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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구조화, 수필의 본격화
-본격수필시학을 찾아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 사실 소재를 가지고 플롯작업을 하면 그 결과는 더 이상 역사, 사실과 1:1의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개연성의 세계가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플롯, 즉 구성법은 모든 문예창작의 기본작법이 되었다. 본격수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작법과 문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창작법의 핵심요소인 메타포의 원리를 대표적 작법으로 삼아 발전하게 되었다.
시작법의 문제는 시 창작발상에 대한 시어 찾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소설작법은 소재에서 얻은 허구적 인물 이야기 창작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 소설 작법과 달리 본격수필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만들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 정화, 순화하는 데 있다. 본격수필의 작법이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창작에 있는 이유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태생부터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으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태생적 특징은 에세이가 본격수필로 진화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이관희의 말처럼,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사실적 토의>를 하는 데 그치지만 본격수필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창조적 구성작업, <문학적 사실의 소재 형식>, 즉 상관화로 변용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II. 본격수필과 적들의 이름
나는 ‘수필’이라는 말 앞에 ‘본격’이라는 어사를 붙여왔다. 이런 이유는 수필을 잡문시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냥 수필이 아니라 왜 수필다운 수필을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자신의 본질과 순결성을 재호명하는 방식이면서 , 동시에 ‘수필 아닌 것들’에 대한 ‘구별짓기’의 욕구와 자의식을 그러내는 일이다. 그러나 ‘본격수필’은 엄밀히 말해, 실체를 가진 수필장르의 명칭이 아니며, 특정한 수필적 조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담론화 과정을 끝내지 못했다. 그 고유한 미학적 형식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개념의 실체적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차별화의 욕구는 ‘작본격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라는 ‘본격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 그 법이 있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도 볼 수 없다.’에서, 또는 ‘본격수필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본격수필이 아닌 것은 있다.’라고 말하게 한다. ‘배제의 원리’ 혹은 ‘부정의 전략’에 의해 개념의 자기 정체성이 주어진 것이다. 타자와 적들을 호출함으로써 본격수필은 자기 이름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 구별과 배제의 논리화의 관련된 궤적을 더듬어 보겠다.
문학이란 <한 편의 의미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본질적 대답이며 또한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문예작법의 핵심은 하나의 창조적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한 모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격수필을 일러, “주제의식이 형상적으로 체험화되고, 비유적으로 의미화된 글”이라고 정의한다. 과학은 하나의 사물에 대한 한 가지의 개념적 이해만이 가능하다. 만약 한 마리의 ‘개구리’를 보고 사람마다 이해나 인식이 다르다면, 이 세상에 ‘개구리’라는 객관적 동물은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차원에서 보면, 토끼는 토끼일 뿐이고, 사자는 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같은 과학적 사물존재가 아니다. 예술은 그 존재하는 양상 자체가 창조적이다. 그래서 도올은 ‘작가’에서 ‘작’의 의미는 ‘creative'라 하였고, 김지하는 문학을 ’어불성설‘이라 하였다. 따라서 본격수필은 동양시학의 ’언불진의, 입상진의‘, 즉, 개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형상적으로 체험하는 편이 보다 우수한 창조성을 가진 작품이 될 것이다.
III. 본격수필작법과 그 원리의 구조화
이런 본격문학의 역사적인 토대 위에 나는 ‘본격수필’이란 용어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필을 잡문이라고 폄하하고 비하하는 데 대한 방어이면서, 오도되고 있는 수필문학의 개념과 본질을 되찾아야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본격수필작법이 있다고 전제하고, 안성수가 말한 대로 크게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수필창작에 절대적인 공식이나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명수필들은 어떤 보편적인 창작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저를 포함하여, 오창익, 한상렬, 이관희 등은 그런 원리와 기법들에 논리성과 체계성을 부여해 왔으며, 이런 기법과 원리가 새로운 수필을 잉태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철학적 통찰과 글감의 미적 구조화, 그리고 호소력 있는 수사법 탐구는 수필의 미학성과 철학성을 결정짓는 창작의 핵심과제라 하겠다. 그럼에도 많은 수필가들이 이러한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창작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경시하거나 탐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수필이 질적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수필가의 머리 속 수필시학의 부재 결과는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되어 철학적 깊이와 미학적 울림이 약하다는 평가와 함께 고질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예술작품의 평가에서 최종적인 문제는 예술성과 그 울림의 유무에 쏠리게 된다. 아무리 이야기 구조가 견고해도 미적 울림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작품의 예술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이야기를 미적구조로 전환하는 핵심원리인 플롯에 대해 무관심할 경우, 텍스트는 작가의 미적 창작 의도가 배제된 단순한 줄거리의 순차적 배열에 불과하게 된다. 플롯은 예술성이 약한 스트리를 감동이 큰 미적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배열원리라는 점에서 작가들에겐 중요한 탐구대상이다. 수필은 짧은 분량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산문 장르라는 점에서 더욱 정교한 플롯과 구조미학이 필요한 것이다. 작품의 미적구조와 그 예술적 울림으로 경쟁하고, 삶의 철학을 창의적 형식미학으로 형상화하는 전략의 축척 없이 수필 장르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헨리 제임스가 소설에는 백만 개의 창이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에도 백만 개 이상의 창이 있다. 이야기의 다양한 구성미학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 중층구조론과 수필의 구조시학
모든 문학작품의 의미는 그 구조에서 나온다. 독자를 감정이입의 세계로 인도하는 미적 울림도 기본적으로는 작품구조가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공감의 힘이다. 이러한 구조의 힘은 평면층에서는 단어와 문장들의 결합방식에서 창조되지만, 입체적으로는 이야기 요소들의 예술적 결합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작가가 작품의 미적 구조에 대하여 무관심할 경우, 수필작품은 허약한 울림구조 속에 갇히게 된다.
