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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부 6
그러나 그녀가 나가자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걸고는, 아까 라주미힌이 가지고 와서 싸두었던 옷 보따리를 풀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는 완전히 침착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까와 같은 미친 듯한 환각도 없었거니와, 요즈음 늘 계속되던 몸서리치는 공포감도 없어졌다. 그것은 일종의 기묘한, 뜻하지 않은 평정의 첫 순간이었다. ‘오늘이야말로…’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직 쇠약하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정의 영역에까지 도달한 강력한 마음의 긴장이 그에게 힘과 자신을 주었다. 설마 거리에서 쓰러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죄다 새 옷으로 갈아이은 후 탁자 위에 놓인 돈을 보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돈은 25루블이었다. 그리고 라주미힌이 옷값으로 지불하고 가져온 거스름돈인 동전 5코페이카도 모조리 집어넣었다. 이윽고 문고리를 벗기고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와서, 열려 있는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나스타시야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쭈그리고 앉아서 안주인의 사모바르를 후후 불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더욱이 그가 밖에 나가리라고는 그 누가 상상인들 했으랴! 1분 후에 그는 이미 한길에 나와있었다.
8시경이라 해는 저물고 있었다. 여전히 무더웠지만, 그는 악취가 풍기는 이 먼지투성이의 탁한 도회지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 들이켰다. 그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어떤 야성적인 정력이, 그 충혈된 두 눈과 비쩍 마른 누런 얼굴에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고, 또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오늘 중으로, 단번에, 지금 당장 청산해버려야 한다. 그것이 안 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그냥 이렇게 살기는 싫다.’ 그러나 어떻게 청산하느냐? 무엇을 어떻게 청산하느냐? 그는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또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상념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 상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좌우간 모든 것이 무슨 전환이 있어야겠다는 것을 그는 느꼈고, 또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그는 자포자기적인 확고한 자신과 결심을 가지고 이렇게 되풀이했다.
오랜 습관으로 그는 언제나 산책길을 따라 곧장 센나야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광장 조금 못 미쳐 조그만 가게 앞 차도에 머리털이 까만 손풍금수가 서서 몹시 구슬픈 노래를 켜고 있었다. 앞 보도에 서 있는 열댓쯤 되어 보인는 소녀의 노래에 붙이는 반주였다. 소녀는 귀족집 아가씨처럼 폭 넓은 페티코트에 부인용 외투를 입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새빨간 깃털 장식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낡고 닳아빠진 것들뿐이었다. 그녀는 방랑 가수 특유의 찢는 듯한, 그러나 꽤 듣기 좋은 목소리로 가게에서 던져줄 2코페이카를 기대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걸음을 멈추고 청중 두셋과 나란히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5코페이카를 꺼내서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소녀는 가장 구성지고 가장 높이 올라간 대목에서 딱 끊듯이 노래를 멈추고는 손풍금수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만!” 그리고 두 사람은 천천히 다음 가게로 옮겨갔다.
“당신은 방랑가수의 노래를 좋아하시오?” 라스콜니코프는 손풍금수 옆에 서 있던 부랑인같은, 그다지 젊지 않은 사내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사내는 물끄러미 그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좋아해요”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이었으나 그 표정은 방랑가수하고는 인연이 먼 얘기를 하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춥고 습기 찬 어두운 가을밤에 -반드시 습기찬 밤이라야 해요 - 통행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병적으로 보일 때, 손풍금수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아니면 진눈깨비가 바람 한 점 없이 부슬부슬 쏟아질 때도 좋지요. 알겠어요, 눈발을 통해 가스등이 반짝이는…..”
“모르겠는데요…..실례합니다……”그 당돌한 질문과 라스콜니코프의 기묘한 풍채에 놀란 사내는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길 건너 편으로 가버렸다.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걸어가서, 그때 리자베타와 얘기하던 장사꾼 부부가 노점을 벌이고 있는 센나야 광장 한 모퉁이로 나왔다. 그러나 오늘 그 부부는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밀가루 가게 문가에 멍청히 서 있는 빨간 셔츠의 젊은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 모퉁이에서 부인하고 함께 장사를 하는 사내가 있었는데, 모르겠나?”
“모두가 장사를 하죠.” 젊은이는 거만스럽게 라스콜니코프를 훑어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내 이름이 뭐지?”
“세례받은 대로의 이름일 테죠.”
“자네도 자라이스키 사람인가 보군? 어느 현에서 왔나?”
젊은이는 다시 한 번 라스콜니코프를 훑어보았다.
“나리, 우린 현이 아니라 군이에요. 형님은 사방으로 여행을 다니지만, 난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라요….그러니 이젠 그만물으슈.”
“저건 식당인가? 2층 말이야?”
“선술집이에요. 당구대도 있죠. 색시도 있고요… 꽤 손님이 많아요!”
라스콜니코프는 광장을 가로질렀다. 건너편 한쪽 구석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두 농군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제일 혼잡한 곳으로 뚫고 들어갔다. 왜 그런지 누구하고든 얘기가 하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나 농군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몇 패로 나뉘어 서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잠시 서 있다가, 좀 생각을 해보고는 오른쪽으로 돌아 인도를 따라서 V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광장을 벗어나자 그는 어느 골목길로 들어섰다……그는 전에도 광장에서 사도바야 거리로 통하는 구부러진 이 짧은 골목길을 곧잘 지나다녔다. 특히 요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좀 더 기분이 나빠지려고’ 일부러 이 근처만을 돌아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이 들어섰다. 거기에는 건물 전체가 술집과 그 밖의 영업집으로 차 있는 커다란 집 한 채가 있었다. 이들 가게에서는 맨머리에 옷을 한 가지만 걸쳤을 뿐 ‘잠깐 이웃에’ 다니는 듯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쉴 새 없이 달려나오곤 했다. 여자들은 길 위의 두세 군데, 특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곳에 떼를 지어 모여 있었다. 거기서 두 계단쯤 내려가면 여러 가지 환락 시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이때 그러한 장소의 하나에서 퉁탕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한길 가득히 흘러나오고, 기타가 울리고 노랫소리가 들려와 몹시 흥겨워 보였다. 입구에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어떤 여자는 계단에 앉아 있고, 어떤 여자는 길바닥에 앉아 있고, 또 어떤 여자는 선 채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 옆 인도에는 궐련을 입에 문 술 취한 군인 하나가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면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갈 곳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거지같이 초라한 꼴을 한 사내가 또 다른 거지꼴의 사내와 뭐라고 욕지거릴 하고 있는가 하면, 그 옆에는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내가 죽은듯이 길 한복판에 뒹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옥양목 옷에 산양 가죽의 구도를 신고 모자가 없는 맨머리였다. 개중에는 40대 여자도 있고, 열일곱쯤 돼 보이는 소녀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눈가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왜 그런지 밑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소음에 마음이 끌렸다……거기서는 큰 소리로 웃어대는 웃음소리와 외침 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가성의 인상적인 노래와, 기타에 맞춰 누군가가 발뒤꿈치를 구르며 미친 듯이 춤을 추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입구에 허리를 쭈그리고 신기한 듯이 길에서 현관을 들여다보면서 음울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대는 나의 소중한 서방님
부질없이 나를 때리지 마오!
