대신 채소밭이 나타났다. 그 밭은 호수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었다. 때때로 황새가 내려앉아 채소밭 사이를 힘찬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어이! 손바닥을 치면서 에리히가 고함을 질렀다. 저 다리 긴 이집트 녀석이 또 완두콩을 쪼아 먹는군. 황새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새로 지은 건물의 지붕 위로 날아갔다. 그 건물은 채소밭 끝에 있는데 위로 매달아 몰린 복숭아와 살구나무 가지들로 뒤?혀 있었다. 저것이 주정 공장이야 하고 에리히가 말했다. 농장터는 작고하신 선친께서 새로 마련하셨고 살림집은 옛날에 조부께서 지으셨어. 그런 식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거지. 그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 공터의 양쪽은 농장터로, 뒤쪽은 저택으로 막혀 있었다. 저택의 양쪽으로 마당 담이 이어져 있고 그 뒤에는 우거진 수송 생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여기저기에는 접골목이 만발한 꽃가지를 들판 쪽으로 드리우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린 사나이들이 그 공지를 가로지르면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다. 에리히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할 일을 지시하기도, 일에 관한 것을 묻기도 했다.......잠시 후에 두 사람은 저택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고 냉랭한 현관이 그들을 맞이했는데 그 현관 끝에서 왼쪽으로 구부러지며 얼마 쯤 어두컴컴한 복도가 이어졌다. 거기서 에리히는 미닫이를 열고, 두 사람은 뜰에 접한 커다란 홀로 들어갔다. 그 홀은 무성한 나무가 맞은 편 창문을 가리고 있어서 양쪽은 어둑어둑한 녹색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창과 창 사이에는 양쪽으로열리는 창문이 두 개나 있어서 그곳을 통해 빛이 가득히 들어와 깨끗하고 정연하게 손질된 화단과 우뚝 솟은 나무 울타리, 그리고 뜰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 울타리는 똑바른 넓은 통로로 갈라져 있고 그 곳을 통해 호수뿐 아니라 멀리 건너편 물가의 숲까지 바라보았다. 두 친구가 안으로 들어서자 훈풍의 싱그러운 향기를 듬뿍 안겨 줬다. 뜰로 통하는 문 앞에 흰 옷을 입은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한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뿌리가 돋친 사람처럼 굳어져서 낯선 손님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았다. 손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라인하르트!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라인하르트!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그렇군요 하고 그도 입을 떼긴 했으나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막상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가슴 속이 아려 왔던 것이다. 그가 다시 그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몇 해 전 고향 거리에서 헤어질 때의 그 경쾌하고 나긋나긋한 모습 그대로 그 앞에 서 있었다. 에리히는 기쁨으로 얼굴을 반짝이며 문 쪽으로 물러섰다. 엘리자벳, 어때? 하고 그가 말했다. 설마하니 이 사람이 오리라곤 짐작도 못했겠지! 엘리자벳은 누이 같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친절해요, 여보. 하며 그녀가 말했다. 에리히는 그녀의 조그만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일단 라인하르트를 맞이한 이상에는 그렇게 빨리 놓아주지는 않을 테야. 오랜 세월 바깥 세상에 나가 있었으니 한 번쯤은 고향에 묻혀 봐야지. 좀 봐요. 얼마나 훌륭하게 변했는지 모르겠군. 엘리자벳의 불안해하는 시선이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너무 오랫동안 못 보았으니까 말이야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마침 그때 어머니가 열쇠를 팔에 걸고 문으로 들어왔다. 베르니씨! 하고 어머니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참으로 귀한 손님이 오셨군. 그런 다음 서로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며 대화는 막힘 없이 진행됐다. 여자들은 일을 시작했고 라인하르트가 다과를 들고 있는 동안 에리히는 단단한 해포석으로 만든 파이프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의 곁에 않아 얘기를 했다. 다음 날 라인하르트는 에리히와 함께 밭과 포도원 그리고 주정 공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어느 곳이나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들에서 일하든 공장에서 일하든 모두가 건강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한낮이 되자 가족들은 모두 뜰에 이어진 홀로 모였다. 그래서 그날은 주인의 배려로 모두 함께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전 중의 처음 한두 시간과 저녁 식사를 하기 몇 시간만은 라인하르트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수년 전부터 그는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가곡들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수집한 것을 정리하거나 가능하면 이 지방의 것도 새로 모아서 증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엘리자벳은 언제나 부드럽고 다정하게 에리히의 변함없는 염려를 겸허하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전에는 그렇게도 쾌활했던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조용한 부인이 되었을까 하고 라인하르트는 가끔 생각해 보았다. 