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부대기
홍범도장군흉상
김좌진장군흉상
지청천장군흉상
지도
지도를 보면, 청산리 및 봉오동 등의 골짜기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흡하나마 당시 독립군이 어떻게 지리적인 조건을 잘 활용하였는지
떠올려볼 만합니다.
아쉬운 것은, 청산리 전투에서 등장하는 구체적인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와
주변 지형을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몇 차례에
걸쳐서 현지 답사를 하고, 상당기간 연구를 해야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밖에, 작은 강들과 당시의 도로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예를들면, 화룡현 삼둔자에는 '월신강'이라는 강이 있는데, 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만강의 지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용정시에 흐르는 해란강 역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쉽네요.
하지만, 생생하게 지형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지도들은, 1985년 국방부 편찬 '독립군 항쟁사'에 나오는 그림들입니다
일본은 1920년에 이미 4개의 영사관 분소(★)를 설치하였고, 영사관 및 일본인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수천명 수준의 경찰 병력을 투입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간도 지역에 대한 권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1920년에 서대파 지역에서 군사 훈련과 부대 정비를 완료한 김좌진 부대는,
중국군의 토벌 행동에 대하여 사전 양해를 받고, 근거지 이동을 실시합니다.
또한, 일본군 침입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청산리 쪽으로 향하는 이도구 지역까지
이동하게 되죠.
일본군의 '만주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에 따른 작전 행동을
도시한 그림인데요.'차단 행동 부대'는 외곽을 포위하는 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토벌 행동 부대'는 나남에 사령부를 둔 19사단을 3개 지대로 분할하여
삼림 지대의 무장 독립군 게릴라를 수색 소탕 섬멸하는 작전을 펼치게 되는데요.
특히 아즈마 지대(동지대)와 대부분의 중요한 교전을 실시하죠.
독립군은 전술적으로 아주 현명하게 행동한 것 같습니다.
즉, 일본군 포위망에 대하여 신속한 기동으로 빠르게 지역을 이탈하였고,
또한 일본군 전체와 대적하지 않고 특정 부대를 철저하게 두들겼죠.
가만히 보면, 일본군의 실질적인 토벌 행동 부대 전투력을 1/3에 대해서만
교전한 것입니다.
후대의 핀란드 쏘티 전법과 비슷하게도 보입니다.
특히, 일본군은 수색을 위하여 부대가 필연적으로 분산되게 되어 집중의
효과도 없으며, 일본군의 수색 이동 속도는 독립군에 비하여 너무 느립니다.
또한 일본군 자료를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밀정을 침투시킨 정도의 정보
활동이 있을 뿐, 수색 행동을 실시 할 때 첨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일본은 전통적으로 육군 전술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국가인
것 같습니다.

일본군을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하여 백운평 및 봉밀구 전투를 실시하는 상황의 지도인데요.
일본군은 철저하게 도로를 연하여 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독립군은 능선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가죽 부츠를 군화로 제식 채용하고 있었는데, 가죽 부츠를 신고 산악 전투를 하겠다는 것은 좀 멍청하다고 할 수 있겠죠.
독립군은 미투리(짚신)을 적극 활용하여 산악 전투에서 더 좋은 기동성을 확보하였음을 기억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운평 전투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 형성 속도보다 더 빠르게 교전
지역을 이탈, 어랑촌 지역으로 가죠.
하룻밤의 야간에 30km 정도의 산악을 주파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유격전에 있어서 체력과 지형 숙달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랑촌 인근의 874 고지를 선점한 김좌진 부대의 경우도 역시 적절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좌진 부대가 874고지를 선점하기로 신속하게 결단 한 것은 일본군과
간발의 차이었고, 또한 일본군 주력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2시간 정도를
신속 방어 진지 구축에 사용한 것도 탁월한 행동인 것 같습니다.