구조시학자들이 제기한 이야기의 중층구조론은 수필창작의 원리를 설명하는 기본틀로 삼을 만하다.츠베탕 토도로프는 『구조시학 (Introduction to Poetics)』에서 시학(Poetics) 이란 “한 개별적인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문학 작품 전체에 스며있는 어떤 내재적이고 추상적인 법칙들에 대한 연구”라고 정의한다.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로만 야콥슨적 용어이다. 토도로프의 『구조시학』의 경우에는 “서사학” 만을 다루고 있는 문학이론이다. 명제인 문장들이 모여서 연쇄의 문단을 이루고, 이것이 확대되면 한편의 완성된 작품이 되는 것이 안성수의 설명이다.
구조시학을 수필작법에 응용시킨 안성수의 이론에 따르면, 수필텍스트는 심층과 표층, 담론층이 유기적으로 생성하는 입체구조로 설명된다. 여기서 각 층위의 기본적인 기능과 창작기법을 연결시켜 정리하면 어떤 보편적인 법칙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심층구조에서는 제재의 철학적 통찰과 주제의식의 선정문제를, 표층구조에서는 이야기의 미적 구조화를, 그리고 담론층에서는 서술과 수사의 방법들을 활용하는 단계로 규정된다. 이제 심층 -표층 -담론층으로 이행되며 유기적으로 생성되는 수필텍스트의 상관화 과정을 살펴보겠다.
“제재와 주제 사이의 상관성이란 수필가가 나타내려는 주제의식과 대상 사이에 얼마나 참신한 유사성이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수필 「탱자꽃」의 주제는 곳곳에 숨어서 글 전체의 통일된 흐름을 조종하고 있다. 이 글의 대표격 문장은 글의 맨 마지막 문장 ‘이제 찬란한 불똥 속에서 내 꿈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이다. 제재는 주제가 요구하는 적재여야 한다. 따라서 담보노동을 하는 아이들의 고달픈 삶을 나타내기에 가시에 에워싸인 탱자꽃이 어느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았다.
<예문1>
내가 탱자나무 곁으로 발걸음을 하는 때는 꽃이 필 때였다. 머리가 띵하도록 씁쓰레한 신맛에 진저리 치던 기억을 잊을 만하면 봄이 왔다. 죽은 듯 말라있던 가시 돋친 몸에 초록물을 돌리고 희푸른 꽃몽오리가 몽알거리기 시작하였다. 창창한 가시 방진 속에서 목을 쭉 빼고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는 작은 꽃봉오리들은 얼마나 위태로워 보였는지. 순수한 하얀 색에 이끌려 부드러운 꽃잎을 살짝 건드려보기도 하였지만 걱정이 앞섰다. 벌이나 나비가 들락거리다 얇은 꽃잎을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꽃잎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봉오리가 피다가 가시에 꽂히는 것은 아닐까. 어린 마음을 흔들었던 근심이 서러움의 정서가 되었나 보다.
- < 수필 「탱자꽃」셋째 문단 > -
①그 서러운 꽃을 며칠 전 하늘에서 보았다. 축제의 기쁨을 뿜어내는 축포소리에 이어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팡팡 터지는 하얀 불꽃 하나하나에 창백한 어린이들의 수심에 찬 얼굴이 들어있었다. 담도 제대로 없는 창고 같은 공장의 마당에서 폭죽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가시에 둘러싸여 그 가시의 겨드랑이에서 조심조심 얼굴을 내미는 연약한 꽃봉오리들이 떨고 있었다. 빚에 묶여 폭죽을 빚고 있는 어린 담보노동자들의 기막힌 삶이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울고 있었다.
