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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
김순희
물속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크고 작은 돌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 요란하다. 컹컹 개 짖는 소리 같다. 담뱃가게 집에서 기르는 사나운 개였다. 등하굣길 그 집 앞에 다다르면 무조건 뛰었다. 개 짖는 소리와 섞인 흙탕물이 개울가에 서있는 내 몸을 금방이라도 끌어당길 것 같다. 개를 피하는 방법처럼 뛰어 건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막하다. 아버지의 부재가 현실로 다가왔다. 나를 업어 개울을 건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버지 등을 다리 삼아 안전하게 개울을 건너다니던 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잠을 깨워주는 탁상시계 알람을 그런 기능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지만 울 수는 없다. 어떻게든 저 물을 건너야 한다. 저 곳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고, 더 멀리 나갈 수 있다. 가방끈을 조이고 치마허리 춤을 가슴께로 끌어올린다. 건널 수 있다. 할 수 있다. 가야만 한다. 아버지 등을 떠올리며 물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무섭냐?” 대답대신 아버지 목을 끌어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버지가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이제 아버지 등에 업히기엔 몸이 많이 무거워졌다. 학기 초 신체검사할 때 잰 몸무게는 32킬로그램이었다. 통지표에 적힌 4학년 때 몸무게랑 비교해보니 5킬로그램이나 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내 엉덩이를 힘줘 추어올렸다.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고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비와 땀에 젖은 등에서 물컹한 사과냄새가 났다. 막 생기기 시작한 젖망울이 젖은 아버지 등에 쓸려 찌르르 아팠다. 학교를 가기 위해선 개울을 건너야 했다. 밤사이 불어난 개울에 돌다리는 자취를 감췄다. 공깃돌을 줍던 길과 개울가 찔레나무와 달맞이꽃들도 모두 사라졌다. 계곡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온 흙탕물은 사과나무가 있는 담장 끝 비탈 흙까지 절반을 휩쓸었다. 빼꼭히 달린 사과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가지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많은 것들을 집어삼킨 거센 물살이었다. 누런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는 물살은 보고만 있어도 몸을 쓸어가는 착시를 일으켰다. 게다가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툭툭 떨어지는 모양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굵은 빗줄기였다. 학교 유리창이 깨졌을 때 날카롭게 흩어지던 유리막대들이 눈에 보였다. 빗방울 끝이 그렇게 무게가 실려 뾰족하다면 참 끔찍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도 눈앞이 어질어질해 개울을 건널 수 없었다. 신체의 변화가 신경 쓰였지만 업힐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장마 전에 꼭 다리를 놓아준다고 했는데….” 등에서 나를 내려놓으며 아버지는 혼잣말을 했다. 개울에 다리를 놓는 것은 아버지 꿈이었다. 우리 집이 있는 마을 입구 개울은 경사가 심했다. 굵은 장맛비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무섭게 불어났다. 정이 많은 아버지였다. 개울을 건너지 못해 동동거리는 발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학교를 가야 하는데 개울을 건너지 못해 울상 짓고 있는 나와 동생. 그리고 이웃집 아이들을 위해 몇 번이고 이동용 다리가 돼주었다. 몇 년째 마을 이장을 맡아보며 다리를 놓아달라고 면사무소에 청했지만, 올해도 힘든가보다. 장마철이 아닌 때는 내 종아리 정도를 찰박거리게 하는 개울이었다. 그런 얕은 개울은 거절당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였다.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기다 뒤를 돌아봤다. 개울을 향해 걸어가는 아버지 발걸음이 늘어졌다. 손에 쥔 새마을운동 모자가, 허벅지까지 둘둘 걷어 올린 바지에 걸려 있었다. 축 처진 팔이 느려진 괘종시계 추처럼 흔들렸다. 나를 업었던 등과 터덜터덜한 걸음을 한참 바라봤다. 고단한 등에서 맡아진 냄새가 오랫동안 코에 남았다. 손가락이 푹 들어가던, 곯아서 물크러진 사과냄새였다.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는 매번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여기저기 길이 끊겼고 산사태에 휩쓸려 내려 온 붉은 토사가 곳곳에 둔덕을 만들었다. 3리에 있는 누구네 집은 통째로 휩쓸려가 세 살 난 아이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울 부잣집으로 입양이 되었다고 했다. 개울 건너 할머니집도 사랑채가 무너졌다. 나라에서 장마 피해 조사를 했다. 방이 한 칸이라도 잘못된 경우 집을 새로 지어준다고 했다. 공짜로 지어주는 게 아니라 몇 십 년 후 같은 거라면서 할머니는 푸념했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 집이 부러웠다. 