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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특집] ‘물’은 어떻게 세례의 표징이 되었나
그리스도의 세례 통해 성령으로 거룩해지고 파스카 신비와 연결
주님 세례 축일(1월 11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은 사건을 기념한다. 복음서는 이 축일의 중심 장면으로 예수의 세례를 전하며, 이 장면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과 구원 사명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증언한다. 이날 교회는 또한 세례성사에서 사용되는 ‘물’이 지닌 의미를 함께 바라본다. 물은 창조와 정화, 경계를 상징해 온 자연 요소이지만, 예수의 세례 사건을 거치며 교회 안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드러내는 성사적 도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물이 어떻게 세례성사의 표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구약·신약에 나타난 ‘물’의 의미
구약에서 물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 요소이면서, 동시에 심판과 경계를 드러내는 실재로 나타난다. 창세기는 혼돈 위에 물이 있고, 그 위를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다고 전한다.(창세 1,2 참조) 이 대목에서 물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드러내는 배경일 뿐이다.
탈출기에서 홍해의 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으로 넘어가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경계로 제시한다.(탈출 14장) 구원을 이루는 힘은 물 자체가 아니라, 바다를 가르시는 하느님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에제 36,25)고 선포할 때도, 물은 하느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신약에 들어서 물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통해 예식의 중심에 놓인다.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죄의 용서를 촉구했다.(마르 1,4 참조)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세례가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마르 1,8)
물이 세례의 표징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사건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536항은 예수의 세례를,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과 하나 되시어 당신의 구원 사명을 시작한 사건으로 설명한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예수님과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물이 거룩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처럼 물은 본래 회개와 정화를 표현하는 요소였으나, 예수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연결되면서 교회의 세례성사에 사용되는 징표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이해는 물로 세례받는 신앙인들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세례를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라고 정의한다.(1213항 참조) 또 신앙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성사적으로 결합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속죄하는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물에 잠겼다가 그분과 함께 다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537항)
전례 안에서 드러나는 물의 표징성
이처럼 물은 세례성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찍이 물을 축복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각했다. 「전례사목사전」에 따르면, 200년경 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세례에 관하여」에서 세례수 축복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물의 축복을 특별히 강조했던 치프리아노 성인은 “세례 때 세례자들이 죄를 씻어 없애 줄 수 있도록 물은 먼저 사제에 의해 청결하게 정화돼야 한다”고 했다. 최초의 세례수 축복문은 4세기 중반 발행된 「찬미 기도문」과 「히폴리토의 법령집」에 나온다.
이전에는 세례성사를 거행하는 날로 고정되었던 주님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에만 세례수 축복이 거행됐으나, 현재는 부활 시기와 세례성사를 거행하는 모든 때에 세례수를 축복해서 세례를 주도록 하고 있다.
한편, 성수와 세례수는 구별된다. 세례수가 세례성사 때 물로 씻는 예식에 사용되는 축복된 물이라면, 성수는 ‘하느님 축복을 청하며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제가 축성한 물’로써 전례의 여러 부분에 사용된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대부모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죄 없는 분이셨지만, 세례 사건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당신 죽음과 부활을 성사적으로 미리 겪으셨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537항).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세례자의 영적 후견인인 대부모에 관해 알아봅니다.
대부모는 세례성사를 받는 이와 영적 관계를 맺어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대부모를 두는 건 교회의 오랜 전통인데, 이는 “세례받은 이가 세례에 맞갖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을 하고 이에 결부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교회법 872항) 돕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대부모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세례성사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의무에 대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모는 세례식뿐 아니라 예비신자 기간에도 대자녀를 돌보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세례식에 불참한다고 해서 대부모가 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세례성사 때 대부모의 참석이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참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모는 “할 수 있는 한에서”(Quantum fieri potest) 참석해야 합니다.
세례자의 대부모가 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있습니다.
① 대부모의 임무를 수행할 적성과 의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본인이나 그 부모 또는 대리인이 대부모를 정하는데, 만일 정할 수 없을 때는 본당 신부나 집전자가 지정해야 합니다(874조 1항 1).
