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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0:1-10. 신앙인의 삶을 위한 지혜. 2024. 8. 11.
마12;1-12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는데,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예14절에 안식일 날 회당에서 손 마른 자의 손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안식일은 어떤 것인가?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참 믿음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날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줍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논쟁의 장소에서 이탈하여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을 했다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바리새인의 잘못된 시각과 불평에 대한 대응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시각과 불평 앞에서 어떻게 대응을 하고, 어떻게 바르게 가르쳐 주고, 어떻게 권면해야 하느냐? 의 문제입니다. 가르치심과 치료하심과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외부의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예수님의 하실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로 오신 목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내용이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사건과 일들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관계를 풀어가는 지혜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명분을 내 세워 일과 공동체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합니다. 여건과 환경과 관례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전통과 관습이 그렇게 적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고자하는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이루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계획된 내일을 열어가며, 어떻게 성공시대를 만들고, 어떻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까? 답은 예수님께서 하신대로 하시면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적용을 하고 실천을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목표 앞에서 힘 있게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관계 속에 있든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반대하는 몇 명의 사람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관습과 전통과 규칙을 말하는 사람을 너무나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반대하고 불평하고 지적하는 환경과 여건과 관습이 아니라 말없이 회복시키고 세워 나가는 일에 성원하고 지지하고 함께하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밀어주신다는 것을 신앙가운데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아는 것!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아는 것, 그 것을 위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안목이고,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어떤 자세가 되어야합니까? 오늘 날, 신앙인들이 감당해야 될 신앙인의 자세와 정신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학생이면 학생이 가져야 할 자세와 태도가 있고, 부모이면 부모의 자세와 태도가 있고, 스승이면 스승의 자세가 있습니다. 신앙인이면 신앙인의 자세와 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이 신앙인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시각과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논쟁가운데 예수님의 대응이 주목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인으로서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가? 삶의 특징 4가지를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어떤 자세와 태도일까요?
1.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1절에 죽은 파리가 향 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 향기로운 기름에 악취가 나는 것이 죽은 파리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와 존귀의 귀중함이 작은 우매함 때문에 상실된다고 합니다. 큰 실수와 큰 잘못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조그맣고, 어리석은 행동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성공과 실패는 어디서 오나요? 지극히 작은 것에서 차이가 납니다. 진실과 거짓은 크게 차이가 납니까? 그런데 진실과 거짓은 조그만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이 거짓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갑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인간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작은 차이입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도 결정적인 때에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회개의 차이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작은 일 같아도 그 결과는 크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왕의 모습은 어디서 구별이 됩니까? 차이로 말하면 다윗이 훨씬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의 미래는 문이 닫힙니다. 왜 그럴까요? 작은 일에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이 인생의 미래를 바꿀 수 있고, 조그만 일이 내일을 예측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작은 일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왜 어려움을 당합니까?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작은 관심에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보편적으로 잘하는 이런 실없는 말은 조금만 기다려. 내가 호강시켜 줄게. 그러면서 가정을 위한 작은 일과 작은 관심에 소홀히 합니다. 여러분, 큰 선물과 큰 액수의 것을 상대방에게 주어야 만족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담긴 선물은 작은 선물이라도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담은 선물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주 풍요롭게 합니다. 작은 관심과 작은 것의 중요성을 항상 기억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앙뿐만 아니라, 건강도 그렇습니다. 행 4:10-11.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아무 쓸모없다고 버린 성전 미문에 앉은 사람이 너희 앞에 당당하게 존귀한 자로 서 있고, 너희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버린 예수님이 예배 공동체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일도 감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 한 므나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수건에 쌓아두고, 흙속에 묻어 둘 것이 아닙니다. 한 달란트와 한 므나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기억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소경 바디메오와 수가 성 여인 같은,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영혼에 대하여 작다 하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온 정성을 다하여 감당을 했습니다. 속담도 있습니다. 작은 것에 소홀히 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습니다. 시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어나는 모든 관계와 일과 사람의 모든 작은 것이라도소홀히하지않는분들이되시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합니다 2. 지혜는 항상 선함과 사랑의 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무슨 말일까요? 지혜는 항상 좋은 편에 있습니다. 선함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항상 좋은 편과 그렇지 못한 것을 결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신앙 안에서 좋은 편에 서기 위해서 노력하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같은 사실을 놓고도 항상 좋은 편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해석을 하고, 말씀 가운데 해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나에게 일어난 사건과 일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같은 사건과 같은 일과 같은 사람을 놓고서 해석이 다릅니다. 그래서 존경과 함께 갈등을 하고 반목을 합니다. 전12:12절.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이 말씀은 언뜻 보면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는 학생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해석을 합니다. 많이 공부하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공부하지 말고, 책을 읽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되, 책을 읽되 헛된 방식으로 하지 말고 바르게 묵상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여 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언어와 사건과 사람과 일, 그리고 사역과 사업의 그 어떤 것일지라도, 삶과 연결된 그 어떤 것도 해석할 때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이 일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위대함을 꿈꾸게 하실까? 이 사람을 통해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려는 것일까? 하나님의 섭리적 해석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것들 중에서 어느 한 편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는 이해의 편이고, 또 하나는 오해의 편입니다.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합니까? 당연합니다. 이해의 편을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목회자가 상처를 잘 받아 오해를 잘하면 얼마나 오해할 일이 많겠습니까? 그러면 성도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목회자니까 당연히 이해해야 하고, 성도는 오해를 잘해도 좋습니까? 아닙니다. 