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보리향/이온규
마음의 궁지(窮地)에서 부르는 노래
〈문학의전당 시인선〉 202. 2004년 『강원작가』를 통해 등단한 박재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사물과 현상의 이면에 대한 고찰과 삶의 구체적인 측면을 통해 생의 본질을 찾으려는 치열한 몸짓이 화인처럼 박혀 있다는
평가를 받은 『쾌락의 뒷면』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특유의 ‘수벌거리는 시’를 꺼지지 않은 전쟁의 화염처럼 이어가며 한층
능란해진 언어의 부림과 차분하게 깊어진 사유를 보여준다. 특히 죽음과 삶의 길항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존재의 처연함에 대한 탐색은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인데, 그것은 존재와 그 이면을 물어뜯고 생각이 생각을 물어뜯어 낭자한 피로 얼룩진 고투의 현장이 곧 시의 현장이기도 한 까닭이다.
생사의 나루터 같은 그 경계의 선상에서 핏발이 서도록 바라본 존재와 비존재의 혼재 속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을 쫓아가는 길은 아마도 박재연 시인의
시를 쫓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저자 : 박재연
강원 인제에서 태어나 아직 강원에서 살고 있다. 2004년 『강원작가』를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쾌락의 뒷면』이 있다. 현재 〈시연〉 동인과 강원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의
말
제1부
그림자
6의 자세
벚꽃나무에 걸어둔 혼잣말
단답형 대화체
알, 맛!
얼룩을 없애는 순서
홍옥분의 주방에서
생활의 달인
쥐술
통화권이탈지역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
누구시냐고 물었다
들임예(澧)
지네
제2부
뒤가 사라졌다
말빚
꽃들의
골짜기
온도의 감정
슬픈 몽족
청춘 마감
초극하는 혼
당신의 삼우제
길상사에서
새
시인
장화 클럽
고요 갈급
하루
제3부
머리카락만
웬금으로도 환하게
햇아 같이
모르겠어요
시제
깻망아지 뿔을 쓸며
꽃구경 값
타임머신 알츠하이머호
이드르르, 복상낭구 피어날 때
잉어
들은 숭 만 숭
이 늦은 후회
어떤 전조
작은 오빠의 콩 농사짓는 법
탈수
제4부
느낌의 불편한 온도
가을 절벽
호두마루
발로(發露) 참회
마네킹
화요일의
소파
황혼의 오 분간
빙어
소년 가을
귀신사(歸信寺)
목관
성녀는 어느 바닷가에 닿고
한
열흘만 안 될까요?
경(經)을 닫다
해설 마음의 궁지(窮地)에서 부르는 노래 / 우대식(시인)
호두마루
건드리면
터지는/울음이/방안에 가득하다//가기 싫다는 어머니를/본드처럼 붙으려는/어머니의 발을//억지로 떼어놓고/돌아와/방문을 열자//노란 포플린 이불
속에서/급하게 구겨 넣은 몸빼 옷이/바지 한 끝을 내밀고 있다//북원신협 로고가 찍힌 파란 부채가/뒷수습을 헤쳐놓고 있다//포플린 이불에 이마를
박고 밤을 팬다/송곳두통이 새벽을 찔러온다//설탕은 모든 걸 치료할 수 있나?//어머니가 드시던 땅콩 캐러멜 한 봉지/호두마루 한 통 다
먹는다//설탕에 취한 울음/걷잡을 수 없어/오침(午枕)이나 뒤친다
소년 가을
자취하던 옆방에 돗자리장수 모녀가 쥔을
들었다/날은 치운데 나일론 이불 하나로 겨울을 나려는지/군불 때는 연기가 자주 흙벽을 넘어왔다/저 아래데 말씨를 느릿느릿 쓰는 모녀의 밥상에
불려가서/남편은 군대 가고 전국을 떠돌며 댓자리 파는 내력을 듣는 저녁/한방 쓰며 자취하던 희숙이는 이질에 걸려 곱똥을 누고/뒷간을 들락거리는
희숙이가 안됐는데 부엉이는 우는 밤이었다/눈이 헐끔해지고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소년 가을이 놀다 가는 밤이었다--- 본문 중에서
마음의 궁지(窮地)에서 부르는 노래
1.