우리 집은 화장실이 떠내려갔는데 화장실은 보상 대상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장마에 떠내려가서 더 크고 멋지게 지는 거였는데 무척 안타까웠다. 그런데 화장실은 집을 지어주는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하니 화장실 대신 사용하지 않는 바깥방이 떠내려갔으면 좋았을 걸, 속으로만 생각했다. 마을 어른들은 복구 작업에 바빴다. 제일 먼저 신작로를 복구했다. 방학이 되면 매년 서울에서 봉사활동을 오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왔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아이들에게 게임과 노래, 율동을 가르쳐 줄 시간이 없었다. 그 대신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탰다. 방학이 되기를 고대하던 아이들은 심심했다. 언니 오빠들이 오늘은 있을까 내일은 있을까 학교운동장을 배회했다. 2주일 정도 되는 봉사기간을 대부분 복구 작업에 다 써버린 봉사대원들은 서울로 돌아가기 이틀 전 가족노래자랑을 개최했다. 지정곡 <과수원길>과 자유곡을 한 곡씩 부르는 거였다. 대회에 나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다. 웬일인지 아버지는 싫다고 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아버지는 잡에 있을 땐 항상 축음기를 틀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축음기를 틀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곡식 장사를 했다. 멀리 가신 날은 며칠씩 집을 비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멈춘 축음기와 마찬가지로 트럭이 한참동안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말도 별로 없고 자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꾸 술을 마시고 낮에도 잠을 잤다. 툭하면 외상으로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했다. 창피했다. 하루는 양조장집을 가다가 되돌아와 거짓말을 했다. “밀린 외상값 먼저 갚으래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돌아누웠다. 아버지가 누워계실 때면 자주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졸랐다. 그 비행기를 타고 서울 구경도 하고 미국 구경도 했다.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는 아버지인데 조르고 싶지 않았다. 뭔가 징징대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가족노래자랑만큼은 나가고 싶었다. 아버지 빼고 엄마랑 나가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없이 나가는 대회는 가족노래자랑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다 같이 노래 연습하자.” 아버지가 가족을 모아놓고 노래연습을 시켰다. 하루종일 조른 끝에 얻어낸 승낙이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곡은 <클레멘타인> 이라는 노래였다. 노래를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사가 너무 슬퍼, 다른 걸로 바꾸자고 했다.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는 노래라고 꼭 그걸로 하자고 하셨다. 가족노래자랑에서 우리 가족은 1등을 했다. 식구가 많아서 목소리가 제일 큰 덕분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상품으로 받은 탁상시계를 들고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2등 상품이었던 커다란 양은솥에 마음이 가 있던 엄마는 그까짓 주먹만 한 시계를 뭐에 쓰냐며 지청구를 해댔다. 딱히 아버지한테 큰소릴 낸 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아버지를 향한 원성이었다. “우리 순희도 쟤들처럼 서울로 대학을 보내주마.” 문창호처럼 하얗고 매끈한,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가리키며 아버지는 말했다. 알람기능이 신기해 시계바늘을 계속 돌리던 손을 멈췄다.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시계를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행여 엄마가 내 손에서 시계를 빼내 양은솥이랑 바꿀까봐 조마조마했다. 지난겨울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탁상시계였다. 아버지의 윷가락이 모가 되지 않고 윷이 되면서 날아간 탁상시계였다. 운학리 전체 윷놀이 대회가 열렸던 설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발이 푹푹 빠져들도록 폭설이 내렸다. 제대로 된 방한복이나 방한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얇은 누비점퍼와 낡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을 보면 혀를 찼다. 나는 따라가겠다는 고집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먼저 했다. 나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동네 어른들은 내가 인사를 하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 얼굴을 박아놨다고 했다. 그 말이 좋아서 아버지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녔다. 