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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29일 금요일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 복자들은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복자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는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성대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한편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게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말씀의 초대
엘아자르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한다고 이야기하고는 바로 형틀로 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 마카베오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6,18.21.24-31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청소년의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청소년 세계의 알을 깨뜨리고, 그 세계에서 죽지 않으면 어른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말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밀알이 자기 세계를 깨뜨리지 못하면, 죽지 않고 밀알로 계속 남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변환기에 옛 삶에서 죽지 못하면 퇴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참으로 잘 준비한 분들입니다. 1791년, 양반이었던 윤지충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를 거부하여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원리를 따르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오늘 한국 천주교회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신앙의 씨앗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깨야 하는 껍데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라는 온갖 유혹, 탐욕, 시기, 질투, 미움이라는 죄의 껍데기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껍데기를 깨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청하며, 오늘 우리도 조금씩 이 세상의 껍데기를 깨고 성령의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천주교는 사교(邪敎)가 아니라 진정한 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윤지충 바오로와 124위 동료 순교자 기념일에 다블뤼 주교님께서 쓰신 복자(福者) 윤지충 바오로(1759~1797) 대한 약전을 읽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는 현재 충남 금산군에 위치해 있는 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산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그곳에 가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진산 성지(대전 교구 관할)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가문은 여러 정관계 인사들을 배출한 명가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예의 바르고 총명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25세 되던 1783년 과거에 응시해서 진사(進士)를 취득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물론 가문의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컸습니다.
그런 윤지충 바오로가 1784년 겨울 경성에 머물렀을 때,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놀러 갔다가 운명 같은 책을 두 권 발견합니다. 그 유명한 ‘천주실의’와 ‘칠극’입니다.
순식간에 두 권의 책을 읽은 윤지충 바오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두 권의 책을 사본으로 만들어 계속 탐독하였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갈증은 그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 있는 여러 가톨릭 관련 서적들을 읽은 그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좋은 교리교사로부터 예비자 교리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가톨릭 관련 서적을 스스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선포한 윤지충 바오로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과 진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 자발성, 그 적극성 앞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지충 바오로의 하느님과 진리, 새로운 세계와의 달콤했던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조상제사 문제, 신주 문제를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그는 즉시 관아로 자진 출두했습니다.
진산 군수와 윤지충 바오로 사이에 이루어진 심문 기록이 아직도 정확히 남아있습니다.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신앙인이었으며,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수: “소문이 매우 심각한데, 근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군수: “그것이 사교가 아니냐?”
윤지충 바오로: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진산 군수는 어떻게 해서라도 윤지충 바오로를 잘 설득해서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군수는 탄식을 터트리며 그를 전주 감영으로 이송시켰습니다. 전주 감영의 감사가 또 다시 묻습니다.
감사: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
윤지충 바오로: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감사: “그렇다면 천주의 종교가 사교가 아니더냐?”
윤지충 바오로: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감사: “너는 죽게 되더라도 이 종교를 버리지 못하겠느냐?”
윤지충 바오로: “만약 제가 높으신 아버지를 부인하게 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에, 견고한 가톨릭 신앙 때문에, 임금 앞에는 반역자, 부모 앞에는 불효자, 친구들 앞에서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윤지충 바오로는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드러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에 대한 사형은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30대의 곤장을 맞고 난 그에게는 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이 언도되었습니다. 1791년 12월 8일 그는 33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살려는 마음: 우리를 지옥으로 만드는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4-25)
찬미 예수님!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당혹스러운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사랑하라, 힐링하라, 아프지 마라"라고 가르치는데, 주님은 정반대로 우리 자신을 미워하고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영원한 생명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은 곧 지금 여기서 누리는 완벽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뼈아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왜 내 목숨을 미워하고 죽이러 가는데 행복해진단 말입니까?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행복입니까, 아니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행복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인간을 지옥처럼 불행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돈이 없는 것도, 병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오직 나를 보호하려는 얄팍한 '자아'에게서만 뿜어져 나옵니다.
어떤 숭고한 목적이나 하느님을 위해 내 목숨(자아)을 기꺼이 내어놓기로 결심하는 순간, 나를 보호하려던 자아는 완전히 힘을 잃게 되고, 자아가 죽었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아예 발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소멸한 바로 그 빈자리에 쏟아져 들어오는 우주적인 평화, 그것이 바로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가면서도 누렸던 충만한 기쁨의 정체입니다.
