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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역사(淸平役事)와 우리<2>
⑴영적(靈的) 사람과 지성적(知性的) 사람의 차이점(差異點)
<말선207-79~80> 심정(心情)이라는 것이 뭐냐? 인간세계(人間世界)의 사랑을 영계(靈界)의 사랑과 연결(連結)시킬 수 있는 그러한 내용(內容)의 사랑을 심정(心情)이라 하고, 그런 내용(內容)의 사랑을 중심(中心)삼고 영향(影響)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環境)을 심정권(心情權)이라고 합니다.
<삶과 사랑 그리고 영혼의 세계p245~247> 사람은 두 종류(種類)입니다. ❶하나는 지성적(知性的)인 사람으로 진리(眞理)로써 뭘 탐구(探求)해 이치(理致)에 맞으면 인정(認定)하고 이치(理致)에 맞지 않으면 부정(不正)하는 타입의 사람이고, ❷ 또 다른 하나는 이치(理致)보다는 감(感)으로 파악(把握)하는 사람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말하면 지적(知的)이다, 영적(靈的)이다 하는 것입니다. 영적(靈的)인 사람은 내적(內的)인 면(面)에서부터 느껴가지고 외적(外的)으로 적용(適用)하려는 사람이요. 지적(知的)인 사람은 외적(外的)인 면(面)에서부터 느껴가지고 내적(內的)으로 적용(適用)하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나가는 종류(種類)요, 하나는 들어오는 종류(種類)입니다. 이 두 종류(種類)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적(知性的)인 사람은 대개(大槪) 기도(祈禱)를 싫어합니다. 그걸 생각(生角)하면 미신(迷信) 같고, 믿을 수 없고. 자기자체(自己自體)가 부정(不正)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건 지성적(知性的)인 사람입니다. 이론(理論)을 따져 가지고 무엇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半面), 나면서부터 ‘하나님’ 하는 말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說明)하기 전(前)에 그저 좋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게 되면 밥을 안 먹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大槪) 영적(靈的)인 분야(分野)에서 혁명적(革命的)인 운동(運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성적(知性的)인 사람은 못 합니다. 신앙세계(信仰世界)에서 위대(偉大)한 일을 하는 사람은 지적(知的)인 사람이 아니라 무식(無識)하고 미욱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靈的)인 사람입니다. 세상(世上)이야 어떻든 느끼는 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하는 것입니다. 하다 보니 그것이 실천(實踐)하는 환경(環境)에 백중(伯仲)하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로 말미암아 위대(偉大)한 인물(人物)로 등장(登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지성적(知性的)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하늘의 영적(靈的) 벼락을 한번 맞고 나서 돌아버렸습니다. 외적(外的)으로 탐구(探究)하는 것보다는 내적(內的)인 분야(分野)에 폭발적(爆發的)인 길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전부(全部)를 부정(不正)하고 영적(靈的)인 면(面)을 존중(尊重)한 것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기독교(基督敎) 혁명(革命)의 기수(旗手)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理性的)으로 따지는 사람은 종교적(宗敎的)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서 지도자(指導者)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두 종류(種類)가 있는데, 나는 어떠한 타입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大槪) 영적(靈的)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靈的)으로는 크지만, 지적(知的)인 면(面)에서는 크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굵었다가 나중에 뾰족해지면 시종여일(始終如一)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永遠)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지적(知的)으로는 크지만, 영적(靈的)인 면(面)이 작다면 그런 경우(境遇)도 영원(永遠)히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調整)하는 생활(生活)을 해야 합니다.
