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7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공의 구원 겸손
슥 9:9~10
<스가랴 선지자>
스가랴서를 설교하면서 오늘은 “스가랴 선지자는 어떤 외모를 가졌을까?”
스가랴 선지자의 외모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사자성어 중에도 ‘신언서판 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우리 동양 문화권에서는 사람의 외양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사람을 볼때는 첫째, 신 身, 외모입니다. 둘째, 언 言, 말하는 태도입니다.
셋째, 서 書, 그 사람의 글씨체를 보라는 뜻입니다.
넷째, 판 判, ‘사리 분별은 잘하는가’입니다.
☞ 사람은 외모를 보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스가랴서 설교를 하면서 스가랴의 신 身,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신 다음의 ‘언_서_판 言書判’은 스가랴서 한 권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언변이 얼마나 빼어납니까?
사람들의 문학이 스가랴 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서 書, 말해 무엇합니까?
스가랴의 서 書는 성경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보다 더 오를 수 없습니다.
판 判, 스가랴의 판단력, 사리분별, 더 뛰어날 수 없습니다.
스가랴 서에 나오지 않은 것은 신언서판에서 첫 번째 신, 그의 외모입니다.
신장은 몇 센치이고, 몸무게는 얼마이며, 피부색은 어떻고, 얼굴은 훈남일까, ‘까도남’일까?
‘까도남’ 아시지요? ‘까칠한 도시 남자’입니다. 한때 유행어였는데, 이제는 까마득합니다.
스가랴서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스가랴 선지자님의 외모가 궁금해졌습니다.
저의 마음에 왜 스가랴 선지자의 외모가 궁금해졌을까요?
‘너무나 훌륭한 분이다.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다’ 이런 마음입니다.
사실 구약의 선지자에게 ‘훌륭하다’는 표현은 안 맞습니다.
제대로 말하려면, ‘신실하시다’라고 해야 합니다. 모든 선지자가 신실하신 분들입니다.
☞ 스가랴의 외모가 궁금해졌다는 것은 스가랴의 신실함에 감동했다는 뜻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에 맞추어 주시는 예수님>
성경에는 ‘스가랴’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성경 사전에 찾아보니, 34명이 등장합니다. 스가랴서를 쓴 스가랴는 그중 한 명입니다.
스가랴서 저자 스가랴 말고, 기억나는 스가랴가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아버지가 ‘스가랴’입니다. 기억나시지요?
제사장 가문입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나옵니다.
제사장이 많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기회는 평생 한번 올까말까합니다.
스가랴가 순번을 받고 일생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향을 합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를 만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침례 요한의 잉태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때 스가랴 부부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스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스가랴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에야 입이 열립니다.
오늘 본문의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500년 전에 활동했습니다.
스가랴는 주전 6세기 선지자입니다. 주전 600년에서 501년까지가 주전 6세기입니다.
그때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 한 말씀을 했습니다.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이 예언을 했다고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귀한 말씀을 다른 선지자가 아닌 스가랴 선지자가 했다.”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이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래서 제가 갑자기 스가랴의 외모가 궁금해졌습니다.
9절에서 “왕이 오신다!” 어떤 왕입니까? ~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다.
그런데 그 왕이 어떻게 오신다고요? ~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새끼 나귀를 타고 왕이 오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50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무얼 타고 오시지요? ~ 예수님은 이 말씀을 지키시려고 나귀새끼를 탔습니다.
<비척거리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 3번 오십니다.
그중 맨 나중,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올리브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은 미리 나귀새끼를 물색하시고 값을 치러두었습니다.
“‘주인이 쓰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거든 고삐를 내어주십시오”
그리고 제자를 시켜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 나귀 새끼는 아직 사람을 한번도 태워본 일이 없습니다.
이제 겨우 성인 한 사람이 등에 올라탈 수 있을만큼 자랐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귀 등에 올라앉았을 때 나귀새끼는 비척거렸습니다.
비척비척 뒤뚱뒤뚱거리면서 언덕을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성지순례를 가봤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거리는 멀지 않았습니다.
전주에 다가공원, 다가산이 있습니다. 그 산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그 산에서 국궁터로 내려와서 신흥학교 옆을 지나 예수병원 언덕으로 오르는 길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그 거리를 나귀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디아스포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스가랴 9장 9절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을 대단히 귀하겨 여겼습니다.
