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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닛시(출 17:8-16)
지난 몇 주 동안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영적전쟁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영적 전쟁터에서 서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종종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적이 공격해올 때 미처 방어할 겨를도 없이 당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를 통해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우연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영적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그 증거가 우리의 현실입니다. 믿음의 사람인데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불평과 원망, 근심이 내 생각을 지배합니다. 아니 승리의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패배하면 우리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의 영이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세 가지의 죄성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즉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이 세 가지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우리 속에 감추어진 죄성입니다. 이 육신의 죄성은 우리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우리 육신의 쾌락을 쫓아갑니다.
세상에 취하고 육신에 취해서 만족하고 싶어합니다. 조금 지나면 이제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한 싸움을 합니다. 권모술수를 이용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세 가지 싸움이 있는데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 둘째는 이웃과의 싸움,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너희 과업은 무엇인가? 싸움이다. 내일 너희 과업은 무엇인가? 싸움이다.”
이것은 인간은 하루도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와 같은 싸움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에서 서로 양보하지 않고, 쌍방의 자기주장이 충돌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 12절은 사도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를 지나서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객이나 장사꾼을 약탈하는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 왔습니다. 아말렉은 강한 군대였습니다. 잘 조직된 도적 떼였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긴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가 빈틈이 보이면 어김없이 약탈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아말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천국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이 도중에 우리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병들고, 지치고, 어려운 고비에 처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원수 아말렉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해옵니다. 우리의 아멜렉은 무엇입니까?
죄악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육신의 아말렉입니다. 죄악이 와서 우리 진을 흐트러 놓고 우리를 붙잡아서 죄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옛사람입니다. 자기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 즐기고 싶은 욕망, 취하고 싶은 욕망, 놀고 싶은 욕망, 뭐 그런 것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은 보여주고 싶은 욕망입니다. 보고 싶은 욕망도 안목의 정욕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욕망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릅니까? 이생의 자랑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교만의 속성입니다. 이런 죄성이 우리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우리의 영혼을 끌고 다닐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지 않고 깨어 있지 않으면 이런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시기와 질투입니다. 분노와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주 화가 납니다. 또 걱정과 염려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습니다. 섬김을 받고 싶습니다. 이런 욕망이 바로 우리의 속에 있는 죄성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미움이 아멜렉입니다. 미움이 우리 가슴속에 파고들어 부부간에 서로 상처를 입히고, 깨어지고 부모 자식간에 원수가 되고, 가장 가까워야 할 이웃과 대적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대적합니다.
그리고 질병의 아멜렉이 있습니다. 갑자기 다가온 질병으로 인해 마음과 몸과 생활이 병들고 있습니다. 이 질병의 아멜렉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아멜렉도 있습니다. 죽음은 가장 절망적인 것이고 가장 무서운 공포입니다. 죽음의 아멜렉이 우리들을 붙잡고서 우리가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류는 이 아멜렉의 공격에 거꾸러지고 도적질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처참한 슬픔과 불안을 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전쟁을 통해 먹고 살았던 아말렉군대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정말 이스라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호와 닛시!’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군대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1.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8-11절).
8-9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싸움을 시작했을 때 일반적 상황으로서는 이미 승패가 결정 난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는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는 출애굽할 때 애굽의 바로앞에서 땅에 던지면 뱀이 되었지만 손에 잡으면 지팡이가 되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지팡이였습니다.
또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 사용된 그 지팡이, 홍해를 갈랐던 그 지팡이,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던 그 지팡이를 들고 모세는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던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기도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바쁘고 힘들다고 기도를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사명자들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영적전쟁에셔 승리할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전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그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한 것은 모든 능력은 모세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시편 44: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이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모세도 알았습니다. 오직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 때 놀라운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손이 믿음의 손이요, 능력의 손입니다. 역사의 손입니다. 승리의 손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의 성패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라.”