박재연의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의미망은
죽음과 삶의 길항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존재의 처연함이다. 죽음이야말로 시인의 입장에서는 선승의 화두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존재와 그
이면을 물어뜯고 생각이 생각을 물어뜯어 낭자한 피로 얼룩진 고투의 현장이 시의 현장이기도 한 까닭이다. 생사의 나루터 같은 그 경계의 선상에서
핏발이 서도록 바라본 존재와 비존재의 혼재 속에서 시인은 되도록 몸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천둥소리처럼 한번은 오고야 말 운명을 좀
더 자연스럽게 혹 자연에 가깝게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크레바스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코스모스로 갔을까? 카오스로 갔을까?//오
추워 너무 가려워. 저 나무들 나무나무 하면서 귀의하잖아. 나는 수목장은 안 할 거야. 사람을 먹은 성성이가 되어서 그늘이나 넓힌다면 나는
싫어요. 그냥 풀어지면 좋겠어. 흩어지면 좋겠어. 참숯가마의 굴뚝을 떠난 연기처럼. 연기(緣起) 연기(緣起) 하면서 흘러갈 거야. 구름 이쁜
염소로 흘러갈 거야.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 부분
“그냥 풀어지면 좋겠어”라는 시구야말로 어쩌면 시적
화자의 죽음에 대한 참된 욕망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수목장의 나무를 전설 속의 짐승인 ‘성성이’로 표현한 이면에는 시인의 염결성이 놓여 있다.
육체가 지닌 응집성이 이생이라면 저생은 불교적 용어를 차용한 ‘연기’와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이다. ‘성성이’는 한낱 짐승을
기표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관계성을 포함한 육체성을 총괄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시인의 꿈은 ‘구름’이 되어 흔적도
없이 흘러가고 싶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바로 삶이 지닌 지난한 몸부림이 자리하고 있다.
생사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인 바, 그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예측할 수도 없으며 한 실존에게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서른셋에 세상을 떠난
조카와 그녀가 남긴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배기 혈육을 바라보다 시인이 문득 내뱉은 말은 “넌 나쁜 년이야”(「청춘마감」)라는 무심한 욕설이다.
“방금 누가 이 세상에 다녀갔나?/오긴 왔었나?”(「청춘마감」)라는 물음은 장자의 나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박재연 시인의 시가 이
방향으로 더 나갔으면 이른...마음의 궁지(窮地)에서 부르는
노래
1.
박재연의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의미망은 죽음과 삶의 길항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존재의 처연함이다.
죽음이야말로 시인의 입장에서는 선승의 화두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존재와 그 이면을 물어뜯고 생각이 생각을 물어뜯어 낭자한 피로 얼룩진
고투의 현장이 시의 현장이기도 한 까닭이다. 생사의 나루터 같은 그 경계의 선상에서 핏발이 서도록 바라본 존재와 비존재의 혼재 속에서 시인은
되도록 몸을 가볍게 하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천둥소리처럼 한번은 오고야 말 운명을 좀 더 자연스럽게 혹 자연에 가깝게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크레바스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코스모스로 갔을까? 카오스로 갔을까?//오 추워 너무 가려워. 저 나무들 나무나무 하면서
귀의하잖아. 나는 수목장은 안 할 거야. 사람을 먹은 성성이가 되어서 그늘이나 넓힌다면 나는 싫어요. 그냥 풀어지면 좋겠어. 흩어지면 좋겠어.
참숯가마의 굴뚝을 떠난 연기처럼. 연기(緣起) 연기(緣起) 하면서 흘러갈 거야. 구름 이쁜 염소로 흘러갈 거야.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 부분
“그냥 풀어지면 좋겠어”라는 시구야말로 어쩌면 시적 화자의 죽음에 대한 참된 욕망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수목장의 나무를 전설 속의 짐승인 ‘성성이’로 표현한 이면에는 시인의 염결성이 놓여 있다. 육체가 지닌 응집성이 이생이라면
저생은 불교적 용어를 차용한 ‘연기’와 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이다. ‘성성이’는 한낱 짐승을 기표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관계성을 포함한 육체성을 총괄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 시인의 꿈은 ‘구름’이 되어 흔적도 없이 흘러가고 싶은 것이다. 그
이면에는 바로 삶이 지닌 지난한 몸부림이 자리하고 있다.