가수의 가냘픈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의 모든 일이 그 노래에 관련되기라도 한 듯이, 지금 부르고 있는 그 노래가 무척 듣고 싶어졌다.
'들어가볼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웃고들 있구나! 취했어. 에잇, 나도 한번 녹초가 되도록 마셔볼까?'
"들렀다 가세요, 나리!" 한 여자가 꽤 잘 울리는, 아직 그다지 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젊고 그리 밉지 않은 여자였다. 물론 그 떼거리 가운데 한 여자였다.
"꽤 미인이군!" 그는 약간 몸을 일으키고 여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생긋 웃었다. 그가 한 말이 무척 마음에 든 것이다.
"나리도 아주 미남이신데요 뭐"하고 여자는 말했다.
"어쩌면 저렇게 여위셨을까!" 또 한 여자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시는 길인가 봐!"
"모두 장군댁 따님들 같지만 하나같이 다 납작코야!" 옆으로 온 농군이 거나하게 취한 김에 참견을 했다. 그는 무명 외투 앞섶을 풀어헤치고, 못생긴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구나!"
"들어가세요, 모처럼 오셨는데!"
"들어가지! 좋아, 좋아!"
이렇게 말하며 사내는 구르듯이 밑으로 내려갔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봐요, 나리!" 여자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왜 그래?"
여자는 좀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봐요, 나리, 난 당신하고라며 언제든지 기꺼이 놀아드리겠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왜 그런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멋쟁이 아저씨, 한잔 마시고 싶은데 6코페이카만 주세요, 네?"
라스콜니코프는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5코페이카짜리 동전 세 닢이었다.
"어머나, 아주 마음이 좋은 분이셔!"
"이름이 뭐지?"
"두클리다를 찾으세요."
"안 돼, 무슨짓이야." 갑자기 패거리 가운데 한 여자가 두클리다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조르는 법이 어디있니! 나 같으면 부끄러워 얼굴도 처들지 못하겠다."
라스콜니코프는 지껄이고 있는 여자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곰보인데, 얼굴은 온통 멍이 들고 윗입술은 부어 있었다. 여자는 침착하고도 진지한 어조로 핀잔을 주었다.
'무슨 책이더라?'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그걸 내가 어디서 읽었지? 사형선고를 받은 한 사내가 처형되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든가, 생각했다든가 한 얘기를. 만약 자기가 어느 높은 산꼭대기 바위의 겨우 두 발밖에 올려놓을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다 하더라도, 주위는 끝없는 심연과 대양과 영원한 어둠과 영원한 고독과 폭풍, 그리고 이 좁은 땅에서 한평생 천년, 아니 영원히 서 있지 않으면 안 되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죽기보다는 그렇게 하고라도 살아 있는 편이 낫다! 그저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아 있고 싶다! 어떻게 살든 그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숨김없는 진실이다! 진실의 소리다! 인간은 원래가 비열한 법이다!...또한 이런 사내를 비열하다고 하는 놈도 역시 비열한 놈이다.' 1분쯤 지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다음 거리로 나왔다. '야! 이건 수정궁이구나! 아까 라주미힌이 수정궁 얘기를 했었지!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할 작정이었더라? 그렇지, 신문을 읽어야지!....조시모프가 신문에서 읽었다고 했어.......'
"신문 있나?" 꽤 넓고 깨끗한 술집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방은 여러 개 있었으나 손님은 많지 않았다. 두서너 명이 차를 마시고 있고, 멀리 떨어진 한 방에 네 사람이 앉아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의 눈에는 그 속에 자묘토프가 끼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멀어서 잘 분간할 수는 없었다.
'있으면 어때!'하고 그는 생각했다.
"보드카를 드시겠어요?" 종업원이 물었다.
"차를 주게. 그리고 신문 좀 가져다주겠나, 묵은 것을 닷새쯤 전부터 죽. 팁을 줄 테니."
"네, 알겠습니다. 이건 오늘 신문입니다. 그리고 보드카도 주문하시겠습니까?"
낡은 신문과 차가 나왔다. 라스콜니코프는 편히 앉아 찾기 시작했다. '이즐레르-이즐레르-앗체키-앗체키-이즐레르-바르톨라-마시모-앗체키-이즐레르- 쳇, 제기랄! 앗, 여기 기사가 있군....여자가 층계에서 떨어졌다. -상인이 과음으로 사망 - 페스키의 화재, 페테르부르크 구의 화재 - 또 하나 페테르부르크의 화재 - 이즐레르 -이즐레르-이즐레르-이즐레르-마시모- 앗, 이거다........'
그는 드디어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 활자는 눈 속에서 춤을 추었으나, 그래도 그는 '기사'를 죄다 읽고는 다음 페이지의 새로운 추가 기사를 찾기에 바빴다. 페이지를 넘기는 그의 손은 초조한 나머지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누군가 그의 옆으로 와서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흘긋 보니....자묘토프였다. 포마드를 바른 검은 머리에 가르마를 곧게 타고, 멋진 조끼에 약간 낡은 프록코트와 그다지 희지 못한 셔츠를 입고, 금줄을 늘이고 금반지를 몇 개씩이나 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묘토프였다. 그는 유쾌해 보였다. 적어도 유쾌한 듯이 호인다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얼굴은 한잔 들이켠 샴페인 때문에 불그레했다.
"아니! 당신이 이런 곳엘?" 그는 십년지기라도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의아스런 듯이 입을 열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라주미힌이 당신은 여전히 의식불명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나도 당신 집에 갔었어요......"