이틀째부터 그는 저녁때만 되면 언제나 호반을 따라 산책을 했다. 길은 정원 바로 아래쪽으로 통해 있었다. 그 뜰 바깥쪽에 의자 하나가 높다란 백양나무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낙조의 벤치라고 불렀다. 거기에 앉으면 해가 지는 정경을 제일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는 어느 날 그 길을 걸어 산책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비를 만났다. 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아래로 잠시 피했으나 비는 금세 큰 빗방울이 되어 나뭇잎 사이로 떨어졌다. 그는 이미 흠뻑 젖어 버려서 마음을 굳히고 그냥 천천히 걸어가기고 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비는 점점 신나게 내렸다. 그가 마침 낙조의 벤치 가까이 왔을 때 희미한 백양나무 사이로 흰옷을 입은 부인의 모습이 보이듯 했다. 그 모습은 부동 자세였는데 그가 접근함에 따라 마치 누구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라인하르트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가 함께 정원을 지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그 모습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더니 어두운 옆길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화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엘리자벳에 대해 화를 낼 기분도 아닌 데다 틀림없이 엘리자벳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그녀에게 물어 본다는 것도 쑥스런 일이었다. 혹시나 정원 입구로 들어오는 엘리자벳과 마주칠까봐 그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홀에는 들르지 않았다. 어머니의 소원 그로부터 2, 3일이 지난 뒤였다. 그 시각에는 언제나 그렇듯 저녁때가 가까워 올 무렵에 가족들은 뜰에 모였다. 출입문은 모두가 열려진 채였으며 태양은 이미 호수 건너편의 숲 속으로 잠겨 버렸다. 사람들은 라인하르트에게 몇 편의 민요를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그는 그날 오후 시골에 사는 어떤 친구로부터 민요를 우편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가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 즉시 나타났는데 두루마리는 깨끗하게 청서되어 있는 두서너 장의 종이 같았다. 사람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엘리자벳은 라인하르트 쪽으로 앉았다. 닥치는 대로 읽어봅시다. 하고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저도 아직 들춰보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자벳이 원고를 폈다. 악보도 붙어 있군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불러 보세요,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는 먼저 티롤 지방의 민요를 두서너 번 읽었다. 그것을 읽으며 그 흥겨운 멜로디를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명랑한 기분이 그 조그만 모임을 에워쌌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노래를 대체 누가 지었을까? 하고 엘리자벳이 물었다. 무슨 소리를! 에리히가 대답했다. 들으면 알지. 직공이라든지 이발사라든지 그러한 쾌활한 사람들이 지어낸 거야.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이런 노래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자연히 생겨나는 거지. 마치 거미줄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세상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나중엔 사방에서 일제히 불리워지는 거야. 우리 자신의 거짓 없는 번민이라든지 행동도 이러한 노래 속에서 찾아낼 수가 있지. 마치 우리가 힘을 합해 만든 것 같이. 그는 다른 종이를 꺼냈다. 높은 산봉에 올라서....... 난 그 노래를 알아요. 하고 엘리자벳이 소리를 질렀다. 저도 함께 부를 테니어서 불러요, 라인하르트! 그래서 두 사람은 인간에 의해서 생각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불가사의한 그 멜로디를 함께 불렀다. 테너에 맞추어 부르는 엘리자벳의 음성은 다소 알토에 가까웠다. 어머니는 그사이에 열심히 바느질을 계속했고 에리히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라인하르트는 묵묵히 종이를 옆에 놓았다. 마침 호반에서 낙조의 정적을 뚫고 가축 떼의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자기도 모르는 결에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맑은 소년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높은 산봉에 올라서 깊고 깊은 계곡을 굽어보며....... 라인하르트는 미소를 지었다. 들었지요? 저렇게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거야. 