② 만 16세 이상이어야 하는데, 교구장 주교가 달리 정하거나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본당 신부나 집전자가 예외를 둘 수 있습니다(874조 1항 2).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4세 이상이면 가능합니다(「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64조 2항).
③ 가톨릭 신자로서 이미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에 부합하는 생활을 하고, 맡게 될 대부모의 임무 수행에 적합해야 합니다(교회법 874조 1항 3).
④ 합법적으로 부과되거나 선언된 교회법적 형벌로 제재받지 않았어야 합니다(874조 1항 4).
⑤ 세례받을 이의 친부모가 아니어야 합니다(874조 1항 5).
세례자는 한 명의 대부 또는 대모를 세우거나, 대부모를 동시에 세울 수 있습니다(873조;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114조). 한편, 한국 천주교회에선 성직자와 수도자의 경우, 소속 장상의 허가 없이 대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64조 3항). 그리고 견진성사의 대부모로는 세례성사의 대부모를 세울 것을 권장하는데(교회법 893조), 왜냐하면 견진성사가 세례성사와 긴밀히 연결되고 세례성사를 더 풍요롭게 완성하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책임에 따른 부담감으로 대부모가 되기를 망설이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맺어지는 부모 자녀의 관계에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실 거란 믿음으로 용기 내어 대자녀를 받아들인다면, 대자녀는 든든한 후견인을 얻게 되고, 대부모 본인은 신앙생활을 쇄신하는 계기를 맞으며, 이는 주님께 커다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2) 신부들과 주교, 사제단, 신자들의 관계, 「교회헌장」 제28항 후반부
「교회헌장」 제28항 후반부는 신부들이 주교, 사제단, 신자들과 이루는 관계를 설명합니다. 먼저 주교와의 관계에서 공의회는 신부들이 ‘주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며, 자기 주교와 함께 하나의 사제단(Presbyterium, 신부단)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교와 신뢰로 결합하고 있는 신부들은 개별적인 지역 공동체 안에 주교를 현존하게 하고, 주교의 임무와 관심사를 받아들여 각자의 몫에 따라 사목을 수행합니다.
이어서 공의회는 신부들이 “주교의 권위 아래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 떼를 거룩하게 하고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28항 전반부에서, 신부들은 “성품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그리스도의 임무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임무를 자기가 받은 권위에 따라 수행”한다고 언급되었습니다. 두 언명 사이의 틈이 말해주는 것은, 신부들의 봉사 직무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파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과 그 봉사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주교의 권위로 지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맡겨진 지역 공동체에서 봉사 직무를 수행할 때, 보편 교회를 지역 공동체 안에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성장시킵니다. 신부들이 지역 공동체의 하느님 자녀들에게 선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교구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사목에도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주교의 봉사 직무에 참여하는 신부들은 주교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협력자인 신부들을 아들이요 친구로 대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품과 직무의 관계에서 교구 사제와 수도 사제 모두는 주교단과 결합하여 교회에 봉사합니다.