이 기막힌 심리적, 영적 원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 '명량' (2014)에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330척의 거대한 왜군 함대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에게 남은 배는 고작 12척뿐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고, 장수들마저 싸움을 포기하고 배를 돌려 달아나려 했습니다. 압도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두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대장선에 홀로 선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은 11척의 배를 뒤에 남겨둔 채, 홀로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배를 몰고 나아갑니다. 수백 척의 적선이 쏘아대는 포화 속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완벽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홀로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배를 몰고 나아가는 장군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까요? 아닙니다.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내 한 목숨을 온전히 미워하며 내던진 순간, 장군의 영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평화와 벅찬 자존감으로 타올랐습니다.
반면, 11척의 배에 숨어서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라고 바둥거리던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은 행복했을까요? 그들의 영혼은 수치심과 극도의 공포에 짓눌린 참혹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자아를 살리려 할수록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들을 질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밀알이 되어 앞장서서 죽어가는 대장선의 그 숭고한 빛을 보았을 때, 숨어있던 장수들의 영혼에도 불이 붙었습니다. 그들 역시 '살고자 하는 얄팍한 자아'를 버리고, 기꺼이 노를 저어 사지의 바다로 뛰어들며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냅니다. 나를 버리는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적 같은 구원의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철저히 자아의 생존 본능에서 옵니다. 내가 손해 볼까 봐, 내가 무시당할까 봐, 내가 아플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자아를 우상으로 모시고 사는 인간은 하루 24시간을 방어막을 치느라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살기 위해 도망 다니는 비겁한 삶은 자아를 한없이 비대하게 만들고, 커진 자아만큼 잃을 것이 많아지기에 불안과 초조,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 위대한 원리를 자기 삶의 궤적으로 뼈저리게 증명하신 분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124위 순교 복자들입니다. 그중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본래 궁중의 약을 짓는 내의원 소속의 엘리트 약제사였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을 다했지만,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자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배교하고 맙니다. 풀려난 그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벼슬을 유지하며 육신의 생명과 자아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보존한 그가 집에 돌아와서 행복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교우들에게 자신의 배교 시절을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살아남았던 그 8년의 시간은, 매일매일 내 영혼이 불타는 끔찍한 지옥이었습니다. 숨을 쉬고 밥을 먹어도 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아를 보존하려던 비겁함이 끔찍한 두려움과 죄책감의 감옥임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목숨을 철저히 미워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다시 교우들을 찾아가 회개하고 더욱 열렬히 복음을 전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됩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살이 찢기는 모진 고문 앞에서도 그는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처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는 수레 위에서, 최필공 토마스 복자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에 두려움이 완벽히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천사 같은 평화와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아의 소멸이 가져다준 압도적인 구원의 행복을 누리며 그는 장엄하게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오늘날 우리에게는 목에 칼을 들이대며 신앙을 버리라고 협박하는 포졸도, 피 냄새 진동하는 사형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며 어떻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행복한 밀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삶의 배교와 순교는 매일 일어나는 아주 작은 '선택의 순간'에 있습니다.
부부 싸움을 크게 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미안해'라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내 알량한 자존심(자아)이 죽어야 하는 끔찍한 일입니다. 이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가 먼저 사과하면 넌 지는 거야. 끝까지 기싸움을 해서 네 권리를 찾아! 무시당하면 안 돼!' 이때 내 얄팍한 자존심을 살리려고 며칠이고 입을 닫고 냉전을 벌이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판 '배교'입니다. 자존심을 지켜내서 이겼으니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마음은 터질 듯이 불안하고, 식탁에는 냉기가 흐르며, 방안은 지옥의 감옥처럼 춥고 외롭습니다. 자아의 목숨을 사랑했기에 오히려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끓어오르는 억울함을 꾹 누르고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그 순간 내 자아는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그 즉시 내면을 짓누르던 모든 두려움과 불안의 얼음벽이 산산조각 나며 쏟아지는 하느님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내 자존심이라는 밀알이 죽었을 때, 가정을 살리는 거대한 부활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한 번 이 죽음이 주는 평화(순교)를 맛본 사람은, 더 이상 기싸움을 통해 자아를 살리는 쩨쩨한 지옥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상해』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서늘한 일침을 날리셨습니다. "그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살려두면 두려움이 그대를 노예로 부릴 것이나,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 그 어떤 칼날도 건드릴 수 없는 우주적인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편 강해』).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에 머물며 이 고요함 속에서 기도하다 보니, 세상의 소란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시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갈등으로 시끄럽지만, 이곳의 침묵은 오히려 더 분명하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하며 살고 있는가?” 최근 우리는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황님께서는 평화를 위한 ‘밤샘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역시 그러한 증인이었습니다. 교황님은 유엔에서 “전쟁은 더 이상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평화의 복음을 세상 한가운데 선포하였습니다.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오후, 성당에서 나온 신자들이 거리 한쪽에 작은 탁자를 펼쳐 놓고 거리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와 입교 신청서를 정성껏 준비해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거나, 손사래를 치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하는 분들도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고, 표정에는 조심스러움과 망설임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약 장수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약 하나면 피로가 싹 풀립니다! 관절이 좋아집니다!” 과장된 몸짓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려들었고, 웃고 떠들며 약을 사기까지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리 선교를 하던 분들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데, 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까?’ 결국 몇 사람이 용기를 내어 약 장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전하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약을 파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때 약 장수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이 약이 그렇게 좋은 약은 아닙니다. 나쁘지도 않지만, 특별히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약을 정말 좋은 약이라고 믿고,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 없어 보입니까?”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깊이 흔듭니다. 내용의 진실함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태도와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보다 ‘신뢰’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를 향한다고 보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말하는가?’, ‘어떤 태도로 말하는가?’를 통해 진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확신 있게 전해질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이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모습인가?” 혹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세상의 시선과 반응을 먼저 생각하며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스승보다 증인을 더 믿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신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몬세라트의 고요함 속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뽑아 세우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서 열매를 맺어라.” 그 열매는 바로 믿음의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성인
복자 윤지충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지난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124위 순교 복자들의 기념일이다.
