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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2주)
그리스도의 길
신34:1~12; 살전2:1~8; 마22:34~46
오늘 우리는 구약의 말씀으로 신명기 마지막 장(34장)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모세가 죽음을 맞고,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남은 사명을 넘겨주는 장면입니다. 이 장으로 구약의 첫 번째 두루마리인 율법서(토라)가 끝이 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원에 모여 있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의)출애굽의 전체 여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중에 두 번의 “머무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출애굽해서 얼마 안 되어 시내산에 도착해서 2년간 머물렀고, 또 한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그러니까 출애굽 후 거의 40년이 흐른 후에)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원에서 머물렀던 일입니다.
40년 광야 생활 중에 이 두 번의 머무름은, 율법서 전체(창세기~신명기)에서 볼 때는 매우 중요한 단락이 됩니다. 첫 번째 머무름인 시내산에서의 머무름은 출애굽기19:1절부터 민수기10:10절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절반 이상, 레위기 전체, 민수기도 거의 절반 가량 이어지는, 분량 면에서 율법서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긴 단락입니다. 막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 모아놓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내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스굴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19:4~6)
이 선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대헌장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나의 스굴라”(특별한 보물), “나에게 속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전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여기서 나오는 말과 언약은 그 뒤에 이어지는 십계명과 다른 모든 법규들을 일컫습니다.(아까 말씀드린, 출애굽기 절반 이상, 레위기 전체, 민수기 거의 절반 가량) 이 법규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스굴라와 백성으로 묶어두기 위한 조건절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조건”이라기보다는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입니다.
40년의 광야생활 중에 두 번째 머무름은, 모압평원에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들어가려는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모압평원까지 도착합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출애굽 여정을 회고합니다. 출애굽 여정만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받은 법(말과 언야)을 다시 알려줍니다. 이 회고록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신명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사귀는 더 구체적인 방법을 다시 알려줍니다. 그것은 “순종하라”(“들어라”, <쉐마>)와 “기억하라”(<쯔콜><웨짜칼타>)입니다. “듣고 기억하기”! 이것은 신명기의 두 키워드입니다.
여러분, 출애굽 여정에서 이 두 번의 머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율법서는 시내산의 한 번의 머무름으로 부족했던지, 모압평원에서 두 번째 머무름을 통해 다시, 거듭,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무엇을요? 하나님의 스굴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법전 형태로 나타나 있지만, 이것은 밖에서 오는 규율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 내면에 말씀하시는, 함께 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초대이며, 사귐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의 머무름을 통해 이 초대를 듣고 있습니다.
잘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이목을 끄는 소리들이 외부에서 그리고 우리의 내부에서 조차 크게 들립니다. 그래서 잘 듣지 않으면, 잘 기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초대는, 목자의 휘파람 소리는 금방 사그러들고 맙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멈춰야 하고 머물러야 합니다. 멈춰야 보이고 머물러야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실패한 이유는 엄청나게 많은 세상의 정보와 소리들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잘 듣고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이것을 “우상을 쫓아갔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따라간 것입니다. 환영(illusion)을 실재(reality)로 알고 따라간 것입니다.