김좌진 부대는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6개월 정도의 속성 훈련으로
양성되었는데, 이정도의 일사분란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투의 승패를
떠나서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 이곳 어랑촌 전투가 김좌진의 지휘 능력이 가장 빛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1 천수동에서 일본군 척후 기병 중대를 때립니다.
2 일본군 주력이 천수동에 쇄도할 것을 예상하고, 인근의 874고지를 최단시간으로 선점합니다.
3 2시간의 여유를 낭비하지 않고, 방어 진지 구축에 최대한 활용합니다.
김좌진 부대는 전날부터 전투를 하면서 계속 이동에 이동을 계속 하였으며, 30km 행군을 수행한 직후였죠.
연이어 계속된 어랑촌 전투는 하루종일 수행된 대규모 전투였는데,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보면, 정말 정예 병력이었음을 바보가 아니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랑촌 전투 이후에, 독립군은 곧바로 지역을 이탈하는데, 이번에는 고동하
강변 도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볼 때,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일동안 계속되는 전투와 급속 행군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극한적인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한계치까지 최대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습니다.
외부의 보급과 지원, 충원 병력 및 예비대가 전혀 없는 것이 바로 게릴라입니다.
더 이상의 지속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것 보다는, 최대한 적에게 타격을 가하고
전투 지역을 신속하게 이탈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신문을 보면, 당시 대원들의 체력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
너무 배가 고파서 전투 도중에조차 식량을 구할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되어
있군요..어랑촌 전투 이후에, 독립군은 곧바로 지역을 이탈하는데, 이번에는
고동하 강변 도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볼 때,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산리사진
요약
1920년 10월 10∼12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 허룽현[和龍縣:三道溝]
청산리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의
3차에 걸친 전투에서 5만의 왜군을 대파한 싸움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琿春]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張鼓峰)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羅南)의 제21사단이 도문강(圖門江)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滿鐵)의 수비대가 쑹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하여 3면으로 북로군정서군을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때문에 대일(對日)관계에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근거지를 옮겨 장백산(長白山)으로 입산하여 낭림산맥(狼林山脈)을 타고 게릴라전을 펼칠 계획이던 북로군정서군은 1,500명으로 편성된 전투대대인 제2제대(梯隊:李範奭 지휘)와 비전투요원 1,000명으로 구성된 제1제대(김좌진 총사령관 겸임 지휘)로 하여금 180량의 치중차(輜重車)를 이끌고 대이동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장장 80리의 골짜기에 100m 내외의 밀림으로 자연성을 이룬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로 제대를 진출시켜 우진(右陣:李敏華 지휘)·좌진(左陣:韓根凉 지휘)·중우진(中右陣:金勳 지휘)·중좌진(中左陣:李馭成 지휘)의 기습포진을펴고 적을 기다렸다. 10월 10일 아침, 적의 척후가 나타나 식은 말똥을 만져보고 아군이 이 백운평을 지나간 지 오래된 것으로 오인,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선두로 기마대·보병·공병의 1만 혼성여단이 골짜기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적이 함정 속으로 다 들어올 때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이범석이 쏜 총이 전위사령을 거꾸러뜨림과 동시에 공격을 퍼부어 3차로 적의 부대가 몰려들 때까지 적 2,200명을 사살하고 아군 20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받은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기전 태세에 들어가자, 아군은 주력 부대가 그대로 백운평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밤 사이 120리를 강행군하여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이어 아군은 시마다[島田]가 지휘하는 120기병 중대가 한국인 촌락인 천수평(泉水坪)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집단병력을 투입해서 도망자 4명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고 시마다 중대장이 가노[加納] 연대장에게 보내는 정보문서를 입수, 19사단의 2만 병력이 어랑촌(漁郞村)에 있음을 알고 기선을 제압,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馬鹿溝)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만 2주야에 걸친 혈전을 통하여 2,000명의 아군 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해 2만의 적병 중 1,000여 명을 전사케 하고 90명의 아군 전사자를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5만 병력을 2,500명으로 맞아 3,300명을 죽인 청산리 3차의 싸움은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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