라스콜니코프는 그가 옆에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물을 밀어놓고 자묘토프쪽으로 돌아앉았다. 그의 입술에는 냉소가 감돌았으나, 그 속에는 무언가 새로운 초조의 빛이 엿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오셨다는 것은" 하고 그는 대답했다. "들었어요. 양말을 찾아주셨다고요....그런데 라주미힌은 당신한테 홀딱 반한 모양이더군요. 당신은 그 친구와 함께 루이자 이바노브나한테 갔었다면서요? 왜 그때 당신이 애써 화약 중위에게 눈짓을 하는데도 그 양반은 통 눈치채지 못했었죠, 기억하시죠? ....그 여자한테 말이에요. 모르실 리 없을 텐데, 다 아는 일인데요....안 그래요?"
"그 친구도 꽤 짓궂은 사내로군!"
"화약 중위 말입니까?"
"아니, 당신 친구 라주미힌 말이오......."
"경기가 괜찮군요, 자묘토프 씨, 그런 유쾌한 곳에 무상출입이시라니! 지금 당신에게 샴페인을 대접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저 우리끼리...마신 겁니다....대접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사례조겠죠! 빈틈없이 이용하시는군요!" 라스콜니코프는 껄껄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량하신 도련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묘토프의 어깨를 툭 치며 덧붙였다. "나는 뭐 악의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즉 '사이가 좋기 때문에 장난으로' 말하는 것뿐이죠. 이건 그 칠장이가 미트레이를 때렸을 때 한 말이지만요. 그 노파 살해 사건과 관련해서."
"어떻게 그걸 아시오?"
"어쩌면 내가 당신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당신 좀 이상하군요....아직도 병이 심하신가 본데. 외출은 무리예요......"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입니까?"
"그렇게 보이는데요. 그런데 그건 뭡니까, 신문을 읽고 계셨나요?"
"신문입니다."
"화재 기사가 많지요."
"아니, 내가 읽은 것은 화재 기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눈으로 자묘토프를 보았다. 조소하는 것 같은 엷은 웃음이 다시금 그의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아니에요, 화재 기사가 아니에요"하고 그는 자묘토프에게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자, 고백하시오, 사랑스러운 도련님, 당신은 내가 어떤 기사를 읽었는지 무척 알고 싶은 거죠?"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저 물어본것뿐입니다. 또 물어봐서 안 될 것도 없지 않아요? 왜 당신은 그렇게......"
"이거 보시오, 당신은 교양을 지닌 문학적인 분이죠, 그렇죠?"
"나는 중학교 6확년까지 다녔을 뿐이오." 다소 위엄을 보이면서 자묘토프가 대답했다.
"6학년까지! 당신은 참으로 귀여운 참새로군! 가르마를 똑바로 타고, 반지도 많이 끼고...과연 부자는 다르군! 참으로 귀여운 도련님이셔!" 이렇게 말하고 라스콜니코프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자묘토프의 얼굴에 파부었다. 자묘토프는 엉겁결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욕을 느꼈다기보다는 너무나 놀랐기 때문이다.
"쳇, 별 괴상한 사람 다 보겠군!" 자묘토프는 정색을 하고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아직 헛소리를 하는 것 같소."
"헛소리를 한다고요?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참새 양반! 내가 그렇게 이상해 보입니까? 흠, 그러니까 당신은 내게 흥미가 있겠죠, 네? 흥미 있는 존재죠?"
"흥미 있군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을 읽었나, 무엇을 찾았나 하는 거죠? 이렇게 낡은 신문까지 잔뜩 가져오게 했으니 말이오! 수상하단 말이죠, 예?"
"어서 계속하시오."
"귀가 솔깃했다 이 말씀이군요."
"도대체 귀가 솔깃할 게 뭐냐 말이오?"
"귀가 솔깃할 내용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지금은 나의 사랑하는 도련님, 이렇게 말씀드리기로 하죠...아니, 차라리 '고백하겠소'....아니, 이것도 적당치 않아. '진술할 테니 받아 쓰시오.' 그렇지, 이게 좋아! 자, 그럼 진술을 하겠소. 내가 읽은 것은, 흥미를 가지고 찾고...또 조사한 것은......"라스콜니코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잠깐 기다렸다. "내가 일부러 여기 들른 이유는....관리 미망인인 노파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소." 자기 얼굴을 자묘토프의 얼굴에 바싹 대고 그는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자묘토프도 자기 얼굴을 상대방의 얼굴에서 떼려고 하지 않고 뚫어지게 그를 마주 보았다. 훗날 자묘토프로서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 이때 꼭 1분 동안이나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계속되고 서로 흘겨보았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 기사를 읽은 것이?" 갑자기 그는 의혹과 초조에 사로잡혀 외쳤다. "도대체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그게 어쨌다는 거요?"
"바로 그 노파 말이에요." 라스콜니코프는 자묘토프의 외침에도 까딱 않고 여전히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기억하시죠, 그때 경찰서에서 그 얘기가 나오자 내가 졸도햇던, 그 노파 말입니다. 어때요, 이젠 아시겠소?"
"대체 무슨 소리요? 무엇이....'아시겠소'예요?" 자묘토프는 자못 발안한 듯이 말했다.
라스콜니코프의 딱딱하고 진지한 얼굴이 일순간 홱 변하고 말았다. 별안간 그는 자기 스스로를 제어할 힘이 없어진 것처럼, 다시금 아까와 같은 신경질적인 웃음을 떠뜨렸다. 이 순간, 도끼를 손에 들고 문 뒤에 숨어 있던 며칠 전의 한 순간이 무서울 만큼 똑똑하게 되살아났다. 문고리가 덜거덕거리고, 밖에서는 두 사내가 욕지거리를 퍼붓고 문을 밀기도 한다. 그러나 갑자기 두 사람에게 호통을 치며 욕을 퍼붓고 혀를 날름 내밀어 조소해주고 깔깔거리며 웃고, 웃고, 또 웃어주고 싶었던 순간이!
"당신 미쳤소, 아니면...."하고 자묘토프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상념에 움찔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뭐가 '아니면'이오? 뭐예요? 어서 말해보시오!"
"아무것도 아니오!" 자묘토프는 성난 소리로 대답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뜻하지 않은 웃음의 폭발이 끝나자,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탁자 위에 팔꿈치를 짚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자묘토프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싶었다. 침묵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왜 차는 안 드시오? 식어버리겠소"하고 자묘토프가 말했다.
"네? 뭐요? 차를?....아, 그렇군......."라스콜니코프는 차를 한 모금 꿀꺽 마시고는 빵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묘토프의 얼굴을 흘긋 보고, 갑자기 모든 것이 생각난 듯이 흠칫 몸을 떠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 순간 처음과 같은 조소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차를 마셨다.