생사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인 바, 그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예측할 수도 없으며 한 실존에게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서른셋에 세상을 떠난 조카와 그녀가 남긴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배기 혈육을 바라보다 시인이 문득 내뱉은 말은 “넌 나쁜 년이야”(「청춘마감」)라는 무심한 욕설이다. “방금 누가 이 세상에
다녀갔나?/오긴 왔었나?”(「청춘마감」)라는 물음은 장자의 나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박재연 시인의 시가 이 방향으로 더 나갔으면
이른바 노장의 시를 연출했겠지만, 시를 읽다보면 생과 사의 간극에서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보다 치열한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인의 무심한 욕설의 어투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번뇌에서 비롯된 자기 고백에 가깝다. 이 번뇌는 지상과 천상의 갈등을 의미하며 성과
속의 사이에 끼인 자의 고통을 보여준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거처는/딱 한 움큼/언제든 헐어버리고/날아갈 수 있는 무게다//18평
낡은 주택에/몸을 묶고/저녁이면 어김없이 돌아와/비상을 꿈꾸며 잠이 든다//봄꽃은 한꺼번에 터지고/꽃에 홀려 들에 나간 봄날/날개를 힘껏 벌리고
다이빙 자세로/배추밭에 머리를 박고 죽은/산비둘기를 보았다//온몸으로 투신한 새가/노려본 곳은 하늘이 아닌/지상의 먹이 쪽/허공에 수리 두
마리/먹이를 찾느라 빙빙 돌고 있었다 ―「새」 전문
시인에 대한 알레고리로 새를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는 천상과 지상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정조는 비애에 그 끈이 닿아 있다. 지상에서의 삶은 늘 비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어쩌면
그러한 사람살이야말로 보편적인 의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날개를 힘껏 벌리고 다이빙 자세로/배추밭에 머리를 박고
죽은/산비둘기”에 대한 형상에는 실존의 비극성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결국 먹이를 찾아 떠돌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예언이 비둘기의
죽음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상의 한구석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의 종착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몸으로 투신한 새가/노려본 곳은 하늘이 아닌/지상의 먹이 쪽”이라는 구절은 시인의 명철한 시선이 길어올린 치열한 의식의 산물이다.
지상의 먹이를 향해 허공을 빙빙 돌고 있는 수리야말로 우리들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지상―천상―지상으로 이어지는 의식 혹은 공간의 변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실존의 조건이다. 시인의 몸부림은 ‘그러한 것’이라는 절대 명제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것’에 대한 분노,
고통이 박재연 시인의 시적 동기의 한 구조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체 게바라나 전혜린 같은 인물에 대한 명상도 그 분노나
고통을 넘어서는 한 방식이다. “당신이 디뎠던 땅조차 입 맞출 수 있는 정신의 매혹자”(「초극하는 혼―전혜린」)라고 전혜린에 대해 경의를 표했을
때 그것은 지상의 괴로움을 통과한 자로 전혜린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통과는 극복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이 시집의 어디를
보아도 섣불리 주어진 실존의 현실을 극복한다거나 깨달았다거나 하는 포즈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의 매혹자”로서 전혜린에 대한 명상은
“영혼과 영혼이 부딪히는 그 찰나에 보는 영원”(「초극하는 혼―전혜린」)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이 지상을 견디려는 자의 영혼은 상처투성일
터이지만 “찰나에 보는 영원”이야말로 깨닫고자 하는 자들의 궁극의 욕망인 까닭이다.
이렇듯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존재의 비애를
품고 있으면서도 순간 혹은 찰나에 보는 영원 같은 절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박재연 시인의 시를 더 치열하고 구체적인 삶을
현장으로 내모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재연 시인의 시를 보다 현실에 뿌리박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이 시집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시 「지네」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몸의 진경을 보여준다. 인간의 척추에 잠재하는 지네
한 마리는 섬뜩하고도 눈물겨운 형상을 하고 있다.