목회자는 이해도 많아야 하고, 성도들의 이해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예배를 모두 드리고 인사하는 문제로 목회자를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누구 좋아하고 누구 무시해서 상대를 골라가며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입니다. 이런 것으로 오해한다면 오해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항상 화평과 사랑을 추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일에 열심을 내고 공동체와 교회를 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평상시에는 잘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면 그때 사는 보람을 느낀답니다. 그래서 비리를 폭로하고, 양보 없는 주장을 펴고, 회의에서 발언을 도맡아 합니다. 그런데 이는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합니다. 윌리암 보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사람이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준비에 바치겠다고 썼습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고 썼습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회교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런데 그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후회 없다(No Regret)고 적혀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생애의 어떤 때이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바리새인처럼 해석을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생명과 회복의 기회로 해석을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이 있습니까? 그 열정을 가지고 전진하게 되는 길에서 항상 좋은 편과 바람직한 일과 살리고 세우는 일과 사랑의 편에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지혜는 입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언어생활이 지혜롭습니다. 3절. 우매 자는 길을 행할 때에도 지혜가 결핍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하느니라. 누가 우매자입니까? 언어생활이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으로 자신을 죽이는 데도 그 것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스스로를 파멸로 가게 하는데도 몰라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과 우매한 사람을 비교합니다. 12절.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칭찬을 잘 하고 긍정의 말을 합니다. 입술의 열매를 말합니다. 신앙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칭찬하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야만인, 우매 자에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특징이 공교롭게도 모두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1) 목소리가 크고, 눈치 없이 큰 소리를 잘 내는 편입니다. 2) 자기 말만 주로 하고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모릅니다. 3) 감정적입니다. 말투가 달라지기 전에 얼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그리고 감정이 상하면 이판사판으로 말을 하면서 주어진 기회를 차버립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람은 지혜로운 언어생활로 이웃과 나를 살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살립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자기를 높이고, 거칠고, 상처를 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용기를 느끼기 보다는 좌절감을 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을 똑바로 인식시켜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곧이곧대로, 생각 없이 말하면서 스스로 정직하고 정의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 옆에는 가기 싫고, 그런 사람은 항상 혼자가 됩니다. 여러분, 보여 지는 현실을 그대로 표현을 해도 상처 받을 때가 있습니다. 눈이 작은 사람에게 와이셔츠 단추 구멍인데 제대로 보이냐? 두 눈 다 떳냐? 고 하지 말고, 너 눈동자가 똘망똘망하게 생겼구나?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은 사람은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도구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습니다. 불평의 말보다 격려의 말을 하면 주변을 환하게 만들고 살 릴 수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지극히 내성적으로 자랐습니다. 고아이기에 말벗도 없습니다. 여러 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서 나중에는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할머니는 끊임없이 그 소년을 격려하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너는 성공할 수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결국 그 할머니의 격려가 그 소년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점차 소년은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주님도 당신을 찾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 편 강도에게는 낙원의 자리까지 허락하셨습니다. 3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거기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통해 공동체를 세워가는지혜로운분들이되시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을드립니다
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삶의 현장을 지키고,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4절.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순,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큰 허물을 경하게 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기 위의 상관 즉 권위자가 화를 나게 하는 일을 해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결국 권위자를 공경하며 따르는 것이고,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잘못된 실패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섬기며, 헌신하고 봉사할 때 신앙이 자랍니다. 여러분, 사람은 감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감정적인 사랑보다 의지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길에서 만난 나그네에게 도네이션을 하듯 일시적으로 주는 관계가 아니라, 어려운 순간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때로는 정말 사랑하기 힘든 경우를 만납니다.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님의 희생의 골고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현장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을 떠나지 않는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참는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겠다는 의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나를 맡기겠다는 그러한 순복의 자세입니다.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불평하고 그 자리를 이탈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현장을 떠나는 일들이 자주 반복되면 인생의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크고 위대한 인생의 작품을 만들어 가십니다. 10절은 말씀합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듭니다. 철 연장의 날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수고와 땀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 자기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위대한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맡겨진 사역에 관심이 없으면 내일과 미래가 없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입니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청교도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도착했을 때 겨울을 나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맹추위와 전염병, 여독과 배고픔으로 인해 매일 눈만 뜨면 사람이 죽어갔지만, 그들의 입술에서는 단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그들은 내년의 수확을 기대하며 한 신기한 인디언 노인이 전해 준 옥수수 씨앗을 희망과 함께 뿌렸습니다. 추위 속에서도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성전부터 지었던 그들! 그들의 신앙과 눈물의 수고 위에 오늘날의 미국이 건설되었습니다. 이처럼 꾸준한 현장을 지키는 것은 결국 인생의 좋은 작품,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현장을 지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도 현장을 지키셨습니다. 눈물의 현장에서 긍휼을 베풀고 고난의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의 현장을 지키셨기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상심과 낙심가운데 이전의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을 위하여 먼저 갈릴리로 가셨고 거기서 다시 소명을 확인하고 남겨진 삶을 살아가도록 용기와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능력을 주실 때 까지 기도의 현장을 지켰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고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책을 많이 읽고 공부 많이 한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합니까?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십니다. 시험을 이겨내고 피하는 것과 시험을 기뻐하는 것도 지혜의 능력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도 지혜의 능력입니다. 만남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관계를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가는 것은 지혜의 능력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지혜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까요? 꾸준한 신앙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좋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 주어진 삶을 승리로 만드시는 삶의 지혜로운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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