이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부들 가운데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7년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그 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29일은 한국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지만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8일이지만, 이 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29일로 정한 것이다.(매일미사 2015년 5월29일 전문)
복음: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즉 죽는 것과 같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땅속에서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혼자이셨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 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열매인 부활로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고 옳지 못한 사랑은 피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을 거절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고 하셨다.
우리 순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나 자신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으며,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욕심을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였던 분들이다. 박해의 시간을 살면서 한 순간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신앙으로 순교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자선을 할 때에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태 6,3 참조) 이러한 섬김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며, 마땅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체험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26절) 순교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며 그분만을 올바로 섬겼던 분들이었다. 우리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자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mes)
활동년도 : 1752-1801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한국(Korea)
같은 이름 :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제임스, 주야고보
1752년 중국 강남의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Jacobus)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후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그는 신앙심이 깊은 데다가 조선 사람과 닮은 주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 집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주 야고보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약속된 장소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인 지황 사바와 박 요한을 만났다. 그러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런 다음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 야고보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반면에 주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 야고보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그러나 열심히 성무를 집행하였다.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주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1801년 4월 24일(음력 3월 12일), 주 야고보 신부는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재판이 열리고 문초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형벌 가운데서도 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제가 월경죄(越境罪, 몰래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황을 따라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학문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 남에게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는 바이므로, 절대로 교회 일을 밀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 야고보 신부에게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어 달던 형벌)을 선고하였고, 이에 따라 신부는 형장으로 정해진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뒤, 주 야고보 신부는 자신의 사형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으니, 그때가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할 당시 다음과 같은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늘이 본디 청명하였는데, 홀연히 어두운 구름이 가득 차고 갑자기 광풍이 일어,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곧바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고성대 베드로(高聖大 Peter)
활동년도 : ?-1816년
신분 : 독신, 순교자
지역 : 한국(Korea)
같은 이름 : 고베드로, 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그러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고 베드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 언제인가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그는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또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고 베드로는,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전주로 끌려간 그는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고 베드로는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이후로는 가끔 “이 큰 죄를 보속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고 되뇌곤 하였다. 그러다가 아우와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으로 이주하여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년,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이때가 그해 2월 22일경이었다.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고 베드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하였다. 대구에서는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 베드로는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은 채 동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대구의 감사는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면서 깨우쳐 주려고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고성대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강경복 수산나(姜景福 Susan)
활동년도 : 1762-1801년
신분 : 양인, 궁녀, 동정순교자
지역 : 한국(Korea)
같은 이름 : 강수산나, 수잔, 수잔나
강경복(姜景福) 수산나(Susanna)는 1762년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가 되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동정으로 생활하였다. 그녀가 살던 집은 ‘양제궁’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거처하던 집이라는 뜻)이라고도 불렀다. 그 집의 주인은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나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자주 오가고 있었다.