"요즈음은 그런 흉악한 범죄들이 부쩍 늘었어요." 자묘토프가 말했다. "얼마 전에도 <모스크바 통보>에서 읽었는데, 대규모 지폐 위조단이 검거되었더군요. 거의 회사만한 규모의 인원이 유가증권을 위조하고 있었대요."
"아, 그건 벌써 낡은 얘기예요! 나는 벌써 한달 전에 읽은걸." 라스콜니코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 생각엔 그런 사람들이 악당이겠군요?"하고 그는 히죽 웃으면서 덧붙였다.
"악당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게요? 그건 어린애들이에요, 풋내기예요, 악당이랄 수 없어요! 그까짓 일을 위해 인간 50명이 모이다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세 사람도 많아요. 그것도 서로들 자기 자신 이상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취중에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끝장이 나니까요! 풋내기들이죠! 지폐를 바꾸는 데 믿을 수도 없는 사내를 고용하다니, 그런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는 법이 어디 있어요? 설사 풋내기들이라도 다행히 잘 해치웠다고 합시다. 각각 백만 루블씩 바꿀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자, 그다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평생, 그야말로 한평생을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목을 매는 편이 낫죠! 그런데 그자들은 돈을 바꾸지도 못했거든요. 은행에 가서 5천 루블을 받아 들자 손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4천 루블까지는 제대로 세었지만 나머지는 한시바삐 도망치려는 생각에서 그대로 받아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어요. 그래서 결국 혐의를 받게 되고, 바보 같은 놈 단 한 사람 때문에 만사가 끝장나고 만 거죠! 도대체 이런 어리석은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손이 떨렸다는 게 어쨌다는 겁니까?" 자묘토프가 말을 받았다. "그야 그럴 수 있는 일이죠. 아니, 나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 정도의 일로?"
"아니, 당신이라면 참아낼 수 있겠소? 나 같으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겁니다! 100루블 정도의 보수를 받고 그런 무서운 짓을 하다니! 위조지폐를 가지고, 게다가 거기가 어딘데! 그런 일이 전문인 은행으로 가다니. 아니, 나라면 당황할 겁니다. 당신은 당황하지 않을 것 같소?"
라스콜니코프는 또다시 '혀를 날름 내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따금 오한이 순간적으로 등골을 스치곤 했다.
"나 같으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슬쩍 돌려 말하기 시작했다. "나 같으면 이렇게 바꾸겠어요. 먼저 최초의 천 루블은 한 귀퉁이마다 한 번씩 도합 네 번쯤 한 장 한 장 조사해 세어보고, 그다음 천 루블을 세기 시작하는 거죠. 그것도 반쯤 세다가 어떤 것이든 50루블짜리 지폐를 한 장 빼내어 밝은 곳에 비추어 보고, 뒤집어 보고, 다시 한 번 가짜가 아닌가 비추어 본단 말이에요. 그러고는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요전에도 친척 여자가 25루블이나 속은 일이 있어요'하면서 그 이야기를 늘어 놓는 거예요. 그리고 3천 루블째를 셀 때 '이거 미안합니다. 아까 2천 루블째 셀 때 700루블까지 세다 잘못 센 거 같아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하고는 3천 루블째 세는 것을 중지하고 2천 루블째를 다시 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부 세고 나면, 또 다섯째 다발과 둘째 다발에서 한 장씩 빼내어 밝은 곳에 비추어 보면서 아직도 미심쩍은 듯이 '미안하지만 좀 바꿔 주시오'하는 식으로 은행원이 지쳐서 비명을 올릴 때까지 하는 겁니다. 어떡하면 저 귀찮은 놈을 쫓아버릴 수가 있을까 하고 진절머리를 낼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겨우 다 끝내고 나서 나오려고 문을 열었다가는 '아니, 잠깐만 실례합니다'하면서 다시 한 번 돌아섭니다. 그러고는 또 무슨 질문을 하고 설명을 듣습니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해치우죠!"
"허허, 당신은 정말 무서운 소릴 하시는군요!" 하고 자묘토프는 웃으면서 말햇다. "그러나 그건 말뿐이지 정작 실행하게 되면 아마 실패하고 말 겁니다. 그런 경우에는, 내 생각 같아선, 나나 당신뿐만 아니라 아무리 경험 많고 대담한 놈이라도 자기 자신을 보증할 수 없는 법입니다. 뭐 비근한 예로 여기 좋은 본보기가 있습니다. 우리 관내에서 일어난 노파 살인 사건 말입니다. 그야말로 대담한 놈이어서 그런 모험을 해치우고는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손은 떨렸던 모양입니다. 제대로 훔치지도 못했으니까요. 끝까지 견뎌내질 못한 거죠. 범행의 솜씨를 보면 뻔해요......"
라스콜니코프는 모욕을 느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뻔하다뇨! 그럼 가서 잡으면 될 거 아니오, 지금 곧!" 그는 간악한 기쁨을 느끼면서 자묘토프를 부추기듯이 외쳤다.
"걱정 마세요, 곧 붙잡을 테니."
"누가? 당신이? 당신이 잡는다고요? 공연히 허탕만 칠 거요! 당신네들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것은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거죠? 지금까지 한 푼도 없던 놈이 갑자기 돈을 쓰기 시작하면, 그놈이 바로 범인이라고 인정한단 말이에요. 그런 건 조그만 어린애라도 마음만 먹으면 별문제 없이 당신들을 속일 수 있을 거요!"
"그런데 놈들은 모두 그렇게들 하거든요"하고 자묘토프는 대답했다. "죽일 때는 실로 교활하게 목숨 걸고 모험을 하면서도, 그다음엔 곧장 술집으로 뛰어들어 이내 붙잡히고 맙니다. 돈을 쓰다가 모두 걸려든단 말이에요. 모두가 당신처럼 교활하지는 못하니까요. 당신 같으면 물론 술집 같은 덴 안 가겠죠?"
라스콜니코프는 눈살을 찌푸리고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런 경우에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싶어 그러는 거죠?" 그는 못마땅한 듯이 물었다.
"알고 싶군요." 자묘토프는 정색을 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의 어조와 시선은 매우 진지했다.
"몹시?"
"몹시?"