신부들이 신부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 공의회는 모든 신부가 공통된 성품과 사명을 갖는다고 하면서, 이로써 서로 친밀한 형제애로 결합하여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형제애는 영성적이고 물질적인 상호 원조와 사목적이고 개인적인 연대를 통해서 생활과 활동과 모임과 친교 안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끝으로, 공의회는 신부들이 신자들과 이루는 관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먼저 신부들은 세례와 교육을 통해서 신자들을 영적으로 낳은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신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신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모범이 되며, 공동체가 ‘하느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도록 섬기고 다스릴 것을 요청받습니다. 또한 신부들은 신자들, 비신자들, 가톨릭 신자들, 비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신앙에서 멀어진 신자들까지 모두에게 사제답고 목자다운 봉사자의 모습을 보이고, 진리와 생명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온 인류가 하느님 가족으로 일치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가톨릭 교리] 신앙과 이성은 대립되는 것일까
학창 시절, 하느님께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뒤, 시원찮은 성적표를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하느님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지, 하느님이 계시긴 한지 퍽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시원찮은 성적은 평소에 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저는 시험 기간에만 열심히 공부할 뿐 평소에는 조금 게으른, 편한 생활에 안주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운동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힘겨운 훈련을 견뎌야 하고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시험 기간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악기를 잘 연주하기 위해서도 공들여 연구해야 하며 많은 연습도 필요합니다. 하다못해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적당한 운동과 식단 조절이 필요합니다. 만약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면 사실 그것은 요행에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쉬운 길을 원합니다. 그래서 살이 빠지는 약, 잠이 오지 않는 약, 운동 능력이 좋아지는 약을 먹습니다. 그 결과가 일시적으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요. 요한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6) 그러나 우리는 쉬운 길을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의 뜻을 아는데 소홀히 하면서 마치 맡겨놓은 듯 하느님께 기적을 청합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알고자 노력하지 않으며 가르침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신앙과 이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가 맹목적인 믿음만 요구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립하는 두 힘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신앙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상보적 동반자라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이해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즉, 이성은 자연적 진리를, 신앙은 계시의 신비를 알게 하므로 신앙은 이성을 오히려 억압하지 않고 완성합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 윤리적 논쟁 속에서 신앙은 이성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합니다. 이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둘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향해 솟아오르도록 하는 두 날개와 같다.” 새롭게 맞이한 올해에는 모쪼록 하느님의 뜻을 알기를 청하며 교회는 무엇을 왜 이야기하는지 적극적으로 알아볼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신앙은 이성을 정지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성의 지평을 확장합니다.
[교회 상식 더하기] (2) 동방 박사는 세 사람이 아니다?
황금 · 유향 · 몰약 세 가지 예물에서 연상한 숫자, 실제론 온 인류를 상징
누군가 “동방 박사는 몇 사람인가요?”라고 질문하면 많은 분이 “세 사람!”이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의 왕’이라는 의미로, 삼왕(三王)이라 부르기도 하니, 세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교회 지식에 해박하신 분들은 이 세 사람의 이름이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라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동방 박사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은 분들도 계실 테고요.
그런데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실린 마태오복음(2, 1-11)을 잘 읽어보면 동방 박사를 ‘박사들’이라고 여러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그 수를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지하 묘소인 카타콤바의 벽화에서는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표현한 작품 외에도 두 명이나 네 명으로 표현된 작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덟 명 심지어 열두 명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 박사는 세 명이라는 인식이 정착됐고, 6세기 무렵에는 이름도 퍼졌습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으로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기 예수님께 봉헌한 예물 때문입니다.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세 가지 예물에서 세 사람을 연상한 것이지요. 이 예물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드러내기에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단순히 세 가지 예물에 맞춘 숫자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성 베다 신부(673~735)는 「마태오복음서 주석」에서 “영적으로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세계의 세 부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또는 노아의 세 아들(셈·함·야펫)로부터 씨를 얻은 사람들의 종족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은 그 당시 이해하던 세상 전체고, 노아의 세 아들들은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쓸어간 대홍수 이후 세상에 인류를 퍼트린 조상입니다. 다시 말해 동방 박사 세 사람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미술 안에서도 동방 박사를 백인, 흑인, 황인으로 그리거나, 혹은 청년, 장년, 노년으로 그렸습니다. 모든 인종, 모든 세대의 사람을 표현한 것이지요. 그 안에는 2026년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서 「놀라운 표징」을 통해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집으로 돌아온 동방 박사들은 분명 메시아와의 이 놀라운 만남을 다른 이에게 전했으며 그리하여 민족들 사이에 복음 전파가 시작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만남’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성당에서 구유에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가 바로 또 하나의 동방 박사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특집] 이방인에 의해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자’임이 드러나다
1월 4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흔히 ‘또 하나의 주님 성탄 대축일’로 불리지만, 교회가 대축일을 통해 강조해 온 초점은 예수의 ‘탄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탄생이 어떻게, 누구에게 드러났는가에 있다. 공현(Epiphania)이란 말 자체가 ‘드러남’, ‘현현’을 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기 예수도, 베들레헴의 목자도 아닌 동방 박사가 왜 대축일의 중심에 놓여 있는지 살펴본다. 동방 박사를 인도한 ‘별’을 향한 교회의 관심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마태 2,1-12)에서 동방 박사는 예수의 첫 경배자로 등장한다.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며 존경의 예를 표한다. 마태오복음 사가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의 탄생이 단지 이스라엘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이방 세계까지 울려 퍼진 사건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주목할 점은 마태오복음이 예수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인물로 유다인이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헤로데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 탄생에 관한 성경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길을 떠나 경배한 이들은 동방 박사들이었다.
