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욥기의 메시지
욥 9,1-16; 루카 9,57-62 /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2016.9.28.;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은 실존 인물도 아니며 가공 인물은 더욱 아닙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이 노아 시대에서부터 바빌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겪기에는 불가능한 여러 시대에 걸친 것들이어서 알 수 있습니다. 욥기는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정통한 현자들이 후대의 유다인들을 위해 교훈을 전해 주고자,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는 의인의 표상을 종합하여 내세운 욥의 일대기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욥 같은 인물은 나타나지 못했지만, 나타났어야 했다고 보는 인물인 것입니다.
욥은 악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사탄의 계략으로 욥은 처음에는 재산을 빼앗기고 자식들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끝내는 몹쓸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거두어가신다고 해서 그분께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욥의 신념이었습니다. 결국 욥의 이러한 올곧은 믿음은 하느님께 인정을 받았고 잃어버렸던 재산과 자식들과 건강을 되찾게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로는 이루지 못한 바를 아쉬워하며 욥을 통해 욥기의 저자가 알려주는 뼈아픈 교훈입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의식하고 의로운 응답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들을 옮기시고, 분노하시어 그것들을 뒤엎으시는 분, 땅을 바닥 째 뒤흔드시어, 그 기둥들을 요동치게 하시는 분”(욥 9,5-6)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래 이스라엘에 이러한 조산작용과 지진현상이 일어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노아의 대홍수 당시에는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산들을 덮을 정도로 쏟아졌던 물이 바닷속 땅들이 융기하게 하시어 새로운 땅을 만드셨는가 하면 그 바람에 깊어진 바다 속으로 땅을 덮었던 그 많은 물들이 흘러들어가 고인 것이 지금의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욥기에서는 노아 이래로 전해져 내려온 하느님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고자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동기가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와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다짐 등이 보태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심판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느님께서 다짐하셨으므로, 지금까지는 노아의 홍수 이래의 지형과 기상 기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들의 인생과 공동체의 흥망,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있어서는 여전히 격변하는 변화가 무쌍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요 개인의 인생사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의 제1공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서 개인도 민족도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고통이 주는 괴로움보다 더한 괴로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인생의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현세에서 겪는 고통의 의미를 온전히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기 탓 없이 무죄한 채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섭리 안에서 받아들이라고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희생의 제사라고 제2공리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부활을 목표로 삼지 않고서는 의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하여 의인이 오히려 고난을 받아들여서 모두가 부활할 수 있다는 이치로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의 퍼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섬기면서 의롭게 살아가면서도 뒤따르는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어리석은 농부와 같습니다. 쟁기로 밭을 갈자면 쟁기에 손을 대어야 할 뿐 아니라 눈으로 앞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밭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천자가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역사의 제1공리 교훈을 헤아리자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겪고 있는 질곡의 원인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죽이고 미워한 죄 때문에 받는 벌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북한의 공산주의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는 하느님께서 민족의 심판을 위해 회초리로 쓰신 조역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역사의 제2공리에 따라서 민족의 고난을 끝내자면 박해의 피해자였던 교회가 민족의 죗값을 기워 갚아야 합니다. 하느님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민족의 죄를 없애기 위한 고난의 십자가를 믿는 이들이 짊어지고 마무리해야 민족 현대사의 질곡이 끝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크신 권능이 한민족을 어떻게 인류 전체를 위해 쓰실 것인지 그 섭리에 대한 의로운 응답을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가 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