"좋아요. 나 같으면 이렇게 하죠." 라스콜니코프는 또다시 자기 얼굴을 자묘토프의 얼굴에 가까이 하고, 또다시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다시 아까와 같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자묘토프도 무의식중에 부르르 몸을 떨 정도였다. "나 같으면 이렇게 하겠소. 우선 돈과 물건을 가지고 빠져나오면 그길로 곧장 어디든 한적한, 울타리뿐이고 인기척이 없는 채소밭이나 그 비슷한 곳으로 갑니다. 거기에는 미리부터 무게 1푸드나 1푸드 반쯤 되는 적당한 돌 하나를 봐두는 거예요. 울타리 밑 어느 구석에 뒹굴고 있는, 건축에 쓰다 남은 돌 같은 거 말입니다. 그 돌을 들어 올리면 그 밑에는 반드시 구덩이가 패 있습니다. 그 팬 곳에 돈과 물건을 죄다 넣어버리죠. 넣어버리고는 전과 같이 돌을 올려놓고 발로 꾹꾹 밟은 다음 유유히 그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대로 1년이나 2년, 또는 3년쯤 내버려두는 겁니다. 자, 어디 한번 찾아내보란 말이오! 이래도 찾아낸다면 대단한 솜씨죠!"
"당신은 돌았군요." 자묘토프는 왜 그런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무엇 때문인지 급히 라스콜니코프에게서 몸을 비켰다. 라스콜니코프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얼굴빛은 무서울 만큼 창백해지고 윗입술은 경련을 일으킨 듯 떨기 시작했다. 그는 되도록 가까이 자묘토프에게로 몸을 굽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30초가량이나 있었다. 그는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 문고리가 흔들릴 때와도 같은 무서운 말이 그의 입술에서 춤추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저 입을 열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때요, 만약 내가 그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였다면?" 문득 그는 이렇게 말을 꺼내고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자묘토프는 의아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으나 곧 백지장같이 새하얘졌다. 그 얼굴은 미소로 일그러졌다.
"대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소?" 그는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라스콜니코프는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하시오, 당신은 그렇게 믿고 있었죠? 네, 그렇죠?"
"당치도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전보다 더 믿지 않습니다!"하고 자묘토프는 황급히 말했다.
"드디어 걸려들었군! 참새 씨를 붙잡았어. '전보다 더 믿지 않는다'는 건 전에는 그렇게 믿었단 말이지 뭐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요!" 자묘토프는 몹시 낭패한 듯이 말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도 결국은 이런 결론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였군요?"
"그럼 믿지 않는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때 내가 경찰서를 나온 뒤에 내가 없는 데서 당신네들은 무슨 얘기를 햇습니까? 그렇다면 왜 화약 중위는 졸도했다가 깨어난 나를 신문했습니까? 이봐, 이리 와!" 그는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나면서 종업원을 불렀다. "얼마냐?"
"모두 30코페이카입니다." 종업원은 달려오면서 대답했다.
"자, 이 20코페이카는 팁이다. 어때요, 대단한 돈이죠!" 그는 지폐를 쥔 떨리는 손을 자묘토프 앞에 내밀었다. "붉은 지폐, 푸른 지페로 25루블. 어디서 생겼을까요? 이 새옷은 어디서 나고? ...내가 한 푼도 없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소! 우리 안주인도 이미 조사를 받았을 테니까...자, 그만해두죠! Assez cause!('그만 지껄입시다'라는 뜻) 그럼 안녕히....또 만납시다......"
그는 일종의 야성적인 히스테릭한 감각에 온몸을 떨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감각에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쾌감도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기분은 우울하고 몹시 지쳐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슨 발작을 일으킨 뒤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피로감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아주 가벼운 충격, 조그만 감각에도 그의 기력은 금방 타오르며 긴장했으나, 그 감각이 약해짐에 따라 같은 속도로 급격히 약화되었다.
자묘토프는 홀로 남아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이른바 그 사건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여지없이 뒤집어앞고, 그의 의견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바보다!' 그는 이렇게 단정해버렸다.
라스콜니코프가 바깥문을 여는 순간, 뜻밖에도 안으로 들어오던 라주미힌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두 사람은 바로 한 걸음 앞에 올 때까지 서로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얼마 동안 그들 두 사람은 서로서로를 겨냥해 보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몹시 놀란 표정이었으나 어느덧 분노의 빛이, 거짓 없는 분노의 빛이 무섭게 그의 두 눈에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니, 여기 있었구나!" 그는 목청을 다해 소리쳤다. "침대에서 빠져나와서! 나는 소파 밑까지 찾았어! 지붕 밑까지 찾았단 말이야! 자네 때문에 나스타시야가 얻어맞을 뻔하기까지 했어...그런데 이런 델 와 있었다니? 로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실대로 죄다 말해봐! 고백하란 말이야! 어서!"
"다른 게 아니야, 자네들이 귀찮게 굴어 못견디겠기에 나 혼자 있으려 했을 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침착하게 말했다.
"혼자? 아직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직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바보 같으니라고! 대체 자넨 수정궁에서 뭘 하고 있었지? 어서 바른대로 말해봐!"
"저리 비켜." 라스콜리코프는 이렇게 말하고 그냥 빠져나가려고 했다. 드디어 라주미힌도 분통이 터졌다. 그는 라스콜니코프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비켜달라고? 어시서 비켜달라는 말이 나와! 내가 지금 자네를 어떻게 하려는지 알겠나? 자네를 붙잡아 꽁꽁 묶어가지고 겨드랑이에 낀 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문을 잠그고 가두어버리겠어!"
"내 말 들어,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는 조용히, 그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네의 호의를 귀찮아한다는 걸 자넨 모르나? 모처럼의 호의에 침을 빝는 그런 인간에게 억지로 호의를 베풀려고 하다니, 자네도 괴상한 취미군. 더구나 상대방은 괴로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참아야 한다는데도? 왜 자넨 내가 앓기 시작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나? 나는 어쩌면 차라리 죽기를 원했는지도 몰라. 자네는 나를 괴롭히고 있어, 나는 자네가.....귀찮다고 오늘도 노골적으로 말했는데, 그래도 아직 모자라나?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다니, 정말 괴상한 취미도 다 있군!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런 모든 일이 내 건강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는거야. 쉴 새 없이 나를 자극하기만 하니까. 조시모프도 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아까 돌아가지 않았느냐 말이야! 자네도 제발 나를 내버려두게! 그리고 자넨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어서 나를 완력으로 억제하려는 건가? 정말 자넨 모르겠나, 내가 완전히 제정신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발 좀 가르쳐주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떻게 애원해야 자네는 내게 붙어 다니거나 호의를 베푸는 것을 그만두겠나?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욕해도 좋아, 비열한 놈이라고 해도 좋아. 제발 부탁이니 내버려두게, 내버려둬! 내버려둬!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는 처음에는 이제부터 퍼부으려는 독설에 미리부터 기쁨을 느끼면서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아까 루쥔을 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열중한 나머지 숨을 헐떡이면서 말을 맺었다.
