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선생이 살았던 시절의 춘설헌(春雪軒) 전경
춘설헌(春雪軒) 내부
의재선생 묘로 올라가는 계단
오늘의 장소 : 광주시 동구 약사암과 춘설헌 탐방
일 시 : 2024.05.09(목)
참 가 : 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8명
불 참 : 김상문(서울행) 김재일(신병) 박냠용(내자 병원 수행) 정원길(지병) 등 4명
회 비 : 80,000원
식 대 : 69,000원(애호박찌개 1, 김치찌개 7, 돼지 불고기 1 등 77,000원 중 과오 납한 8,000원을 공제한)
금일 잔액 : 11,000원
이월 잔액 : 719,000원
총 잔 액 : 730,000원
10시에 부곡정에 모인 친구들은 7명(강공수 김영부 나종만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등)이었다.
10시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늘로 들어가면 춥고 햇볕으로 나오면 더운 그런 날씨였다. 그래서 그늘로 가다가 추우면 햇볕으로 나와서 걸었다. 증심교를 지나면서 올라가는 길은 그러한 길의 연속이었다. 그늘과 햇볕이 교대로 찾아오는 길을 걷고 있노라니, <의재미술관> 앞에 있는 나무 대크 다리에서 ‘박하 차 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원한 박하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함께 가고 있던 강공수가 보이지 않더니 잠시 후 강공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하 차 시음행사’를 하면서 오늘만 춘설헌(春雪軒) 개방을 하고 있어서 뒤따라오지 않고 그 행사장으로 가고 있으니 우리도 합류하고 싶으면 지금 내려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말을 전하였더니, 윤상윤은 이용환을 따라 약사암을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김영부와 나는 발걸음을 돌려서 의제미술관 앞으로 내려왔다.
나무다리에는 이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로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인솔 교사의 지도로 각자 자리에서 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춘설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춘설헌 쪽에서도 역시 초등학생들이 교사들의 인솔로 춘설헌 탐방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 나는 의제선생의 묘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25미터쯤 언덕길을 갔을 때, 가파른 돌계단이 나왔다. 30계단은 족히 되어 보였다. 계단의 끝에 <毅齋許百鍊墓(의재허백련묘)>라는 검게 이끼가 낀 석비(石碑)가 있고 또 4계단을 올라 상석(床石)과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또 6계단을 올라가 둘레 석을 한 봉분이 있었다. 묘(墓)의 좌향(坐向)은 손좌(巽坐) 건향(乾向) 즉 북서(北西, 10시 방향)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잠시 의재선생의 생전 모습을 떠 올렸다가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서 춘설헌으로 갔다. 춘설헌 앞에는 문화해설사가 한창 춘설헌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무리들 속에 먼저 왔던 강공수 나종만 윤정남이 섞여서 해설을 듣고 있었다. 밖에서 설명이 끝나고 춘설헌 안으로 들어갔다. 방 2칸을 터서 한 방에는 듣는 사람들이 앉고, 한 칸에는 그림들과 해설사가 설명을 하도록 해 놓았다.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모임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넷으로 춘설헌 방문을 원하는 신청을 예약하여 모인 사람들이라 하였다.
해설사는 춘설헌(春雪軒)의 내력(來歷)을 설명하고 있었다.
내용은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淳)이 일제(日帝) 시대에 민족주의 언론인으로 살다가 모든 활동을 멈추고 이곳에 자기의 호를 따서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살다가 죽으면서, 최흥종(崔興琮)에게 주니 그는 이 거처를 역시 자기의 호를 따서 오방정(五放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살았다가, 그가 죽으면서 의재(毅齋)선생에게 주니 의재는 이곳을 춘설헌(春雪軒)이라 이름을 정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다.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淳, 1891~1936, 광주출신, 1919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민족독립운동가, 언론인, 동아일보에 <횡설수설> 집필한 독립운동가)과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20대까지 장터의 싸움꾼으로 깡패 짓을 하다가, 양림교회 유진 밸 선교사의 도움으로 기독교에 귀의, 나병 퇴치운동에 평생을 바침, 광주 소태동 나협회와 여수 애양원과 고흥 소록도 나병원을 창설한 사회운동가이며 기독교 목사)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다.
의재(毅齋) 선생은 1946년에는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차를 생산하고, <삼애학원>이라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이듬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과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사회사업에도 열정을 쏟은 분이다. 또한 한국화 분야에서는 그분만의 지평을 확보한 위해한 화가로서 활동하였고, 만년에는 광주(光州)의 무등 산록의 산골짜기에 묻혀 자연을 벗 삼아 차(茶)를 가꾸며 보내신 분이었다.
그리고 여기 <의재미술관>의 자리에는 한 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삼애장(三愛庄)이라는 여관(旅館)이 있었는데, 그것을 헐고 <의재문화재단>이 2001년에 지금의 <의재(毅齋)미술관>을 지은 것이다.
의재(毅齋)선생은 한국화가(韓國畵家)이며, 일반적인 서예인(書藝人)이 아닌 시(詩)·서(書)·화(畵) 겸전의 서도가(書道家)로서 그 분의 화려한 약력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리는 음악정자에 모여서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의 <어머니의 마음>, 윤춘병 작사 백재훈 작곡 <어머님 은혜>를 부르고, 다시 식당으로 내려와서 뒤늦게 온 장휘부까지 합류하여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밀린 이야기를 마음껏 하다가 헤어졌다.
첫댓글 산행 후기를 읽으므로 비로소 그 날 하루를 행복하고 의미있게 종지부를 찍을 수 수려한 글 솜씨를 보여준 산우회장께 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