1798년 무렵, 집주인 송 마리아는 강 수산나를 불러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면서 이를 믿도록 권유하였다. 이때부터 강 수산나는 다른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집주인들과 함께 자주 강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나 신앙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01년 2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노비인 남구월의 안내를 받아 양제궁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강 수산나는 어머니가 사는 집에 갔다가 우연히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찾으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양제궁으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 때문에 주 야고보 신부는 다행히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주 야고보 신부가 피신한 뒤 강 수산나도 양제궁을 몰래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뒤따라온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강 수산나는 곧바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미 천주교에 깊이 빠져 있으므로,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포도청에서는 그녀를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이송하였으며, 그녀는 이곳에서 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녀는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의금부에서는 이러한 진술을 듣자 강 수산나를 형조로 내려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의금부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것을 크게 뉘우치면서 다시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박해자들이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밀고하고 마음을 돌이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 신앙을 위해 형벌과 죽음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문초가 끝나자 다음과 같이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서 이를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으며, 양제궁에 거처하면서 주문모 신부님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이 갈수록 굳어져 왔으니, 형벌을 당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강경복 수산나는 마침내 강완숙 골룸바 등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강경복 수산나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Columba)
신분 : 부인,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61-1801년
같은이름 : 강 골룸바, 강골룸바,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강완숙(姜完淑)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룸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강 골룸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강 골룸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룸바의 인품을 알아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 골룸바의 집이었다.
강 골룸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 골룸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에게서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룸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성녀 보나(Bona)
신분 : 순례자
활동지역 : 피사(Pisa)
활동연도 : 1156-12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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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보나는 1156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아트워터(Attwater)에게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기록에 의하면, 성녀 보나는 어린 시절부터 환시를 체험했고,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의 축복을 받았다.
10살 때 그녀는 스스로 아우구스티노회 규칙에 따라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정하였고, 14살 때에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십자군으로 싸우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해 첫 번째 여행을 감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지중해에서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혀 상처를 입고 감옥에 갇혔다.피사의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다시금 여행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1천 마일에 이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사도 대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곳)까지의 여정이었다.이때부터 성녀 보나는 성 야고보 기사회의 후원 하에 이 유명한 순례여정의 공식적인 안내자의 일원이 되었다.그녀는 9번이나 순례를 안내했다.그녀는 넘치는 열정과 이타적인 마음을 지녔고, 아픈 이들도 그녀의 미소와 함께 기운을 되찾을 정도로 친절했다.
이미 병든 몸으로 그녀는 마지막 순례를 시도했으나 집에서 멀리 떠나지는 못했다.성녀 보나는 할 수 없이 피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산 마르티노(San Marino) 성당 근처 그녀의 작은 방에서 1207년 5월 29일 선종하였다.1962년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그녀를 이탈리아 여행 안내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성녀 보나는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7월 25일)와 함께 여행자들, 특별히 여행 안내자와 비행기 승무원 등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녀의 축일은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 바오로 6세 (Paul VI)
신분 : 교황
활동지역 :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콘체시오(Concesio)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Giorgio Montini)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Il Cittadino di Brescia)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Giuditta Alghisi)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다.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이었으나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그는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Cesare Arici Institute)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Arnaldo da Brescia)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 통학하였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고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으며,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A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si)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Warszawa)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는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였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FUCI)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다. 1931년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다.
그는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로 임명되었다.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Luigi Maglione) 추기경을 보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NCWC)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International Catholic Migration Commission)의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Milano)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많은 성당을 신축 · 보수하고 사목방문에 힘쓰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작업장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썼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권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된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조정위원회의 임원직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에 참석하였다.
1963년 6월 3일 교황 성 요한 23세가 선종한 후, 6월 21일 새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를 교황명으로 택하고, 6월 30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곧 공의회의 속개를 발표했고, 제4회기까지 열린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다. 제4회기(1965년) 때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이 착수되었다. 그리고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이다.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Mumbai)를 방문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국제연합(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터키 이스탄불(Istanbul)을 방문했다. 1968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Bogota)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Medellin)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 참석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회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였다.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확인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 부부 관계와 정결의 가치, 올바른 자녀 출산을 위한 부모와 의료인과 사목자의 역할을 설명한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현대 세계에 부응하는 선교의 방향을 논한 “현대의 복음 선교”(Evagelii Nuntiandi, 1976) 등이 있다.
공의회 이후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수도자,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받았던 삼중관(tiara)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8년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에서 미사를 드리다 심장마비로 선종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963년 교황으로 선출된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까지 공의회를 이끌었으며, 공의회 문헌을 반포하고 결의사항을 실행해 나갔다. 1964년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정교회 수장이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 만나 그리스도교 일치에 앞장섰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지인 인도를 방문하며 아시아 땅을 밟은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은 2014년 10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시복식은 바오로 6세 교황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은 그의 전구(intercession)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다.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임신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holy card)과 제의 조각을 임신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칭송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시성으로 역대 교황 중 성인은 82명(대립교황 교부 히폴리투스 포함), 복자는 9명이 되었다. 20세기 교황 중에서 성인품에 오른 이는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요한 23세(Joannes XXIII,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와 더불어 총 4명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2월 6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을 통해 성 바오로 교황의 기념일을 제정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일반적 관례에 따르면 성인의 축일은 선종일로 지정하는데, 선종일인 8월 6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임을 고려해 5월 29일을 선택 기념일로 지정했다.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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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 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편집장 안드레아 몬다는 41년 전 1978년 8월 6일 선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을 소개했다. 그는 1900년대 ‘가톨릭 운동’ 역사의 참된 주인공이었다.