라주미힌은 버티고 선 채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맘대로 어디로든 꺼져버려!"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라스콜니코프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는 별안간 이렇게 외쳤다. "내 말 좀 들어. 분명히 말해두지만, 자네 같은 놈들은 하나같이 수다쟁이와 허풍선이일 뿐이야! 조금만 괴로운 일이 생기면 마치 알을 품은 암탉처럼 그걸 내세우고 다니거든! 더구나 이런 때는 남의 말을 표절하고 다닌단 말이야. 자네들에겐 독립된 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어! 자네들은 고래 기름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고, 피 대신에 치즈를 짜고 남은 찌꺼기 국물만이 흐르고 있어! 나는 자네들을 하나도 신용하지 않아. 자네들의 첫째 일은, 어떤 경우에든 어떻게 해서든지 안간답지 않게 보이려는 거야! 이봐, 좀 기다렷!" 라스콜니코프가 다시금 도망치려는 것을 보고, 그는 더욱더 격노하여 외쳤다. "끝까지 들으란 말이야! 자네도 알고 있듯이, 오늘 우리 집에서 이사를 축하하는 모임이 있어, 어쩌면 벌써들 와 있을지도 모르지. 백부님을 모셔두고 왔어, 손님 접대를 하시도록. 잠시 들러보고 오는 길이야. 그러니까 만약 자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속된 바보가 아니라면, 지독한 바보가 아니라면, 외국 것의 번역물이 아니라면.....알겠나, 로쟈, 사실 자넨 사랑스럽고 총명한 인간이지만, 그러나 바보야! 그러니 만약 자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공연히 신발을 닳게 하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내는 게 어때? 일단 밖에 나왔으니 이젠 하는 수 없지! 자네에게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안락의자를 가져다 주겠네, 집주인에게 있거든.....함께 차라도 마셔....그것이 싫다면 소파에 드러누워 있어도 좋고. 아무튼 우리 옆에 누워 있으면 되는 거야....조시모프도 올 거야, 와주겠지, 응?"
"안 가겠어!"
"거짓말 마!" 라주미힌은 조바심이 나서 소리쳤다. "그건 자네도 모를 거야! 자넨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내니까! 게다가 자넨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나는 이런 식으로 천 번 이상이나 남과 싸우고 헤어졌지만, 언제나 곧 화해를 했어....어쩐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다시 상대를 찾아가게 되지! 그럼 기억해두게, 포친코프네 집 3층이야........"
"그렇다면 뭐야, 라주미힌, 아마도 자넨 호의를 베푸는 만족감 때문에 남이 자기를 때려도 내버려두겠군 그래?"
"누구를? 나를? 그런 걸 생각하기만 해도 그놈의 콧등을 비틀어놓고 말지! 포친코프네 건물 47호, 바부쉬킨이라는 관리의 집이야......"
"나는 안 가겠네, 라주미힌!" 라스콜니코프는 발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내기를 해도 좋아, 아마 오지 않고는 못 견딜걸!" 하고 라주미힌은 뒤쫓듯이 외쳤다. "오지 않는다면....오지 않는다면....자네하고 절교야! 이봐 기다렷! 자묘토프는 저기 있던가?"
"있어."
"만났나?"
"만났어."
"얘기를 했나?"
"했지."
"무슨 얘기를? 아니, 맘대로 해, 말하지 않아도 좋아. 포친코프네 건물 47호 바부쉬킨이야, 잊지마."
라스콜니코프는 사도바야 거리까지 가서 모퉁이를 돌았다. 라주미힌은 생각에 잠긴 듯이 그 뒷모습을 전송하고 있었다. 이윽고 손을 내젓고는 안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계단 중턱에서 멈추어 섰다.
'맘대로 하라지!' 그는 중얼거렸다. '말만은 제법이야. 꼭 성한 사람처럼....아니, 내가 어리석지, 돌았다고 해서 반드시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법은 없거든! 그러고 보니 조시모프도 바로 이 점을 염려하는 눈치였어!' 그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탁 튀겼다. '녀석이 만약....아니, 이대로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어! 투신자살이라도 한다면....이거 큰일 났군! 안 되겠어!'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라스콜니코프를 뒤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을 탁 뱉고는 한시라도 빨리 자묘토프에게 물어보려고 급하게 걸어서 수정궁으로 돌아왔다.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00다리까지 가서 한 가운데 난간 옆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난간에 두 팔꿈치를 괴고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라주미힌과 헤어지고 그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껴 여기까지도 간신히 걸어왔다. 그는 길거리라도 좋으니 어디에든 앉거나 눕고 싶었다. 그는 물 위로 몸을 굽히고 장밋빛으로 불타는 석양이며, 차츰 짙어져가는 황혼 속에 거무스레하게 보이는 집들이며, 왼쪽 강가에 있는 지붕 밑 방의 순간적으로 던져진 태양의 최후 광선을 받아 마치 화염에 싸인 것처럼 빛나고 있는 머나먼 창문이며, 검게 보이기 시작한 운하의 물 등을 기계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특히 그 물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눈 속에서 빨간 동그라미 같은 것이 빙글빙글 돌고, 집들이 좌우로 움직이고, 통행인도, 강변의 길도, 마차도...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이때 그를 또 한 번의 졸도에서 구해준 것은 어떤 기이하고도 놀라운 하나의 형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누군가 오른쪽으로 와서 자기와 나란히 선 것같이 느꼈다. 눈을 들어 보니, 누르스름한 바짝 마르고 갸름한 얼굴에 핏기 어린 푹팬 눈을 가진, 키가 크고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실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분별하지 못하는 듯했다. 별안간 그녀는 오른손으로 난간을 짚고 오른발을 들어 난간 밖으로 내밀며 운하 속으로 뛰어들었다. 더러운 물이 쫙 갈라지며 순식간에 희생물을 삼켜버렸다. 1분쯤 지나자 여인의 몸은 다시 떠올라 조용히 물결을 따라 떠내려갔다. 머리와 발은 물속에 잠기고 등만 내보이면서 흘러내린 스커트는 베개처럼 불룩하게 수면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물에 빠졌다! 물에 빠졌어!" 몇십 명이 아우성을 쳤다. 사람들이 몰려와 양쪽 강가 길에는 구경꾼이 늘어서고, 서로 떼밀며 밀어댔다.