저것은 부근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예요. 하고 엘리자벳이 말했다. 그래요. 하고 에리히가 끼여들었다. 저것은 양치기 카스파르야. 소를 몰고 돌아오는 길이군. 그들은 잠시 동안 그 방울 소리가 윗 농장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것은 태고의 곡조지 하고 라인하르트는 말했다. 저런 곡조는 숲 속 깊숙히 잠들어 있는 거지. 누가 그걸 찾아냈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실 걸. 그는 새 종이를 꺼냈다. 벌써 날은 어두워졌다. 호수 건너편 숲에서 새빨간 저녁놀이 비누거품처럼 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종이를 펴놓았고 엘리자벳은 그 한족 끝에 손을 올려놓고 함께 그걸 들여다보았다. 라인하르트가 낭송했다. 다른 남자를 잡으라고 어머니가 바라셨네 마음속에 간직했던 그대를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셨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내 마음. 그러시지 말기를 어머니께 얼마나 애원했던가 허나 이제 죄가 되었으니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 사랑과 기쁨 대신에 맛보는 괴로움 아아 그럴 줄 알았더라면 말라 버린 들판을 헤매면서 동냥하는 아이라도 될 것을. 그걸 읽는 동안에 라인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종이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낭송이 끝나자 엘리자벳은 조용히 의자를 뒤로 밀어 놓고 말없이 뜰 아래로 내려갔다. 어머니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에리히가 따라가려 하자 어머니가 엘리자벳은 밖에서 일이 있어요, 하고 말했으므로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밖은 밤이 뜰에도 호수에도 점점 쌓여 갔고 부나비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기세를 부리면서 열려진 문 앞으로 덤벼들었으며, 그 문으론 다시 꽃향기가 흘러들어 왔다. 호수 쪽에서 개구리 소리가 들려 왔다., 창문 아래쪽 뜰 깊숙한 곳에서는 밤꾀꼬리들이 서로 화답을 하고 있었다......달빛은 높은 나무뜰로 내비치고.......라인하르트는 지난번에 엘리자벳의 희미한 자태가 사라진 나무 길 근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원고를 모으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집을 나서서 물가로 내려갔다. 숲은 말없이 서서 검은 그림자를 멀리 물 위로 던지고 있었다. 호심은 몽롱한 달빛을 받으며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때때로 나무가 흔들리며 아련한 소음이 들렸는데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닌 여름밤의 한숨이었을 뿐이다. 라인하르트는 언덕을 따라 걸었다. 언덕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한 송이의 수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갑자기 그 수련을 가까이 에서 보고 싶은 충동으로 그는 옷을 벗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얕았으며 뾰족한 풀과 돌들이 발바닥을 찔렀다. 아무리 가도헤엄칠 정도로 깊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발이 꺼지면서 머리까지 푹 파묻혔다. 물 위로 다시 떠오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런 다음 손발을 움직여 빙빙 헤엄쳐 돌면서 조금 전 물에 빠진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수련이 다시 눈에 띄었다. 수련을 반짝이는 커다란 잎 사이에 외로이 누워 있었다. 그는 천천히 헤엄쳐 들어가며 간간이 팔을 들어올리면 떨어지는 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꽃과의 거리는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아다볼 때 언덕은 먼 뒷면으로 자꾸만 흐려져 갈 뿐이었다.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힘을 내어 같은 방향으로 헤엄을 계속했다. 마침내 은빛 꽃잎을 하나하나 달빛 속에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꽃 가까이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몸이 그물에 휘감긴 느낌이었는데 물 밑에서 자라난 일렁이는 꽃줄기가 그의 팔다리에 엉겨 붙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은 컴컴하게 주위에 펼쳐 있었고 뒤에선 물고기가 뛰노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갑자기 남모를 곳에 와 있다는 불안이 엄습해서 그는 힘껏 달라붙은 풀을 잡아떼며 숨을 헐떡이면서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다. 언덕에 올라서서 다시 호수를 돌아보자 수련은 먼저와 같이 멀리 검은 심염 뒤에 외로이 떠 있었다. 그는 옷을 입은 다음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왔다. 뜰에서 홀을 지나며 보니 에리히와 어머니가 다음 날 떠나기로 예정한 나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밤늦게 어딜 갔다 오나? 하고 어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저 말이에요? 하고 그가 대꾸했다. 수련을 찾으려 했는데 제대로 안 되는군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하고 에리히가 말했다. 도대체 수련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옛날에 한 번 그 꽃을 본 적이 있었지.