성경(聖經)에 기도(祈禱)와 진리(眞理),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 예배(禮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평형(平衡)을 만들어 화(和)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人間)은 영계(靈界)와 육계(肉界)를 조정(調整)해야 됩니다. 영적세계(靈的世界)의 중앙(中央)에 서야 되고, 진리세계(眞理世界)의 중앙(中央)에 서서 조정(調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人間)이 되지 않고는 완전(完全)한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편지(片紙)를 쓰더라도 눈물흘리면서 쓰게 되면 상대(相對)를 울릴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사무치는 마음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면 그 사람도 그런 경지(慶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 참된 것은 상대(相對)를 창조(創造)합니다. 완전(完全)한 플러스적(的) 심정(心情)은 마이너스적 상대(相對)를 창조(創造)하게 마련입니다. 그게 원칙(原則)이기 때문에 선생님(先生任)이 손대면 심각(深刻)합니다. 거기에는 여유(餘裕)가 없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현장(現場)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되게 돼 있습니다. 주체(主體)가 완전(完全)치 못하면 그 상대기준(相對基準)이 완전(完全)치 못합니다. 완전(完全)한 실력(實力)을 갖고 나가게 될 때 그 일은 되게 마련입니다.
<삶과 사랑 그리고 영혼의 세계p243~244> 우리가 기도(祈禱)하는 가운데 역사(役事)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역사(役事)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靈的)인 힘(力)이 전기작용(電氣作用)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체험(體驗)을 해 봤으면 알겠지만, 고압전류(高壓電流)에 접(接)한 것과 같이 우리 의식(意識)보다 강(强)한 힘(力)이 들어오게 됩니다.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초인적(超人的)인 감정(感情)이 찾아들게 되면 우리 몸이 타락성(墮落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반발(反撥)하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신성(神性)과는 반발(反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墮落)한 인간(人間) 앞에 어떤 신(神)의 성품(性品)이 강력(强力)하게 들어와도 자연적(自然的)으로 순화(順和)되지 못합니다. 이것이 들어오는 데는 플러스 마이너스와 같이, 음파(音波)가 강약(强弱)으로 전파(電波)되어 나가는 것과 같이 반드시 그 힘(力)도 한꺼번에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强)하게 들어왔다 약(弱)하게 들어왔다 이러면서 개척(開拓)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동(震動)이 벌어지고, 자기(自己)의 의식(意識)이 없어지고, 영적(靈的)인 힘(力)이 강(强)하게 작용(作用)하는 현상(現象)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역사(役事)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役事)를 자꾸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이 몸이, 육성(肉性)이라는 것이 타락성(墮落性)이 순화(順和)되어 자연(自然)히 1백(百) 퍼센트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현상(現象)이 없어도 역사(役事) 이상(以上)의 자리에 들어가 하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다 받으면서도 감쪽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現象)을 거쳐 순화(純化)되는 자리까지 올라가야 됩니다. 그 과정(過程)에서 계시(啓示)라든가 지시(指示)의 단계(段階)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 체휼단계(體恤段階)에 들어가면 자신(自身)의 마음이 명령(命令)합니다. 누구에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말을 못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혹(或)은 내가 좋은 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야 할 텐데 책망(責望)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現象)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理解)할 수 없는 말이 가끔 벌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調整)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미치광이로 취급(取扱)받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조정(調整)할 수 없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체휼적(體恤的) 과정(過程)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이런 체휼(體恤)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강(强)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체휼(體恤)과 실천(實踐), 우리 신앙생활(信仰生活)에서 가장 필요(必要)합니다.