"아이고머니, 저건 우리 아프로시뉴시카가 아니야?" 어디선가 울음 섞인 여인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좀 살려주세요! 어서들 좀 건져주세요!"
"보트를 내! 보트를!" 군중 속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보트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순경 한 사람이 강가의 돌계단을 뛰어 내려가 외투와 장화를 벗어던지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투신한 여인은 마침 돌계단에서 두 걸음쯤 되는 곳을 떠내려가고 있었으므로, 순경은 오른손으로 여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왼손으로는 동료가 내미는 장대를 재빨리 붙들었다. 이러헥 해서 여인은 곧 인양되어 화강암 포석 위에 뉘어졌다. 그녀는 이내 정신이 들어 몸을 일으키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공연히 젖은 옷을 비비면서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이 과했어요, 여러분, 술이 너무 과해서 ......" 아까 그 여자가 아프로시뉴시카의 바로 옆에서 큰 소리로 짖어댔다. "전번에도 목을 매달려는 것을 겨우 풀어놓은 적이 있어요. 나는 지금 가게에 갔었기 때문에 딸년에게 감시하라고 일러두었는데....그새 이런 엉뚱한 짓을 저질렀군요! 이 거리에 사는 여자예요. 끝에서 두 번째 저 집, 바로 저 집........"
군중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순경들은 아직도 물에 빠졌던 여자를 돌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경찰에 대해서 떠들어댔다.......라스콜니코프는 모든 일을 이상하리만큼 냉담하고 무관심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니, 이건 추잡하다....물은 적당치 않아.'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릴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하고 그는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어, 경찰은 어떻게 된 걸까....자묘토프는 왜 경찰서에 안 있을까? 경찰서는 9시 지나서까지 열려 있는데.....'그는 난간을 등지고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그것이 어쨌단 말이야! 그것도 괜찮겠군!'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다리를 떠나 경찰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궁글게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근심조차 사라져버리고, '모든 것에 끝장을 내려고' 집을 나온 그때의 결심은 흔적도 없었다. 그 대신 완전한 무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뭐 이것도 역시 결말이지!' 그는 조용히 강변을 기운 없이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무튼 끝장을 내버리자, 내가 원하는 바니까...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결말일까? 뭐 아무려면 어때! 1아르신 정도의 공간은 있겠지. 아니! 그런데 도대체 무슨 결말이야! 과연 이것이 결말일까? 그놈들에게 말해버릴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에잇...제기랄! 아무튼 나는 피로하다! 어디든 좀 눕거나 앉고 싶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것은 모든 게 너무나 어리석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덴 마음 쓸 필요가 없다. 후우, 왜 이렇게 쓸데옶는 생각만 자꾸 머리에 떠오를까......'
경찰서로 가려면 곧장 가다가 두 번째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아야 했다. 경찰서는 거기서 바로 지척이었다. 그러나 그는 첫 번째 모퉁이까지 오자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 후 옆 골목으로 빠져버렸다. 그러고는 두 거리나 우회하는 길을 잡아 걸어갔다. 거기에는 아무 목적도 없었지만, 어쩌면 1분이라도 여유를 얻으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러자 문득 누군가 귓전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 사이에 그 집 앞에, 그것도 바로 그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이후 그는 여기 온 일도 없고 옆을 지나간 일도 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마구 끌고 갔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현관을 통과하여 낯익은 층계를 따라 4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좁고 가파른 층계는 몹시 어두웠다. 그는 층계가 꼬부라지는 곳마다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창틀이 죄다 떨어져 있었다.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아, 이건 미콜라이와 미트레이가 일을 하고 있던 2층의 그 방이다. '닫혀 있군. 문도 새로 칠하고....세를 놓으려고 내놓은 모양이구나.' 그 다음이 3층, 그리고 4층.....'여기다!' 의혹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방으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마지막 계단을 올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도 역시 새로 수리를 하고 있었다. 안에는 일꾼들이 있었다. 그 또한 그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 그는 왜 그런지 자기가 남기고 간 그대로, 어쩌면 시체마저 마룻바닥의 같은 위치에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들어와 보니, 벽엔 아무것도 없고 가구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창턱에 걸터앉았다.
일꾼은 모두 두 사람분, 둘 다 젊었지만 한 사람은 조금 나이가 많고, 또 한 사람은 훨씬 젊었다. 그들은 이전의 누렇게 헐어 떨어진 벽지 대신에 엷은 보랏빛 꽃무늬가 섞인 새로운 흰 벽지를 벽에 바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왠지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거슬렸다. 이렇게 죄다 바뀌는 것이 슬프기라도 한 듯이 그는 적의에 찬 눈으로 새 벽지를 흘겨보았다.
일꾼들은 꽤 늑장을 부렸는지 이제야 급히 종이를 치우며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의 출현에는 두 사람 다 거의 관심이 없었다. 두 사람은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팔짱을 끼고 귀를 기울였다.
"그 여자가 말이야, 어느 날 아침에 나를 찾아왔더군." 나이 먹은 쪽이 젊은이에게 말했다. "아주 일찍이, 굉장히 모양을 내고 말이야. '넌 왜 내 앞에서 그렇게 정답게 굴지, 왜 그렇게 아양을 떨어?'하고 내가 말하니까, 그녀는 이봐요, 티트 바실리치, 나는 이제부터 몽따아 당신 것이 되고 싶어요'하는 거야. 뭐,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된 거지! 그런데 그 옷차림이 바로 잡지거든! 정말 잡지 그대로야!"
"뭐예요, 아저씨, 그 잡지라는 건?" 젊은 쪽이 물었다. 보아하니 그는 '아저씨'라는 사람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잡지란 건 말이야, 색칠을 한 그림을 말하는 거야. 이곳 양복점에 토요일마다 외국에서 우편으로 부쳐오지. 즉 남자든 여자는 누가 어떤 옷을 입어야 어울리느냐 하는 거야. 말하자면 견본 그림책이지. 남자는 대개 외투를 입고 있지만, 여자는 네가 가진 재산을 다 줘도 모자랄 정도로 굉장한 옷들이야!"
