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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강변의 울음
시편 137:1~ 9
오늘 읽은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쓴 유명한 포로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가장 역사적인 배경을 생생하게 그려 놓은 것을 보아서 포로 기간 중에 포로의 한 사람으로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체험한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편을 읽어 보면 시로서 우수한 점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박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모습, 그래서 앉아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 시인이 이 시를 쓸 때는 주전 538년 고국으로부터의 소식은 더욱 비참하여 에돔 자손들까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파괴를 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후반을 보면 그들에 대한 저주가 나와 있습니다.
이 시는 사실 안전한 조국 강토 위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절실히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전쟁으로 인하여 고향을 잃고 부모, 형제, 친척을 잃고 재산을 빼앗긴 경험을 한 사람, 더구나 조국을 잃고 망명의 길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자기의 시련과 같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이 시는 애국심과 종교심이 함께 깃들어 있는 귀한 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가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는 눈물을 뿌린 것입니다.
이 시편을 읽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얼마나 슬퍼했는가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 시편 137편 1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들은 이방의 땅, 본국과는 거리가 멀고 먼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온 것입니다. 포로생활의 비참함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긴 하나 자기 목숨이라고 할 수 없고 인권이란 말과는 상관없는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바벨론 땅은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하던 말하자면 속박의 땅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로로 데려다가 거기서 일을 시킬 목적으로 그들을 강변에 숙영케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흔히 노예들이 젓는 전함에서 일하게 했습니다. 요즘처럼 하천 관리 시설이 잘된 때라고 하면 강변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운치가 있고, 집값으로 말해도 딴 곳에 있는 집보다 갑절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하천 관리가 잘되지 못할 때라 홍수가 나면 하천가에 있던 것은 모두 쓸려 내려갔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데 불리하고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 곳 아닌 다른 곳에서 살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만큼 손해이니까 농토로도 사용할 수 없는 불모지, 홍수 때가 되면 물에 잠겨 버리고 마는 그런 곳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민족이 살도록 했습니다.
포로된 민족의 억울함은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가서 그발강가(겔 1:3)가 아니면 올래 강변(단 8:2)에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들은 강변에 앉아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불행을 씹으며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28, 29절에 보면 “혼자 앉아서 잠잠한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했습니다. 그들은 머무르기를 기대하며 만족해하는 자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강가에 앉아서 시온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이 눈물은 어떤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흘린 것이 아니라 생각이 깊은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울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앉아서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입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그 거룩한 산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애정이 자기들의 집에 대한 관심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고향의 집은 빼앗기고 불타 버리고 말았지만 그것보다도 전에 하나님의 전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육신보다 영이 더 중요한 것을 여기서 말해 줍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그들이 시온의 궁전에서 가졌던 시온의 옛날 영광과 만족을 기억하였습니다. 예레미아 애가 1장 7절에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확정함을 비웃도다”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시편 42편 4절에도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그들은 현재의 시온의 황폐를 기억하였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때가 오면 황폐함이 없어질 것을 내다보며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소망의 날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희의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소망의 눈물입니다.
시편 102편 13, 14절에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했습니다.
이제 본문 2절을 보십시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스라엘 민족은 오락과 접대를 위해서 수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을 멀리 치웠습니다. 왜요? 그때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이며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울고 통곡하라고 부르신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을 잘못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의 매를 맞을 때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회개할 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되어 가 있던 저희들은 그들의 영혼이 슬프기 때문에 수금을 사용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저희의 슬픔을 좀 덜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하려고 수금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슬픔이 너무 커서 도저히 수금을 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수금을 지금 사용할 수 없다고 버린 것이 아니라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습니다. 여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레위사람들의 수금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언젠가는 이 어두움의 때, 슬픔의 때가 지날 것인데 그때에 다시 사용할 것을 생각하면서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둔 것입니다. 오로지 현재 수금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곁에 둔 것 뿐입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아니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저희는 수금을 숲 속에나 혹은 굴 속에 감추어 두지 아니하고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저희가 그들의 수금을 봄으로써 이 슬픈 변화에 대처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들의 나라로 사로잡아 가고 포로의 땅을 황폐케 하고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괴로움을 더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입니다. 불행에 처한 적이라고 할지라도 긍휼히 여기고 무시하지 않는 것이 인도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나무라거나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현재 당하는 슬픔으로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너무도 비열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고난받은 사람에게 고난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비단 옛날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되어 갔을 때 행한 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믿는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책망하거나 하나님의 저주라고 멸시하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면 그 기쁨이 갑절로 늘어나고, 슬퍼하고 고통하는 사람과 함께 가슴 아파하고 울면 그 고통과 슬픔이 절반으로 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구나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온의 노래를 청한 것은 모독적인 일이며 불건전한 행위입니다. 그들은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시온의 노래만을 청했습니다.