예수의 정체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대상이 ‘경계 밖의 사람들’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동방 박사는 대축일 안에서 예수가 누구를 향해 열려 있는 분인지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인물로 자리한다.
이 점에서 대축일은 성탄과 뚜렷이 구분된다. 성탄이 예수의 탄생 자체에 초점을 둔다면, 공현은 그 탄생이 지닌 보편적 의미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에 시선을 둔다. 동방 박사가 중심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방문과 경배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에 머무르지 않고 온 세상의 구원자로 다가오셨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표징이다.
전례에서도 이런 이해가 강조된다. 제1독서는 “민족들이 네 빛을 향하여 나아오고 임금들이 떠오르는 네 광채를 향하여 오리라”(이사 60,3)라고 노래한다. 화답송과 영성체송에서도 ‘모든 민족’, ‘만민’, ‘이방의 빛’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감사송’은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 구원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그분을 인류의 빛으로 드러내 주셨다”고 노래한다. 전례 전체가 예수의 탄생을 특정 공동체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의 시작으로 해석하도록 이끄는 모습이다.
이런 전례적 이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도 확인된다. 528항은 ‘공현’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이 드러난 사건’으로 설명하며, 그 구체적 사건으로 동방 박사들의 방문과 경배를 제시한다. 또 동방 박사들을 ‘이방 종교들을 대표하는 이들’로 규정하면서, 이들의 경배를 통해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부름받았음이 드러났다고 밝힌다.
“박사들이 ‘유다인들의 임금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것은 다윗의 별이 비추는 메시아의 빛을 받아 장차 만민의 왕이 되실 분을 이스라엘에서 찾았음을 보여 준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을 향하고, 그들로부터 구약에 담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일 때에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구원자로 경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528항) 공현의 핵심이 보편적 구원의 드러남이라는 점을 교리 차원에서 분명히 한 것이다.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강론 지침서」 역시 공현의 핵심을 동방 박사 사건에서 찾는다. 대축일을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난 사건’으로 설명하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모습을 제시한다.
교회 전통에서도 대축일은 초기부터 보편성을 강조하는 축일로 이해돼 왔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는 공현을 성탄과 분리하지 않고 예수의 탄생·세례·카나의 혼인을 함께 기념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드러난 여러 순간’을 하나의 신비로 묶어 기억해 왔다. 이 전통 역시 공현의 중심이 ‘탄생’이 아니라 ‘드러남’에 있음을 보여준다.
대축일 안에서 ‘그리스도가 만민에게 드러남’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장면은 동방 박사의 ‘이방인의 경배’다. 이 대축일의 핵심을 ‘예수님이 태어나셨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이 누구이며, 그 구원이 누구에게까지 열려 있는가’를 밝히는 데서 찾는다면, 그에 대한 가장 압축된 대답이 바로 동방 박사다.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들일 뿐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를 처음으로 알아보고 ‘응답’한 이들이 동방 박사였다는 점 또한 대축일을 지내며 성찰해 볼 대목이다. [가톨릭신문, 2026년 1월 4일, 이주연 기자]
[주님 공현 대축일 특집] 교회는 왜 ‘별’을 바라볼까?
창조 신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
누리호에 이어 아리랑 7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면서 국내에서 우주·천체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별을 바라보며 연구하는 것은 종교와 무관한 과학자들의 몫이라고만 여겨지기 쉽지만, 교회는 오랜 역사 안에서 천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왔다. 교회는 왜 ‘별’을 바라보는 걸까?