살 발라낸 사람의 등뼈는/한 마리 지네를 닮았다/열아홉 개의 절지를
거느리고/벼랑을 타는 지네를 닮았다//핏줄과 권속을 거느리고 집안의 장남으로 삶의 벼랑을 타던 그가 삼성병원 11층 암 병동에서 머리를 밀었다
무균실 저 안쪽에서 겹겹의 문이 차례로 열리며 링거 꽂은 지지대를 밀고 그가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오후의 햇살은 잠시 마른 등뼈 위로 흘러내린다
스물네 개의 척추에서 흘러내린 등뼈의 이름들 경추 만곡 흉추 만곡 요추 만곡 골반 만곡이라 불리는 해부학 용어들이 흘러내린다 지네의 절지들이
흘러내린다 척추뼈를 이르는 해부학 용어는 눈물겨운 단어 굽이굽이 돌아가야 비로소 진경을 보게 되는, 힘에 부쳐도 포기할 수 없어서 더 눈물겨운
단어 그가 골수를 채취해 간 골반 만곡을 보여줄 때 지네 한 마리 기어가다 움찔 놀라는 형상이다 다시 벼랑을 타려고 절지를 움직이는 형상이다
―「지네」 전문
“열아홉 개의 절지를 거느리고/벼랑을 타는 지네”에 비유되는 사람의 등뼈에 대한 고찰은 빼어난 시적 심미안을
보여준다.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인고의 인생을 살아낸 그래서 몸이 병든 인물이다. 병든 그의 등에 흘러내린 스물네 개
등뼈는 만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굽이굽이 돌아가야 비로소 진경을 보게 되는” 등뼈에서 박재연은 한 인생을 읽어내는 것이다. “기어가다가
움찔 놀라는” 지네의 형상은 “핏줄과 권속을 거느리고 집안의 장남으로 삶의 벼랑을 타던 그”와 겹치면서 융숭한 삶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몸에
문신처럼 남은 인고의 흔적에서 삶의 숭고성을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더욱이 “다시 벼랑을 타려고 절지를 움직이는 형상”에서 물리적인 고통이나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생명으로 나가려는 본질적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인류가 살아온 길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지네」는 박재연이 발견한
탁월한 삶의 알레고리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몸에 얽힌 비의와 비애를 동시에 포착한 아름답고도 슬픈 시다. 그리고 강하다.
박재연의
시는 봄날의 소풍과도 같다. 언제 어디서나 대상과 대상을 마주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가 궁벽한 곳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놓고도 시선이 따스하다는 것은 인격과 관련이 깊을 터다. 시라는 것이 지나치게 수법에 몰두할 때 가지게 되는
공소함이 박재연의 시에는 없다. 소박한 인격이 시에 고스란히 배여 있다.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벼락과 같은 천둥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의 말 한마디, 꽃을 찾는 나비의 날갯짓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깊은 산에 이드르르 복상낭구 피어날 때/나비처럼 후루루 날아가면
좋겠네”(「이드르르, 복상낭구 피어날 때」)라는 시를 읽다보면 이미 지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드르르 꽃이
피어나고 태산 같은 꽃잎이 날리는 곳에서 자신의 쓸쓸함에 강돌을 얹고 시를 쓰는 박재연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자신의 마음을
궁지로 몰고 가면서 더 큰 마음을 내는 반본환원(反本還元)의 정신이 그의 시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박재연의 시집 『지네』를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적잖이
당황에 곁을 내주어야 할 듯싶다. 프로필 사진엔 분명 아리따운 여성이 웃고 있는데 시집 제목 『지네』에서부터 ‘6의 자세’, ‘쥐술’, ‘칼’,
‘체 게바라의 혁명’, ‘야생’, ‘소년 병사’ 등 남성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니 미혹(迷惑)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 미혹이 바로 박재연
시의 힘이다. 내가 아는 한 박재연은 누구보다 여성적이며, 맑고 차가울 만큼의 영성을 지닌 시인이다. 그 영성으로 “소년 병사의 비장한
눈빛//그 빛나는 처연의 미학”(「 슬픈 몽족」)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제는 내가 그의 충견이 되어 몸을 일으킬 때/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그림자」)나설 만큼 그녀의 시적 자세는 늘 겸손하고 겸허하다. 하여 시집을 덮고 나면 잠시 곁을 내주었던 당황이
매혹(魅惑)으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영 (시인)
박재연의 시는 봄날의 소풍과도 같다.
언제 어디서나 대상과 대상을 마주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가 궁벽한 곳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놓고도 시선이 따스하다는 것은 인격과 관련이 깊을 터다. 시라는 것이 지나치게 수법에 몰두할 때 가지게 되는 공소함이 박재연의 시에는 없다.
소박한 인격이 시에 고스란히 배여 있다.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벼락과 같은 천둥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의 말 한마디, 꽃을 찾는
나비의 날갯짓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깊은 산에 이드르르 복상낭구 피어날 때/나비처럼 후루루 날아가면 좋겠네”(「이드르르, 복상낭구 피어날
때」)라는 시를 읽다보면 이미 지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드르르 꽃이 피어나고 태산 같은 꽃잎이 날리는
곳에서 자신의 쓸쓸함에 강돌을 얹고 시를 쓰는 박재연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자신의 마음을 궁지로 몰고 가면서 더 큰 마음을 내는
반본환원(反本還元)의 정신이 그의 시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 우대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