여러분, 옛날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침입해서 성전의 기구를 자기 멋대로 다루면서 성전 접시에 포도주를 따라 건배하며 마셨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조롱하거나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하반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제사장 엘리의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전에서 못할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소행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들은 악을 행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시 73:11)고 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이 그를 멸시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무시를 당했지만 참았습니다. 4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고” 그들은 수금을 멀리 두고 다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도록 환심을 사기 위해 수금을 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39편 1, 2절에 다윗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왜 선한 사람이 악인 앞에서 말을 삼가야 합니까? 그들은 선한 사람의 말을 곡해하며 비웃고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시인이 제시한 이유는 매우 겸손하고 경건합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고”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와 같이 어려운 자리, 슬픔 가운데 있으면서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하고 동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노예가 주인 앞에서, 포로가 잡아온 사람 앞에서 시키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고 하는 항거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집에서 총무로 있을 때 직분은 총무였으나 신분은 노예였으므로 주인의 아내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응해야만 하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붙들린 겉옷을 던지고 뛰쳐나갔던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억울하게 죽느니보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바벨론 사람들의 요청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저희들이 이스라엘 포로에게 ‘여호와의 노래’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그 노래는 거룩한 노래입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만 사용하는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들이 있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가령 오늘 우리 사회에서 술마시고 춤추며 육신의 향락을 누리는 곳에서 찬송을 부르는 일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찬송의 가사가, 찬송의 곡조가 같은 것이라고 해서 찬송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는 노래가 찬송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은 잊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신앙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의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과장해서 말하거나 심지어 더러운 말을 해서 희롱을 하는 일이 있어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본문 5, 6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치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을 붙을지로다”
이 경건한 포로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을 사랑하므로 그들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예루살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어도 잊지 아니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을 지내는 동안에 바벨론에서 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저희는 예루살렘을 본 적도 없고 그저 부모님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것 뿐이요, 글을 통해 읽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예루살렘을 그처럼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잊지 못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젊은 사람들의 손바닥에도 예루살렘이 새겨졌습니다. 그들 앞에 어려움이 계속 닥쳐온다고 해도 저희는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은 포로생활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꼭 기도했습니다. 그때 포로되어 온 청년 중에 다니엘만큼 정부에 기용되어 요직에서 일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바쁜 일과 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에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들이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억했고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왠지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나누셨습니다. 조반 드신 후에 사도 베드로를 불러 따로 세우면서 그에게 물은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한 번만 아니고 세 번씩 같은 질문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 심지어 부모보다, 아내나 남편보다, 자녀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면 어떤 희생이라도 달게 받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향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처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저희가 그 일에 실패했다고 할 것이면 그들이 당하는 불행을 엄숙한 저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내가 내 조국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벨론의 아들들을 기쁘게 하고 바벨론의 신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내 노래와 수금을 사용했다면 나로 하여금 노래하며 수금을 켜는 것을 영원히 할 수 없게 하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일편단심 하나님만 사랑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내 오른손이 재주를 잊을지로다” 노련한 음악가의 손은 그 손이 떨리지 아니하는 한 그 재주를 잊지 아니합니다. 아니, 내가 어디 있든지 예루살렘을 위하여 선한 말을 하지 못한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을 붙을지로다”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 사람들 가운데서 시온의 노래를 감히 부르지 않을지라도 그 노래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포로생활의 속박이 벗어지기만 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노래라고 하더라도 전과 같이 쉽게 노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만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한 튼튼한 각오가 서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 무엇보다 누구보다, 하나님만을 더 사랑하십니까?
끝으로, 악의 세력은 결국 멸망한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혹시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막대기를 들어서 초달을 내리십니다. 아프게끔 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정신이 들고 바른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은 그가 들었던 막대기를 꺾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막대기를 사랑하지 아니하십니다. 그저 때리기 위해서 잠시 손에 잡은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원수갚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재난,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벌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우리의 지은 죄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가슴 아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면 죄를 범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시편 30편 4-5절을 보세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 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고통 속에서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시는 분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기쁨의 아침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경각심의 비밀
(시 137:1-9)
찬송 340장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통하고 애절한 슬픔과 예루살렘에 대한 향수, 그리고 원수들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 드러나 있는, 어떤 비탄시부다 더 처절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비탄시입니다.
1-6절은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어떤 슬픔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노래를 그들의 노리게로 불러야 했을 때 그처럼 슬프고 괴로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7-9절에서는 자기들을 포로로 삼은 바벨론이 그들의 불의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시 137편이 주는 교훈은 바로 경각심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멀리하고 게으르고 타락한 결과가 얼마나 슬픈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