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 제2 강론(442년 3월 1일)
우리 본성은 사멸할 것*에 머물러 있는 한 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본성이 덕행에 대한 열정에 있어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추락의 가능성과 향상의 가능성을 항상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한 이들이 지니는 진정한 의로움은 자기가 감히 완전한 사람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인생 여정에서 자기 결심을 포기하고, 전진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릴 지경에 떨어지는 위험스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2,1]
☕ 우리는 착하게도, 악하게도 변할 수 있다. 결코 낙담해서는 안 된다.
㈜ : *“사멸할 것”은 인간 육신을 말한다.
피조물이 새로 태어나는 때*가 다가오자 악령은 자기가 차지하고 있던 이들로부터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 빼앗겨 버린 원수는 패악한 분노로 으르렁대면서 새로운 노획물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전에 누리던 권리를**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자는 지치지도 않고 내내 깨어 있다가 거룩한 양떼에서 이탈하여 게으르게 방황하고 있는 양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정욕과 음탕에 기울어지게 함으로써 죽음의 거처로 유인합니다. 이처럼 그자는 사람들을 분노에 불타게 하며, 증오심을 키워 주고, 원욕을 날카롭게 하고, 절제를 비웃게 하며, 탐식을 충동하고 있습니다. [2,2]
☕ 악마는 음욕을 도구로 인간을 유혹한다.
㈜ : *"피조물이 새로 태어나는 때“는 세례받는 때를 말한다. 『사도 전승』 21장에서 보듯이, 당시 전례에서는 세례받기 며칠 전부터 예비자들은 매일 구마식을 받았으며, 세례 당일에도 성대한 구마식을 받았다.
㈜ : **“전에 누리던 권리”: 원죄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 마귀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마귀는 인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참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당신이 또한 참 인간이심을 보여주시고, 온갖 오류의 불경스런 주장들을* 몰아내기 위해 사십 일 주야로 단식하신 다음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고픔을 친히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그분 안에 수난받을 수 있고 죽을 본성의 표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자기가 무서워하는 능력이** 그분 안에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라고 했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어떤 종류의 피조물에게든 명령하시어 다른 형태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원하시는 대로 물을 술로 변화시키셨습니다(요한 2,1-10 참조) 주님은 가장 교만한 원수의 간계를 신성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겸손의 신비로 무찌르신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 더 알맞은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마귀는 도망치게 되고 유혹의 모든 술책이 무위로 끝나자 천사들이 주님께 와서 시중들었습니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신 그분의 인성이 꾀 많은 악마의 제의(提議)들에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분의 신성은 거룩한 천사들에게서 받으신 공경을 통해 드러났습니다.(마태 4,11 참조) [2,3]
㈜ : * 불경스런 주장들”은 아마 레오 대종 시대에 논란이 되었던 그리스도론적 이단들을 암시한다. 사실 레오 대종은 바로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본성. 즉 신성(“참 하느님")과 인성("참 인간")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 : **수난받을 수 있고 죽을 본성”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뜻하며, 악마가 “무서워하는 능력”은 그분의 신성을 뜻한다.
악마의 자식들과 그 제자들은 그자로부터 독기 있는 영항을 잔뜩 받아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신성을 제거하거나 또는 신성에서 인성을 제거함으로써 그분 안에 두 가지 본성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단순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거짓은 한순간에 일어난 두 가지 증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분이 육체적으로 배고픔을 당하신 것은 그분의 완전한 인성을 증명하며, 그분이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신 것은 완전한 신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2,3]
☕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신 분이다.
㈜ : *여기서 “악마의 자식들과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본성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부인하는 이단자들을 뜻하며, 레오 대종 시대에 이런 이단자들이 일반 신자들("단순한 사람들)을 얼마나 현흑시키고 있었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루가 4,4)고 하신 우리 구세주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절제를 어느 정도 할지를 정하고 육체를 위한 음식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살찌우도록 갈망합시다. [2,4]
☕ 육의 양식 못지않게 영의 양식도 중요하다.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경비로 식사하고 배부르게 되는 것에 기뻐합시다. 우리가 헐벗은 이들에게 필요한 의복을 주어 그들이 입게 될 그 옷들에 대해서도 기뻐합시다. 병들어 누워 있는 이들, 허약한 노약자들, 추방당해 고통중에 있는 이들, 버려진 고아들, 홀로 되어 슬픔중에 있는 과부들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도록 합시다. [2,4]
선행에 한몫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마음이 관대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적게 바치지 않을 것이며, 자비나 동정심의 정도는 재물의 분량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물건이라도 풍성한 선의를 가지고 도와 주면 분명히 공로가 됩니다. 물론 부유한 이들이 더 많이 바치고 넉넉지 못한 이들은 적게 바치겠지만, 선행을 하는 이들의 사랑이 동일하다면 그 행위의 결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2,4]
첫댓글 자비심에서 나온 행적은 우리의 기쁨이 되며, 영생을 위해 먹는
그 양식들로 우리는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