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미술관에 갔어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로 병풍에 그려넣었어요
입력 : 2023.01.16 03:30토끼가 등장하는 작품들
▲ ①작자 미상의‘화조도’(19세기) 병풍화8폭 중 한 폭. 정중앙에 토끼가 등장해요. ②절구질하는 토끼의 모습이 인상적인 작자 미상의 ‘화조도’(19세기) 병풍화의 한 폭. ③요제프 보이스의 행위예술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를 사진 찍은 것(1965). ④제프 쿤스, ‘토끼’(1986). /갤러리현대·로널드 펠드먼 갤러리·시카고 현대미술관
2023년은 열두 띠 중 토끼띠의 해입니다. 설날이 가까워지면서 상점에는 토끼 인형이나 토끼 모양 과자가 등장하고, 선물 포장지에도 토끼 이미지들을 볼 수 있지요. 토끼는 생김새가 귀엽고 털이 부드러워,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동물이에요. '별주부전' 같은 옛이야기 속에서 토끼는 바닷속 용궁으로 잡혀가면서도, 머리를 써서 위기를 모면할 줄 아는 꾀 많은 동물로 나옵니다. 물에서는 대책이 없지만, 토끼는 육지에서는 긴 뒷다리로 껑충껑충 도망치는 것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지혜로운 토끼도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서는 잘 뛴다고 자만하고 방심하다가 느림보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패배하는 쓴맛을 보기도 하죠. 옛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토끼는 미술 작품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볼까요?
민화 속에서 장수와 풍요 상징
토끼는 조선시대 후기 민화의 한 종류인 화조도(花鳥圖·꽃과 새 그림) 속에서 주로 찾을 수 있습니다. 꽃과 새가 주로 그려진 병풍 그림을 공식 용어로 '화초영모병(花草翎毛屛)'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화초는 꽃과 식물을, 영모는 새나 토끼처럼 깃털이나 털이 있는 작은 동물을 뜻해요. <작품1>은 19세기에 제작된 8폭짜리 병풍화 중 한 폭입니다. 노란색·흰색·붉은색의 3가지 색 국화가 활짝 피어 있는 가을을 배경으로 새 한 쌍이 사이좋게 함께 날아다니고, 토끼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네요.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오래도록 장수하며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라는 기원이 담긴 그림입니다. 토끼는 그림 속 식물이나 계절이 뜻하는 바와 조화를 이루면서 여러 좋은 의미를 전하는데, 돈독한 부부애나 번식력, 천년을 산다는 전설 속 옥토끼처럼 긴 수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작품2> 역시 19세기 병풍화이고, 8폭 중 한 폭인데요. 달이 뜬 소나무 아래에서 절구질하는 한 쌍의 토끼가 보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달을 바라볼 때마다 그곳에서는 신비로운 옥토끼가 살면서 약 방아를 찧고 있는데, 그 약을 먹으면 평생 병 들거나 늙지 않고 장수한다고 상상하곤 했어요. 이 그림에서 토끼가 절구에 넣고 찧는 것이 혹시 그 묘약이 아닐까요? 그림을 보기만 해도 아픈 곳이 다 사라지고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현대 행위예술에도 등장
현대미술 작품 중에서도 유명한 토끼가 있어요. <작품3>은 독일 태생의 미술가 요제프 보이스(1921~1986)가 1965년에 행위예술로 선보였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의 사진입니다. 보이스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꿀로 흠뻑 적셔 금박을 입혔고 다리에 펠트 담요를 둘둘 말았어요. 그리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은 채, 토끼에게 두 시간 동안 그곳에 걸려 있는 미술 작품에 대해 성의를 다해 설명해 줬어요. 간혹 토끼를 흔들어 그림을 보라고, 발로 작품을 만져보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부조종사로 참전했던 보이스는 비행기가 추락해 낯선 곳에서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어요. 그를 발견한 원주민들은 보이스가 얼어 죽지 않도록 몸에 버터와 비계, 그리고 꿀처럼 끈끈한 액을 덕지덕지 바른 후 펠트 담요로 둘둘 싸서 늑대개가 끄는 눈썰매에 태워 마을로 데려갔어요.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훗날 보이스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한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의미 있는 행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미술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면서 보이스는, 삶을 치유해주는 미술의 사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했던 거죠.
'토끼' 조각품 1000억원대 낙찰
이에 비하면, 미국의 제프 쿤스(1955~ )가 만든 '토끼'<작품4>는 미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쿤스는 미술 작품에서 어렵고 복잡하고 무거운 의미를 비워내 버리고, 마치 풍선이나 장난감처럼 눈을 즐겁게 해주는 상태로 제시하지요. 요제프 보이스가 미술을 상처를 낫게 해주는 고귀한 방식으로 보았다면, 쿤스는 상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흔한 물건들과 다름없이 미술을 가볍게 취급해요. 작품을 볼 때 삶의 힘겨운 부분들이 같이 떠오르지 않도록, 미술만큼은 삶과는 달리 언제나 유쾌하기를 바랐나 봅니다.
'토끼'는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들고 다니는, 당근을 입에 문 버니(Bunny) 풍선을 보고 그 모양 그대로 거울처럼 표면이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으로 제작한 것이에요. 기성 제품을 그대로 본뜬 쿤스의 조각들을 두고 미술계에서는 여러 논란도 있었어요. 쿤스는 1980년대에 주변에서 미술가의 명성과 미술품의 가격이 미술 시장에서 거품처럼 부풀려졌다가 쉽게 꺼지곤 하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가 풍선 토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술도 때로는 공허할 뿐이라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쿤스의 작품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미술계의 여러 반응과는 별개로, 2019년에는 그의 '토끼' 조각 중 한 점이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무려 1000억원 넘는 가격에 낙찰됐습니다. 내용 없이 텅 빈 풍선의 허무함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결국엔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토끼 조각품이 된 것이죠.
이주은 건국대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