- < 수필 「탱자꽃」넷째 문단 > -
작가는 탱자꽃과 탱자나무 가시울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도 시바카시에서 담보노동을 하는 십대 어린이들의 힘겨운 삶을 그 탱자꽃과 가시울에 오버랩 시킨다. 가시울의 창창한 가시방진은 담보노동에 갇혀있는 어린이들의 창고 같은 마당에서 위험에 방치된 채 일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환경이 되고 그 가시울의 가시 사이에 위태롭게 얼굴을 내민 탱자꽃은 창백한 어린이들로 치환되고 있다. 가시 때문에 상처 받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작가의 어린마음에 깃든 서러움의 정서는 그 느낌 그대로 불꽃 하나하나마다 떠오르는 아이들의 얼굴에 수심을 심었다.
수필 「탱자꽃」의 서두는 ‘참 서러운 꽃이다.’로 시작한다. 첫 문단 첫 문장의 그 서러운 꽃이 넷째 문단의 처음에 문장①을 통해 담보노동을 하는 아이들의 수심에 찬 얼굴로 변용되어 서러움의 정서를 드러낸다. 작가는 하늘에서 팡팡 터지는 불꽃 속에서 수심이 가득한 아이들의 얼굴을 본다. 빚에 담보 잡혀 폭죽을 빚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가시의 겨드랑이에서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며 떨고 있는 탱자꽃으로 상상한다. 이는 지각의 잔상이나 기억된 심상을 분해하고 결합하여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창조적 상상의 방법에 따른 것이다. 어린 시절에 마음속에 각인된 가시덤불 속에 갇힌 걱정스럽던 꽃잎에 대한 기억을 부조리한 환경에 매몰된 아이들의 처지와 결부시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하늘을 보며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과거의 사건을 기억 속에 떠올려 서술하는 모방적 상상보다 문학적 형상성을 구축할 수 있기에 훨씬 효과적이라 할 수 있겠다.
<예문2>
②그 아이들은 탱자꽃이었다. ③어른들이 촘촘히 엮어놓은 감옥에 갇혀 가시울타리 틈새를 뚫고 간신히 굽은 꽃줄기를 내밀어 존재를 말하는 삶이 힘겨운 탱자꽃이었다. 학교도, 놀이도, 하고 싶은 일도 거부당한 채 노동의 현장에 갇혀버린 어린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꿈은 무엇이 있을까. 가을이 되면 꽃 떨어진 서러운 자리에 동그란 탱자 여물듯, 세월이 가면 아이들도 어른이 되고 나름대로 삶을 꾸리겠지만 담보노동을 하며 익힌 열매가 어찌 귤의 꿈을 꿀 수 있을까. 같은 씨앗이라도 강의 남쪽에다 심으면 귤이 되지만, 그것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어 버린다는 고사도 있지 않은가. ④꽃부터 시들어버린 치트라의 탱자는 어찌 여물어질지 아득할 따름이다.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팍팍한 삶의 한가운데서 아이들은 탈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 < 수필 「탱자꽃」여섯째 문단 > -
②~④에서는 보다 강력하게 상관화된 대상을 노출시켰다. 어른들이 촘촘히 엮어놓은 감옥은 아이들의 노동환경으로, 거기에서 일하는 어린 아이들은 가시울타리 틈새를 뚫고 간신히 굽은 꽃줄기를 내밀어 존재를 말하는 탱자꽃으로, 가을에 여는 탱자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꾸리게 될 삶과 상관 짓고 있다. 또한, 탱자의 꿈과 대비되는 귤의 꿈이 작가가 소망하는 아이들의 미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회남의 귤을 회수를 건너 회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어버린다는 중국의 고사를 불러온 것은 표현상의 상관화를 활용한 것이라 하겠다. ‘귤화위지橘化爲枳’란 환경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고사성어가 아니던가.
<예문3>
인도 폭죽산업의 중심지인 시바카시의 밤은 화려하다. 이곳에서는 생산된 폭죽을 실험하느라 밤마다 불꽃축제가 벌어진다. 폭죽이 터지는 동안 밤하늘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불꽃이 스러지고 나면 어둠은 더욱 깊어진다. 그 어둠 속에 열네 살 치트라와 수많은 십대 아이들이 있었다. 치트라는 열 살 때 폭죽공장에서 일하다가 폭발사고로 전신화상을 입었다. 피부가 오그라들어 이마와 눈을 제외하고는 성한 데가 없다. 마디가 불분명해진 손은 턱 밑까지 오그려 붙었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다. 온 몸을 담요로 가리고 눈만 내놓은 채 아이는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⑤“얼른 나아서 부모님 빚을 갚아드리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통역은 울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아이의 푸른 기운이 도는 눈빛이 맑았다.