할 수 없다는 듯 아버지는 헐렁한 운동화를 신은 발에 새끼줄을 동여매 눈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엄동설한에 굳이 아버지를 따라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윷을 멋들어지게 잘 쳤다. 아버지 윷치는 솜씨는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때마다 1등을 도맡아했다. ‘모 나와라.’ 하며 던진 아버지의 윷가락은 누구의 것보다 높이 날았다. 목을 뒤로 젖히고 공중을 올려다보면 윷가락들은 핑그르르 돌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네 개의 윷가락은 모두 납작 엎드렸다 모였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 앞에서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간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1등 상품으로 주던 주전자, 냄비 같은 그릇들이 탁상시계로 바뀌어 있었다. 탁상시계를 꼭 내손으로 받아오고 싶었다. 그날 아버지는 1등을 하지 못했다. 두꺼비 등같이 얼굴이 우둘투둘하고 막걸리를 주전자 째 들이키던 주막거리 아저씨한테 1등을 내줬다. 모가 한 번만 더 나왔더라도 이겼는데 내리 윷만 나오는 바람에 아쉽게 도 한 개 차이로 졌다. 아저씨가 상품으로 받은 탁상시계의 진가를 몰라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잔뜩 골이 났다. 어찌나 마음이 상하던지 곱은 발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부상으로 받은 사과 한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사람 좋게 허허거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나는야 흙에 살리라 내 사랑 순이와 손을 맞잡고 흙에 살리라’를 큰소리로 불렀다. 아버지를 따라온 것이 후회됐다. 동여매 준 새끼줄이 끊어져 눈들이 신발 속으로 요란하게 쳐들어왔다. 뿔난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아버지는 반으로 쪼갠 사과 한 쪽을 들려주었다. 미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듯 온기가 돌았다. 하지만 빼앗긴 탁상시계가 눈에 아른거려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계바늘을 돌리며 서울이라는 곳을 상상했다. 가족을 떠나 혼자 살 수 있을까. 아침에 엄마가 깨워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까. 아직도 먼 훗날인 서울 생활이 기대되고 걱정됐다. 탁상시계 알람을 맞추고 또 맞추는 동안 장래희망이 순식간에 갔다왔다했다. 커다랗게 부푼 풍선이 가슴에 들어앉아 내 몸을 한껏 부풀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다리를 놓겠다. 그런 꿈을 쫓다보니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 있었다. 서울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담뿍 심어 준 아버지와의 이별이 거기에 있었다. 탁상시계 알람이 울리기 전 엄마의 통곡에 눈을 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계절이 바뀐 듯 갑자기 추웠다. 사과나무 꼭대기 끝에 몇 개 달려있던 사과가 서리를 맞고 떨어졌다. 물컹했다. 하지만 아버지 등에서 맡아지던 시큼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얼어버린 사과조차 아버지와의 이별을 새기게 했다. 친구들이 찾아왔다. 간밤에 대통령이 죽었다면서 태극기를 조기로 달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우리 집은 달지 않을 거라고 했다. 친구들은, 선생님이 집집마다 꼭 달아야 한다고 했단다. 우리 집에 온 이유가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는지 친구들을 곧바로 돌아갔다. 나는 탁상시계를 넣어 둔 아버지 철제책상 서랍을 열어 태극기를 꺼냈다. 옷 안에 숨겨 김치 항아리들을 묻어두던 광으로 가지고 가 볏짚 속에 감췄다. 혹시나 선생님이 와서 말하면 엄마가 달까싶어서였다. 나도 그렇게 숨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나를 찾을 때 까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다 달아날 때까지 숨어있고 싶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쪼그려 앉아있던 나는 발딱 일어났다.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화책에서 본,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그려져 있던 전구처럼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볏짚 속에 숨겨놨던 태극기를 꺼내 달라붙은 지푸라기를 털었다. 발이 저렸지만 마음이 급했다. 다리를 절뚝이며 광을 나왔다. 태극기를 게양대에, 두 뼘쯤 내려 조기로 달았다. 서리가 내리고 있는지 바람이 불지 않았다.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은 아니지만 조기를 달아 마땅히 애도해야 할 까닭이 있었다. 수 년 동안 마을 이장을 했으니 태극기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되었다. 근조를 알리는 등불이 펄럭이지 않는 태극기를 밝혀 주었다. “아버지, 저 잘했죠?” 태극기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며칠 뒤 여러 사람들이 돈을 받으러 오기 시작했다. 많고 적은 금액들이 아버지가 마시던 막걸리처럼 주르륵 흘렀다. 어떤 것들은 너무 적어서 치사했다. 