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하지만 벌써 먼 옛날 얘기라서. 엘리자벳 다음 날 오후,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벳은 호수 건너편 숲을 지나 삐죽이 나온 언덕을 산책했다. 엘리자벳은 에리히로부터 부탁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 어머니가 없는 동안 이 근처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 특히 건너편 언덕에서 집 쪽이 바라다 보이는 장관을 라인히르트에게 소개해 주라는 부탁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저기 열심히 돌아다녔다. 마침내 엘리자벳은 피로에 지쳐 나무 그늘에 앉았고 라인하르트는 그녀와 마주 서서 나무에 기대러 섰다. 그때 숲 속에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여왔다. 갑자기 이런 모든 일리 벌써 옛날에도 한 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인하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딸기나 따러 갈까요? 하고 그가 물었다. 딸기철도 아닌데요. 하고 엘리자벳이 대꾸했다. 하지만 곧 돌아올 텐데요. 엘리자벳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고 두 사람은 산책을 계속했다. 걸어가면서 그의 시선이 몇 번이고 그녀 쪽으로 집중됐다. 그녀의 걷고 있는 모습이 옷 때문에 마치 사뿐사뿐 날으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여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걸은 뒤에 쳐져 그녀의 모습을 송두리째 눈 속에 넣으려 했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히드가 무성한 탁 트인 공터로 나왔다. 라인하르트는 허리를 굽혀 땅 위에 자란 풀을 뜯었다. 그가 다시 허리를 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번민의 표정이 스쳤다. 이 꽃 알겠어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에리카에요. 가끔 숲 속에서 따 본 적이 있어요. 난 집에 낡은 노트를 한 권 갖고 있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 전에는 거기다가 시와 노래를 적었는데 이젠 그 일도 중단하고 말았죠. 그 노트 속에 히드가 한 잎 끼여 있었어요. 이젠 말라 버리고 만 것이지만 그것을 내게 준 사람이 누군지도 알고 있나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녀가 그를 쳐다봤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벳! 저 푸른 산너머에 우리들의 청춘이 있었지요. 그 시대는 이젠 어디로 갔을까? 그것 뿐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그대로 나란히 호수 쪽으로 내려갔다. 날은 무더웠고 서녘 하늘엔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 소나기가 올 것 같아요. 하고 엘리자벳이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라인하르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보트가 있는 데까지 언덕을 따라 급히 내려갔다. 호수를 건너는 동안 엘리자벳은 뱃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노를 저으면서 그는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해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져 그녀의 손위에 머물렀다. 그 하얀 손은 그녀의 표정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언가를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 손에서, 밤마다 번민하는 가슴 위에 놓여지는 아름다운 여심의 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은밀한 고뇌의 아련한 흔적을 보았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손위에 닿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자 손을 뱃전에서 살그머니 떼어 물 속으로 미끄러뜨렸다. 마당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숫돌을 팔러 다니는 마차 한 대를 만났다. 검은 머리칼을 길게 풀어헤친 사내가 열심히 수레를 밟으며 집시의 멜로디를 입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었고, 수레에 붙들어 맨 개가 숨을 헐떡거리며 그 옆에 가로누워 있었다. 현관에는 딱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의 소녀 하나가 누더기를 몸에 걸치고 서 있다가 엘리자벳 쪽으로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라인하르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엘리자벳이 그보다 먼저 급히 지갑 속을 뒤져서 있는 대로 그 소녀의 손안에다 털어 주었다. 소녀는 급히 몸을 돌려 버렸다. 그 소녀가 층계를 올라가면서 흐느껴 우는 소리를 라인하르트는 들었다. 그는 소녀를 만류하려다가 생각을 고치고 계단 곁에 멈춰 섰다. 소녀는 먼저처럼 얻은 돈을 손에 쥔 채 꼼짝도 않고 현관에 서 있었다. 또 무엇을 원하지? 하고 라인하르트가 물었다. 거지 아이는 소스라지게 놀랐다. 아무것도 싫어요. 라고 말하더니 그를 향해 고래를 돌려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뭐라고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것은 이미 소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팔짱을 낀 채 앞뜰을 가로질러 저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죽음뿐, 아아 죽음뿐 오직 나 혼자 떨어져서. 