다 자란 나귀를 탈 수도 있었습니다. 멋지게 큰 말을 탈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개선장군처럼 두세 마리가 이끄는 하얀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개선장군이나, 로마황제보다도 훨씬 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로마황제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한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신언서판으로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 때문입니다.
스가랴 예언의 성취를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 나귀 새끼를 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나귀 새끼를 타는가, 그 이유입니다.
<공의 구원 겸손>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그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뒷부분입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스가랴 선지자는 말합니다.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는 이유는 3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공의, 둘째 구원, 셋째 겸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제가 “공의 구원 겸손”으로 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잘 압니다.
그런데 왜 나귀를 타셨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을 못합니다.
조금 성경을 안다는 사람이,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라고 대답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33점짜리입니다.
겸손 앞에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공의와 구원입니다.
100점 답은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공의, 구원, 겸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공의 구원 겸손이 나귀새끼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도 있고 하니, 공의, 구원, 겸손을 되새김하고자 합니다.
<1. 공의>
공의는 ‘의 義’ 자 앞에 ‘공 公’ 자를 붙인 것입니다.
나 혼자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 혼자 의롭다고 판단한 것은 “나의 의”입니다.
그런데, 나와 당신, 두 사람이 모두 의롭다고 판단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입니다.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가문이 모두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습니다. “가문의 의”입니다.
한국 사람이 모두 의라고 생각하는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의”입니다.
아시아 국가 모든 사람이 의라고 여기는 의가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의 의”입니다.
한국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모든 나라 국민이 의라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요?
그것이 넓은 의미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따져보니, 나와 아내 두 사람이 똑같이 의라고 여기는 것, 이것도 귀하네요!
남편과 아내 두 사람 사이에서 똑같이 의로 여기는 것, 이것도 사실은 귀합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의’라고 여기는 것, 이것도 귀합니다.
온 가족이 오늘 저녁 외식이다. 여기까지는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뭘 먹을까?” 이 질문 앞에 가족의 공의는 와르르 무너집니다.
“짜장 먹자, 삼겹살 먹자, 쇠고기 먹자! 아니다 곱창 먹자!”
공의가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때 가장이 “오늘은 삼겹살이다!” 나머지는 찍소리 못하고 따라갑니다.
우리가, 의 義를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니 이렇게 의가 귀합니다.
나 혼자 옳게 여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나와 너, 둘 이상이 함께 옳게 여기는 것은 귀합니다.
더욱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옳다’라고 여기는 ‘공의’는 그야말로 귀합니다.
여기서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합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다!”
이 세상에 공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한 분 뿐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스가랴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2. 구원>
두 번째로 “그는 구원을 베푸신다”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공의,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왜 공의 다음에 구원이 따라옵니까?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어디서 구원을 받아야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아야 할까?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에서 건짐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내와 나의 생각이 달라서 부부생활이 어렵고 힘이 듭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생각이 달라서 가족간 갈등이 빚어집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구성원 간 생각이 제각각이라서 너무너무 힘이듭니다.
이것은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옳다고 여기는 것 “의”
저마다의 의가 달라서 싸우고 갈라서고 우격다짐을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서로의 의가 달라서 치고받고 싸우는 곳, 거기서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말합니다.
오실 왕, 오실 그리스도는 공의의 왕이며, 구원의 왕이다!
<3. 겸손>
세 번째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왕, 구원의 왕이시며, 겸손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왕, 구원의 왕으로 오시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비결을 알려주십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팁’입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우리는 공의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의에 도달하지 못해서 당하는 고난에서 스스로 걸어나올 수 없습니다.
공의, 구원!
우리는 왜 이 딜레마에 빠졌을까요?
인류의 첫 조상 아담, 하와의 선악과에 그 원인이 닿아있습니다.
모든 의를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결단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선과 악을 내가 결정하겠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유증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황금열쇠는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나! 거기서 돌아서는 통로가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의 표상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 그 분이 나귀 새끼를 탔습니다.
공의 구원, 볼모로 붙잡힌 우리에게 하나님은 비결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에서 출발하여 공의를 알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공의, 구원을 바라보는 안경이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내 의가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겸손할 때, 상대방의 의에 내가 양보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화려한 말을 탈 수 있지만, 나귀 새끼를 타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우리는 구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겸손이라는 열쇠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참 좋은 겸손~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