고물장수 아저씨한테 솥단지 두 개만 줘도 받을 수 있는 천오백 원을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다. 불어난 개울을 건너지 못할 때 나보다 어린 그 집 애도 아버지 등에 업혀 건넜다. 사람이 죽었는데 저걸 꼭 받아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셨다고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분했다. 급작스레 바뀐 환경을 그렇게 깨닫는 것이 무서웠다.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뚝뚝 부러지던 나뭇가지가 보였다. 눈물이 터지려고 했다. 절대 울면 안 된다는 오기가 생겼다. 나는 나뭇가지가 아니었다. 입을 앙다물었다. 한껏 부풀려져 가슴에 들어있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졌다. 풍선은 한순간에 푹 꺼져 내렸다. 엄마는 기다려주면 다 갚겠다고 약속했다. 신작로 건넌 마을 아줌마는 아저씨가 죽자 자기는 빚 못 갚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도 떼먹지 않겠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그런데 빚쟁이들만 올 뿐 아버지가 꿔 준 거라면 갚으러 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트럭에다 곡식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했던 아버지였다. 장사를 하면서 돈을 자주 빌리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곡식을 넘기고 돈을 받지 못했다. 가져간 사람은 연락도 되지 않았다. 꽤 큰돈이라고 엄마가 얘기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꾸 술을 마셨던 거라고 했다. 그게 가슴에 쌓여 돌아가셨다고, 신뢰에 대한 원망이었는지, 너무 분해서 그랬는지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다. 고작 마흔여섯이었다.
개울을 무사히 건넜다. 가슴께로 끌어올렸던 치맛자락이 물살에 쓸려 엉덩이까지 흘러내렸다. 거센 물살은 윗도리와 머리에까지 튀어 비 맞은 송아지 꼴이 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해냈다는 생각도 잠시, 어떻게 건너왔는지 몸도 마음도 덜덜 떨렸다. 아버지 등을 생각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가 개울 건너에서 입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잘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다리에 힘 꽉 주고 건너면 된다.” 눈이 시큰거렸다. 꾹 눌러 감았다 다시 떴다. 그새 아버지는 사라지고 없었다. 개울을 건너왔던 목소리도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고 들리지 않았다.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은 치마 물기를 짜고 손바닥을 폈다. ‘탁상시계 건전지 꼭 살 것’ 이라고 써 놓은 글씨가 흐릿했다. 주먹을 꼭 쥐고 빨리 걷기 시작했다. 몇 굽이 너머에 있는 학교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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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꼼꼼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천문인협회 김순희 작가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저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터라 이런 동화같은 내용을 읽으면 무척 부럽더라구요.
저도 꼼꼼이 읽었습니다. 육안으로 9군데에 오타가 보이는군요. 급히 옮기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본문을 다 읽고 맨아래 산문집의 표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산문집 제목을 정말 인상 깊게 정하셨네요. 엉겅퀴꽃입니까? 그 위에 그려진 여섯글자 의성어에서 '순희야, 순희야...' 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 말입니다.
역시나 예리하십니다.
말씀처럼 옮겨놓고서는 저녁약속이 있어 급히 나가느라고 찬찬하게 읽어보지를 못했어요. ^^
이번에 김순희 수필가의 첫 산문집을 받았는데, 내용이 좋아서 일부를 옮겨보았습니다.
@전순복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 댓글의 '꼼꼼이'를 '꼼꼼히'로 정정합니다.
책 표제 다시 봐도 베리 굳~~~
촌스러워도 자신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순희씨의 말에 힘입어, 저도 제이름을 더 이상 구박하지않기로 작정했습니다.
허거걱~
선생님,이 많은 걸 어찌...
부끄럽습니다.
챙겨주시는 그 마음 잊지않겠습니다.^^;;
같은 날 발송했는데 들어가는 날이
지역에 따라 하루이틀 차이가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글이 좋아서~~^♡^~~
다 읽었는데 단편소설을 읽는듯 가슴이 찡했어요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읽는듯 했습니다.
김순희 선생님 수필집
상재 정말 축하합니다.
시력이 썩 좋치않아
문협 카페에 올려진
김순희 선생님의 수필은
스마트폰으로나 pc 상으로는
읽을수는 없지만
보내주신 책은 깊어가는
가을밤에 시간가는줄
모르게 정성껏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을 수 있는 행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용정선생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