Andrea Monda / 번역 이창욱
1978년 8월 6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세속명: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의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다. 1900년대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 백성 안팎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과의 영적인 가까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6년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 이해가 더욱 증폭됐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선임자인 성 요한 23세 교황의 선종 이후 중단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사히 재개했고,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을 반포했으며, 최초의 해외 사도적 순방과 교회 일치 운동에도 박차를 가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州) 콘체시오에서 태어나 냉전과 같은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됐던 그 끔찍한 해에 선종함으로써 20세기의 3분의 2를 거쳐간 그의 삶은 풍성한 모자이크화처럼 수많은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정치적 차원
그 다양한 측면 가운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말년 생애에서 필자는 그의 정치적 차원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5월 22일부터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에 실린 사회학자 주세페 데 리타(Giuseppe De Rita)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서다. 여기엔 이탈리아와 유럽의 위기, 서양 사회에 대한 커다란 난관의 순간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역할에 관한 대화가 담겼다. 데 리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성 바오로 6세 교황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25-1933년 이탈리아 가톨릭 대학 연맹(Federazione Universitarià Cattolica Italiana, 이하 FUCI)의 전국 지도신부를 맡았던 순간부터 1900년대 정치에서 가톨릭 운동사의 참된 주역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 토론에 발제자로 참여한 약 25명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사회 투자 연구원(Centro Studi Investimenti Sociali, CENSIS)의 설립자 주세페 데 리타는 이탈리아 정치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가 이끈 기독 민주당(partito della Democrazia cristiana)의 출범을 통해 전쟁의 비극에서 이탈리아가 벗어나는 데 있어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활동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강조했다. 이 견해는 이탈리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긴 역동의 시기에서 또 한 명의 중심인물은 알도 모로(Aldo Moro)였다. FUCI에서 활동하던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몇 년 동안 알도 모로를 알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다. 5월 13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도 기념비적인 언급을 통해 그를 기억했다. “주님께서는 이 착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고, 무고하며, 친구였던, 알도 모로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욥처럼,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78년 비극적인 봄에 일어난,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악(알도 모로의 암살)에 대해 하느님께서 갚아달라고 탄원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인터뷰 시리즈는 오늘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 괄티에로 바세티(Gualtiero Bassetti) 추기경의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 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바세티 추기경은 다른 대담자들에 의해 부각된 예언이라는 주제에 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얻으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적인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하면서도 혁신가들입니다. 신앙과 절제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온유해야 합니다. 혁신이란 세상(세속)의 정신, 곧 이기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와 외국인 혐오주의를 반대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언적인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주교회의(CEI) 의장이기도 한 바세티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정치가) 조르조 라 피라(Giorgio La Pira)를 언급했지만, (그 인물에 대한) 묘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모습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적용할 수 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온유하고 혁신적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천상 탄일을 기억한다. 지난 1978년 8월 6일 고령의 교황은 삼종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훈화를 마무리했다.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영예롭게 했거나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받은 책임인 말과 행동으로 논리적인 결과에 맞게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그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을 이미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교회 전체도 그렇게 확신한다.
성 시지니오와 성 마르띠리오,성 알렉산델 순교자 San Sisinnio, San Martirio, Sant’ Alessandro Protomartire trentino St. sisinius, St. martyrius, St.alexander. 397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밀라노에 거주하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까파도치아 태생들인 시지니오 그리고 마르띠리오와 알렉산델 형제들이 가장 유명하였다.
알렉산델은 ’인간의 옹호자’란 뜻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들을 트렌트의 주교, 성 비질리오에게 추천하여 설교 일을 맡기게 하였다.
시지니오는 부제로 그리고 마르띠리오 형제는 독서자로 선임되어, 이들 세 사람이 신자들이 별로 없던 알프스 건너편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들의 전교 여행은 많은 성과를 내게 되어, 성당을 짓기까지 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성공을 달갑잖게 여기던 주민들이 새로 영세한 신자들을 위협하고, 그들을 몽둥이로 때려, 시니지오는 즉사하고 말았다.
마르띠리오는 정원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그 다음날 처형되었고, 알렉산델 역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