(2)마음의 공명현상((共鳴現相)
<삶과 사랑 그리고 영혼의 세계 p240~241> 기도(祈禱)를 해서 차원(次元)이 높아지면 마음하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공명(共鳴)되는 현상(現相)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원(次元) 높은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景至)로 발전(發展)해 나갑니다. 맨 첫 단계(段階)에서는 암시(暗示)와 같은 사실(事實)들이 자기생활(自己生活)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자(信仰者)는 이러한 막대(莫大)한 자료(資料)를 수집(收集)해야 됩니다. 대(對)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심코 대(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 줄 것이냐? 언제나 배고픈 자(者)의 심정(心情)이 돼야 됩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갖다줄 것이냐? 그렇게 찾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결국(結局) 그 자체(自體)는 뭐냐? 내가 언제나 주체(主體)가 되든가 대상(對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확정적(確定的)인 주체(主體)요. 확정적(確定的)인 대상(對象)의 입장(立場)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主體)될 수 있는 존재(存在)가 나타나고, 대상적(對象的)인 존재(存在)가 나타나면 대번에 압니다. 내가 전도(傳道)할 사람이 있으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괜히 마음이 좋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걸 심파(心波)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의 파장(波長)이 있습니다. 고기 장사하는 사람은 푸주 냄새가 나고, 천(옷감)장사를 하는 사람은 천 냄새가 납니다. 우리 자신(自身)의 몸에서도 자신(自身)의 냄새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 몸에는 촉각(觸覺)같은 것이 있어서 전부(全部) 접선(接線)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은 전파(電波)같은 것을 발사(發射)해 대상(對象)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傳道)할 때, 오늘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生角)해야 합니다. 첫 번째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세 번째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生角)하며 ‘아버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는데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기도(祈禱)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生角)하고 기도(祈禱)한 그 기준(基準)과 딱 맞아 떨어진다면 기분(氣分)이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體驗)을 함으로써 자신(自身)의 영적촉감(靈的觸感)이 발달(發達)합니다. 그렇게 되면 길을 나설 때,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영(靈)은 무한정(無限定)으로 통(通)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生角)했는데, 실제(實際) 그런 사람을 대(對)하게 되면 ‘아이쿠!’ 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自己)의 생각(生角)과 영계(靈界)에서 가르쳐준 영감(靈感)이 실제(實際)로 들어맞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체험(體驗)을 쌓아 올라가야 됩니다. 정신적(精神的)인 세계(世界)는 통일권(統一權)입니다 ‘내가 누가 보고 싶어서 24시간(時間)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옵니다. 그게 실현(實現)됩니다. 집중(集中)하게 되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향성(方向性) 전파(電波)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수신기(受信機)와 같은 자기(自己) 마음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괜히 궁금하고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信仰)하는 사람의 태도(態度)는 전부(全部) 나와 더불어 관계(關係)하고 있다고 생각(生角)해야 됩니다.
(3)계시(啓示)와 묵시(默示)
<삶과 사랑 그리고 영혼의 세계p242> 마음의 공명단계(共鳴段階)가 높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계시(啓示)라든가 지시(指示)같은 현상(現象)이 벌어집니다. 계시(啓示)라는 것은 반드시 분석(分析)을 해야 됩니다. 지시(指示)는 직접(直接)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계시(啓示)는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問題)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석(解釋)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는 데는 음성(音聲)으로 들려주기도 하지만 환상(幻想)으로도 보여줍니다. 좋은 봄날을 맞이하여 사슴 한쌍(雙)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면서 먼 산(山)을 바라본다. 이러한 환상(幻想)은 지극(至極)히 행복(幸福)스러운 소망(所望)을 상징(象徵)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現象)이 벌어집니다. 그런 것이 우연(偶然)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밭을 개발(開發)하기 위(位)한 하늘의 역사(役事)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 마음의 밭이라는 것이 유리판 같이 평평(平平)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울뚝불뚝합니다. 수평(水平)같은 면(面)을 가졌지만, 그 자체(自體)는 울뚝불뚝하다는 것입니다. 울뚝불뚝한 여기에 하늘의 계시(啓示)가 들어오게 되면 빛이 굴절(屈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방향(方向)과 반대방향(反對方向)으로 반사(反射)돼 나갑니다. 그러니 전부(全部) 다릅니다. 부분(部分) 부분(部分)을 개발(開發)하려니 그런 역사(役事)를 합니다.
계시(啓示)의 단계(段階)를 지나게 되면 묵시(默示) 단계(段階)입니다. 하루 종일(終日) 영계(靈界)에 들어가서 체험(體驗)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世界)까지 연결(連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활적(生活的)인 감정권(感情權)에까지 도달(到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휼적(體恤的)인 신앙(信仰)을 하지 못하고서는 위대(偉大)한 하늘 뜻의 결과세계(結果世界)를 우리의 생활무대(生活舞臺)에서 적용(適用)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적체험(靈的體驗)을 갖지 못한 신앙자(信仰者)는 믿을 수 없습니다. 체휼적(體恤的)인 신앙(信仰)이 고귀(高貴)하기 때문에 계발(啓發)해 나가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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