옛날에 들었던 노래가 그의 귓전에 울려왔다. 그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나 그것도 그 순간뿐이었고 그는 몸을 돌려서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일을 해보려고 앉았으나 머리가 조금도 정돈되지 않았다. 한시간 가량이나 헛되이 애를 쓰다가 안방으로 내려갔다. 거기는 아무도 없었고 그저 냉랭한 녹색의 어스름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엘리자벳의 재봉틀 위에는 그녀가 오후에 목에 감고 있었던 빨간 리본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으나 가슴이 메는 듯 해서 제자리에 놓아 버렸다. 아무리 해봐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호수로 내려가 보트를 풀어 건너편 언덕으로 노를 저어 가서 조금 전에 엘리자벳과 거닐던 길은 다시 한 번 그대로 걸어 보았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마당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 마부를 만났다. 나들이 갔던 사람들이 방금 돌아온 참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에리히가 뜰을 왔다갔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리로 가지 않고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얼른 계단을 올라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창가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수송나무 울타리에서 울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듣는 체했으나 들려 오는 것은 자신의 심장 고동뿐이었다. 층계 아래에서는 모두가 잠들어 밤은 점점 깊어만 갔으나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몸을 일으켜 창문에 기댔다. 나뭇잎 사이로 밤안개가 내리고 밤꾀꼬리는 이미 울음을 그쳤다. 밤하늘의 짙은 청색이 점차로 동쪽에서부터 시작되는 희미한 미광에 쫓기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서 라인하르트의 달아오른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첫 종달새는 환성을 울리면서 하늘을 날아오르고……. 라인하르트는 느닷없이 뒤를 돌아보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손으로 더듬어서 연필을 찾았다. 그걸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아 한 장의 백지에다 몇 줄 갈겨 썼다. 다 쓰고 나서는 모자와 단장을 집어들고 종이는 거기다 둔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현관으로 내려갔다. 새벽의 여명이 이직 집 안 구석구석에 남아있고 커다란 고양이가 짚방석 위에 앉았다가 그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내민 손에 털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바깥 뜰에서는 참새들이 나뭇가지에서 떠들어대며 이미 날이 밝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때 2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구인지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엘리자벳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뭐라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젠 안 돌아오시겠지요? 하고 드디어 그녀가 말했다. 알아요. 거짓말을 해도 알아요. 이젠 절대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죠? 그래요. 이젠 절대로 안 와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힘없이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현관을 지나 대문 쪽으로 나섰다. 그녀는 꼼짝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나서며 그녀 쪽으로 팔을 쳐들어 보이다가 결연하게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밖은 어디에나 상쾌한 아침빛에 싸여 있고 거미줄에 방울진 이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는 조용한 저택이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앞으로는 크고 망망한 세계가 전개되었다. 만년 이미 유리창으로 달은 비쳐오지 않는다. 주위는 어두워졌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손을 포갠 채 안락의자에 기대앉아서 정신없이 방안을 둘러본다. 그를 에워싼 저녁의 어두움이 그의 눈앞에서 차차넓은 호수로 변해 간다. 시커먼 물이 점차 깊게 멀리 멀리로 펼쳐지고 노인의 눈에는 거의 다다를 수 없으리만큼 먼 수면에, 넓은 잎 사이에 끼인 흰 수련이 외로이 떠 있다. 방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방안에 비쳐 들었다. 잘 왔군, 브리키테 하고 노인이 말한다. 등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아 주게나. 그런 다음 그는 의자를 책상 쪽으로 당겨 놓고 거기에 펼쳐진 책들 가운데 한 권을 집어든다. 그리고 일찍이 청춘의 온갖 심혈을 쏟았던 연구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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