교회와 천문학이라고 하면 많은 이가 떠올리는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다. 지동설과 천동설을 둘러싼 논쟁은 마치 신앙과 천문학의 대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갈릴레오 이전에 지동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이후로도 천문학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제는 계속 있었다. 크리스토프 샤이너 신부(1575~1650)는 망원경 관측으로 태양 흑점에 관한 체계적인 기록을 남긴 대표적인 천문학자다. 별의 ‘색’을 분류·목록화 하기 시작한 천문학자는 베네딕토 세스티니 신부(1816~1890)였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예수회 신부들의 활약도 컸는데, 그러다 보니 현재 달의 지형 중 예수회 신부의 이름이 붙은 분화구가 33개나 된다. 또 오늘날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 중 가장 대표적인 ‘빅뱅 우주론’을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 조르주 르메트르 신부(1894~1966)다.
이처럼 교회가 유수한 천문학자 신부를 배출해 온 것은 교회가 얼마나 천문학에 큰 관심을 지녔는지를 보여준다. 지동설, 빅뱅 우주론 같은 천문학적 발견들은 마치 성경의 말씀과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교회는 오히려 이런 천문학적 발견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교황청이 1891년부터 바티칸 천체관측국을 운영하며 천문학과 우주과학에 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서 “대폭발이 우주의 시작이라고 하는 빅뱅 우주론은 창조주의 개입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창조주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가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교회의 역사와도 깊이 연결돼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 ‘그레고리오력’도 교회의 오랜 천문학 연구의 결실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정할 수 있었던 것도 춘분과 만월을 계산할 수 있는 천문학적 지식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 세상에 태어난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한 사람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바로 동방 박사들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9년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을 통해 “천문학자인 동방 박사들은 하늘에 새 별이 나타난 것을 관찰하고, 이 현상을 거룩한 성경이 예언한 유다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표징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날에도 갈릴레오의 뒤를 잇는 많은 과학자의 열정과 신앙 덕분에, 그리스도교적 우주 이해는 이성도 믿음도 포기하지 않고 둘을 서로 열매 맺게 하면서 새롭게 꽃피는 흥미로운 징표들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동방박사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Epiphania)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심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함으로써 주님께서 세상에 드러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박사”는 그리스어로 [마고스](μάγος)라고 하는데, ‘현자’ 또는 ‘꿈의 해석자’를 뜻합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마고스’가 기원전 6세기경 메데인들 중에서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지닌 사제 계급이었고, 기원전 450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된 뒤로는 그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후, ‘마고스’는 점술이나 마술에 능숙한 사람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8,9-24에는 사마리아인들을 현혹한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나오고, 13,6-11에는 엘리마스라는 마술사가 등장합니다. 한편, 마태오 복음에서는 동방에서 별을 보고 유다인의 임금께 경배하러 온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같은 단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데 반해, 마태오 복음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구약의 모세를 떠올리게 하는데, 동방박사 이야기도 모세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민수 22-24장에 나오는 발라암(Balaam)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 그들을 두려워한 모압의 왕 발락(Balak)을 마주하게 됩니다. 발락은 모세와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해 동쪽 산골에서 발라암을 데려옵니다(22,7). 그런데 발라암은 모세를 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의적인 예견을 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24,17). 이는 다윗왕의 등장으로 간주되었는데, 후기 유다이즘에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동방박사들의 신분이나 숫자,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중적인 전승에서 그들은 왕으로 소개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도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시편 72,10)라는 구절을 노래합니다. 또한 복음에는 동방박사가 세 명이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오리게네스는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개였다는 점을 들어 이들이 세 명이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8세기에는 그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발타사르(Baltasar), 멜키오르(Melchior), 가스파르(Gaspar)입니다. 한편, 시리아 전승에서는 라르반다드(Larvandad), 하르미스다스(Harmisdas), 구쉬나사프(Gushnasaph)로 나오기도 합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가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해진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알리면서 앞으로 펼쳐질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