두 번째의 머무름 동안, 긴 회고와 설교를 한 후에 모세는 모압평원에서 생을 마칩니다. 모세는 모압평원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줄 땅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요단 계곡을 따라 펼쳐진 요단 동편과 서편, 즉 가나안 땅 전체를 본 것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 전체를 본 사람은 모세 밖에 없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는,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이는 모세의 죽음을 무덤으로, 묘비로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 나이가 120살이었으나,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표현을 잃지 않았고, 색깔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했다(생기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고 말씀하신 사람이며, 또 주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놀라운 기적과 기이한 일을 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는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전승들은 모세가 이스라엘에서 어떤 인물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종종 갖는 이미지로, 그저 외적으로 돌판을 전해준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돌판을 전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머물러 말씀을 들었고(그는 직접 시내산 위까지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머물러 말씀을 반복해서 전해 준(기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듣고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화하여 다시 들려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를 보면, 바리새파 사람 중에 율법교사 하나가 나와서,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 앞의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오 오직 한분이시다”. 모세가 모압평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팔에 이마에 붙이고 다니고, 문 입구에 두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시는데, 바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레위기의 말씀을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스스로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전해 준 율법과,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시 요약해 준 두 계명은, 사실 두 계명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계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지나오며 새겼던 하나님의 스굴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되는(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 의식을 갖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서 후반부에 또 한번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앞에서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마쉬아흐”(메시야)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이스라엘을 회복할 사람”이었고, 그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페르시아, 헬라, 로마) 일종의 식민통치를 받아왔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셔서 나라를 회복해주기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다윗의 자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편110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런데 실은, 다윗이 메시야(그리스도)를 향해 “나의 주인님”(아도니)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기는 좀 논리적인 복잡한 해석이 필요한데,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후손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너희들의 큰 조상(다윗)보다도 더 먼저 있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요8:58)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 말씀이 알려주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메시야)는 어떤 특정한 이름이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계명,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분,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신 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런 의식에 이른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신적인 의식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황송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이런 의식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런 의식에 이르는 길이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경험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미 오래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 잘 압니다. 그리고 실제로 추상적인 얘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물이 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아들, 딸)이 되는 길(다시 말해, 그리스도 되는 길)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 전체를 멀리서 바라보는 특권을 누렸지만, 우리는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가 사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으로 들어가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과 불행에만 마음이 쏠릴 수가 있습니다. 그 전체는 믿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못생긴 돌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놀러 와서 예쁜 돌을 골라갑니다. 선택받지 못한 못생긴 돌은 슬펐습니다. 좌절감에 울고 있는 못생긴 돌에게 그 위를 불고 있던 하늬바람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못생긴 돌 때문에 시내가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는지. 너희는 몰라, 이 높은 데서 보면 알 수 있지.” 오래 전에 보았던 이현주 목사님의 동화였습니다. 그 못생긴 돌은 그저 별개의, 한 개의 작은 돌맹이가 아니라, 긴 시내를 이루는 시내의 일부, 아니 반짝거리는 시내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 돌맹이는 자신이 못생긴 돌맹이라 아니라, 시내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더 큰 자기, 즉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은, 어렵고 무겁고 무서운 족쇄가 아닙니다. 오늘 모세는 그것을 밖에서 온 족쇄로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부름, 사랑의 초대로 들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 전체에서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습니다.” 그의 인생 후반부는 쇠락해가는 노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그 가슴에 품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썼다고 하는 시편90편에서 모세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시90:12)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놀이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자라게 하는 놀이감입니다. 삶이라는 하나님의 놀이, 그리스도의 놀이에 참여하는 디딤돌이요, 장난감입니다. 그것은 가지고 놀면서, 나도 모르게 지혜와 키가 자라는(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자라나는), 장난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족쇄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이, 그리스도의 놀이에 참여하는 장난감이 되려면,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의식의 확장이라면, 이웃사랑은 우리의 외면을 넓히는 의식의 확장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한번도 보지 못한 가나안 땅 전체를 향하여 순수한 믿음으로 승복하여 나가는 “무지의 여정”이라면, 이웃사랑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분명한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희망을 가지고 자유롭게 나아가는 “공감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이 두 방향으로 확장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방향은 반대 방향으로 나가가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흐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확장되라는 소명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혼자서 도 닦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지체들과 더불어 지체들을 통하여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이터를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 예배공동체에 잘 붙어 있으십시오. 우리 기도모임에 깊이 참여하십시오. 말씀을 묵상하고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십시오. 우리 교회라는 장을 통해 사람을 만나십시오. 사람 만나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래서 공동체를 더 깊이 경험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의식을 넓히는데 마음을 쓰십시오. 공감과 연대를 경험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남은 시간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