시편 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이라.”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손이 승리의 역사를 만듭니다. 바로는 모세를 아무 것도 아닌, 지팡이를 의지한 무력한 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도하는 모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청년들 앞에서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를 대수롭지않게 여겼지만 기도하는 엘리사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기도하는 손을 드는 성도를 이길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목사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목사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권사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권사는 마귀가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성도는 약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기도하는 손을 드는 자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아말렉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는 손을 들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의 손이 싸우고 역사하는 것을 보는 여호와 닛시의 찬양을 부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11절,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세 가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1)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권리포기의 기도입니다.
2)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옵소서.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쇠입니다. 하나님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나를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여호와 릿시의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 것입니다.
3)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손입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이기 때문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찬양할 때 감동이 오면 손을 높이 드십시오.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의 영혼의 갈망입니다. 이렇게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의 찬양하는 거룩한 손이 되셔서 여호와 릿시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도왔습니다(12절).
12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모세도 사람인지라 손을 들고 오래 있으니 힘이 없어지면서 손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양쪽에서 잡아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제 손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다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론과 훌의 협력은 모세의 기도에 큰 힘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전쟁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신 것은 서로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안에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셨습니다. 직분으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 권사와 안수집사, 집사를 세워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직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다양한 은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다양한 직분을 주시고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다른 사람들을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옆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섬기고 함께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섬김입니다. 섬김 속에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섬김을 실천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역하기 위해 여러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론과 훌은 돌을 굴려서 돌위에 앉게 하고 양쪽에서 손을 들어 올려 주었습니다. 동역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손이 올라가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제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장로님을 세워주시고 권사님과 집사님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의 찬송을 부를수 있도록 함께 섬기는 것이 진정한 동역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힘이 됩니다. 동역자가 많으면 겁날 게 없습니다. 내가 약할 때 내게 힘이 되고, 내가 넘어졌을 때 일으켜 줄 수 있는 기도의 동역자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혼자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내게는 동역자가 필요 없어."하고 말한다면 교만입니다. 교회안에는 아론과 훌과 같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나에게도 필요하고 너에게도 아론과 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아론과 훌이 되어 주십시오. 또 내 손을 잡아줄 나의 아론과 훌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동역으로 기도에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입니다. 처음에는 나 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나를 넘어서 우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양문교회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잠자면 양문교회가 자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서면 양문교회가 일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힘을 모아서 나의 힘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어디에선가 여러분의 섬김의 손길이 있어야 이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위해서 교회 곳곳에서 섬김의 손길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힘을 보태어서 함께 동역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여 동역할 때 우리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손이 내려 올 때 세상의 방법은 비난하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내려온 손을 붙잡아 주고 다시 내려오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협력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힘을 합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여호와 닛시’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3.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현장에서 싸웠습니다(9-10,13절)
9-10절,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리고 1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있었기에 ‘여호와 닛시!’의 찬양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을 택하여’, 둘째는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셋째는 ‘칼날로’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의 기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는 질서있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아무나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택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가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방법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싸움에는 반드시 무기가 필요한데 칼날이라 했습니다. 성도의 무장해야할 검은 에베소서 6:17절에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뜻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대적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철저하게 말씀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옛 신앙의 선배들이 늘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바로 서려면 세 가지 중심이 바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1)하나님 중심, 2)말씀중심, 3)교회중심
현장에서 영적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신앙으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이 바로 서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목표중에 첫 번째가 전교인이 큐티하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영혼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이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성도는 이미 싸움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철저하게 말씀중심이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귀는 오늘도 아말렉처럼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어둠의 권세인 사탄을 이기고 ‘여호와 닛시!’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서 세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모세는 하나님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앞에 자신을 다 내어맡겼습니다. 2)모세가 힘이 들어 손이 내려올 때 아론과 훌은 양옆으로 가서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왔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3)여호수아의 군대는 현장에 나가 싸웠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를 점검해보십시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닛시는 하나님이 싸우셨다는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실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