"정말이지 이 페테르부르크에는 뭐든지 없는 게 없군요!" 젊은 사내는 감탄조로 소리쳤다. "어머니와 아버지 말고는 뭐든지 다 있어요!"
"암, 그것만 빼놓고는 뭐든지 다 있고말고!"
나이 많은 쪽이 교훈적인 오조로 결론을 내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일어나서 전에 고리짝, 침대, 옷장 등이 놓여 있던 다음 방으로 갔다. 가구를 치운 방은 몹시 좁아 보였다. 벽지는 그대로였고, 한쪽 구석에는 성상이 안치되었던 자리가 뚜렷이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는 한 바퀴 둘러보고는 처음의 창가로 되돌아왔다. 나이 많은 일꾼이 흘긋 그를 곁눈질해 보았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시오?" 라스콜니코프를 돌아보면서 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대답 대신에 라스콜니코프는 현관 앞으로 나가서 초인종의 끈을 잡고 잡아당겼다. 그때와 같은 벨, 그때와 똑같은 함석 같은 음향! 그는 두 번, 세 번 당겼다. 그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추억을 더듬었다. 그때의 고통스럽고 무섭던 추악한 감각이 점점 뚜렷이, 점점 생생하게 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벨이 울릴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와 동시에 그의 쾌감도 점점 더해갔다.
"대체 무슨 일이오? 당신은 누구요?" 일꾼이 그에게로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방을 빌리고 싶어서"하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둘러보는 거요."
"밤에 방을 얻으러 오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리고 또 방을 얻으려면 문지기하고 같이 와야 해요."
"마룻바닥은 다 닦았군. 페이트칠을 할 거요?" 라스콜니코프는 말을 이었다. "핏자국은 이제 없소?"
"핏자국이라니, 무슨 피요?"
"여기서 노파와 동생이 살해됐잖아요. 여긴 피투성이였는데."
"당신은 대체 누구요?"하고 불안스러운 듯이 일꾼이 외쳤다.
"나 말이오?"
"그렇소."
"그렇게 알고 싶소?....그럼 같이 경찰서로 갑시다, 거기서 가르쳐줄 테니."
일꾼들은 의아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돌아가야 해요, 너무 늦어서. 자, 가자, 알료쉬카. 문을 잠가야지." 나이 먹은 일꾼이 말했다.
"그럼 갑시다!" 라스콜니코프는 태연스레 대꾸하고는, 먼저 방을 나와서 천천히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봐, 문지기!" 대문까지 나오자 그는 큰 소리로 불렀다.
몇 사람인가가 바로 대문 옆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멍청히 보고 있었다. 문지기 두 사람, 여자 한 사람, 가운을 입은 상인, 그 밖에도 한두 사람이 더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문지기 한 사람이 대답했다.
"경찰에 다녀왔소?"
"지금 다녀오는 길입니다. 왜 그러시죠?"
"거기 모두 있습디까?"
"있더군요."
"서장 보좌관도?"
"예, 있더군요. 왜 그러시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은 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면서 그들 옆에 섰다.
"방을 보러 왔다는군." 나이 먹은 일꾼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어느 방을?"
"우리가 일하고 있는 방이지. '왜 피를 닦아버렸지? 여기선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나는 이 방을 빌리러 왔어'하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벨을 울리는데, 끈이 끊어질 정도로 잡아당기더라니까. 그러더니 경찰서로 가자, 거기 가서 가르쳐주마,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거야."
문지기는 의아스러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며 라스콜니코프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하고 그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나는 전직 대학생,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니코프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쉴리의 집 14호에 살고 있소. 거기 문지기에 물어보면 알 거요." 라스콜니코프는 상대방은 보지도 않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거리를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긴 듯한 시들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방엔 들어갔소?"
"방을 보려고."
"뭐 볼 게 있다고?"
"그러지 말고 붙잡아서 경찰에 넘겨버리면 어때요?" 느닷없이 상인이 끼어들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어깨 너머로 상인의 얼굴을 곁눈질해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아까와 같은 나직한 어조로 느릿느릿 말했다.
"그럼 갑시다!"
"그래, 넘겨버려!" 상인은 기운을 내어 상대방의 말을 받았다. "우엇 때문에 이자는 그 말을 끄집어냈지? 아무래도 뭐 좀 짚이는 데가 있어, 안 그래?"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도 알 수 없어"하고 일꾼이 중얼거렸다.
"정말 왜 그러시는 거요?" 진짜 화를 내기 시작한 문지기가 다시 소리쳤다. "왜 이렇게 치근치근 달라붙지?"
"경찰서로 가는 게 겁나는 모양이군?" 라스콜니코프는 냉소를 띠면서 말했다.
"뭐가 겁이 나? 왜 귀찮게 달라붙는 거야?"
"사기꾼!" 여자가 외쳤다.
"그까짓 녀석은 상대할 필요도 없어." 또 다른 문지기가 말했다. 덩치 큰 그는 허름한 외투 앞자락을 풀어헤치고 허리띠에 열쇠 꾸러미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당장 꺼지지 못해!.....사기꾼 같으니....어서 꺼져보려!"
이렇게 말하고는 라스콜니코프의 어깨를 움켜쥐고 한길로 떼밀었다. 라스콜니코프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섰고, 말없이 구경꾼들을 노려보다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괴상한 놈이 많아졌어." 여자가 말했다.
"역시 경찰에 넘길 걸 그랬어." 상인이 덧붙였다.
"공연히 끼어들 필요는 없어." 덩치 큰 문지기가 말했다. "틀림없이 사기꾼이야! 저렇게 자기 쪽에서 먼저 가자는 걸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야. 공연히 상대했다가는 그야말로 간단히 걸려들고 말 테니.....
뻔하지 뭘!"
'자, 가는 거냐, 그만두는 거냐?' 라스콜니코프는 네거리 차도 한가운데 서서, 마치 누군가의 단안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서든 누구 하나 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그가 딛고 서 있는 돌처럼 아무 반응도 없이 죽어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만은, 그 자신에게만은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득, 그는 멀리 200보쯤 떨어진 거리 끝에서 짙어가는 어둠 가운데 모인 군중을 발견하고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와 외침 소리를 들었다.......군중 한가운데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리고 거리 한가운데서 조그만 등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라스콜니코프는 오른쪽으로 돌아 군중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무슨 일에든 집적거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도 이런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차딘찬 냉소를 지었다. 경찰서로 갈 것을 굳게 결심하고 있어서 곧 만사가 끝나버린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