- < 수필 「탱자꽃」다섯째 문단 > -
⑥향기가 그렇게 곱지 않았다면 벌도 나비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들지는 않았을 게 아니겠는가. 코를 킁킁대며 동그란 주머니처럼 닫힌 꽃봉오리를 벌려보기도 하고 춤추듯 벌어진 꽃잎을 따서 소꿉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 서러움이든 그리움이든 그들의 마음은 탱자꽃을 향해 열려있을 것만 같다. 자신보다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그 아이들의 눈물겨운 마음은 탱자꽃보다 더 향기롭다. 어른들이 나서서 현실의 날 선 가시울타리를 걷어내고 하얀 꽃빛처럼 순수한 아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 수필 「탱자꽃」여덟째 문단 > -
탱자꽃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창백하고 하얀 꽃 이파리만큼이나 고운 향을 지녔기에 작가는 ‘내가 탱자나무 곁으로 발걸음을 하는 때는 꽃이 필 때였다. -중략- 부드러운 꽃잎을 살짝 건드려보기도 하였지만 걱정이 앞섰다. 벌이나 나비가 들락거리다 얇은 꽃잎을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꽃잎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봉오리가 피다가 가시에 꽂히는 것은 아닐까. 어린 마음을 흔들었던 근심이 서러움의 정서가 되었나 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트라의 푸른 기운이 도는 맑은 눈빛은 탱자꽃의 하얀 꽃이파리를 연상시킨다. ⑤와 ⑥에서 사고로 세상과 격리된 치트라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은 탱자꽃의 진한 향기와 상관되어 있다. 서러움이든 그리움이든 ‘탱자꽃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란 지금 작가가 오십대의 부모이며 어른인 것처럼 세상 모든 어른들의 드러나지 않는 선한 본성을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탱자꽃이 사나운 가시울 속에서도 나름의 열매를 맺듯 치트라도 그 고운 마음에 어울리는 알찬 보람을 얻기를 기원하기에 작가는 어린 시절 추억의 탱자꽃 속에서 치트라의 삶을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예문4>
올해도 불꽃축제가 열리겠지. 한때는 나도 불꽃에 홀려 사진 촬영을 하느라 바삐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 불꽃 뒤에 드리워지는 떨어진 탱자처럼 빠르게 시들어가는 아이들의 영상을 어찌 지울 수 있을까. 이제 찬란한 불똥 속에서 내 꿈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 < 수필 「탱자꽃」마지막 문단 > -
불꽃축제와 불꽃에 홀려 사진 촬영을 즐기는 것은 아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한 사회를 대변한다. 그리고 떨어진 탱자가 날이 갈수록 쪼그라지고 볼품없이 변해가는 것은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담보노동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유추되었다. 빠르게 시들어간다고 표현한 것은 상황의 시급함을 함축하고 있다.“
수필은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작법과 본격수필의 작법은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서 갈라지게 된다. 송명화의 <탱자꽃>을 예로 든다면, 몽테뉴의 에세이라면 인도의 폭죽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소재에서 어떤 주제를 끌어내든 그 주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또는 토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주제가 아동의 문제이든, 가족붕괴의 문제이든, 꿋꿋한 삶의 의지에 관한 문제이든, 혹은 사회적 약자에 관한 문제이든 에세이는 개념적 사고와 논리적 문장을 통하여 주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찰스 램을 정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본격수필작법은 <탱자꽃>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주제를 개념적,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이것이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와 본격수필의 다른 점이다.
III. 로그아웃
시끄러운 군중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한 소수, 즉 문학적 취향을 가진 비평가, 작가, 고급독자로부터 존경받는 본격문학을 하려면, ‘수필시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용하면서도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울릴 만큼 고상한 가치있는, 의미있는 수필을 쓰려면, 일단 형상화라는 개념에 유의해야 한다. 본격수필은 주제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표달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해야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주제를 직접 내보이면 안 된다는 원칙 때문에 갖가지 다른 어휘와 표현을 동원하여 숨겨진 의미를 전달해 가면서, 주제의 핵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란 본격수필작법은 심층-> 표층->담론층으로 이어지면서 생성되는 하나의 유기체다. ‘이렇게 수필을 쓰라’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주문이다.
고은 시인은 “수필은 늦가을 남아 있는 익은 감이다. 수필은 철이 들어야 써지는 영혼의 내신이기도 하다면, 나는 아직도 철부지인 것이다.” 라고 썼고, 이문열은 “시와 소설은 수필만큼 깊이 천착하지 않아도 조금 훈련하면 되나, 수필은 끝없는 내적 수련 없이 한 줄도 쓸 수 없다.”라고 고백한다. 안성수는 에밀레종의 구조원리와 방법은 수필작법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적격이라고 했다. 성덕대왕신종이 주는 수필작법의 상관성은 크게 3가지 점에서 발견된다. 첫째, 신의 음성을 담기 위한 재료의 연금술적인 합금술이다. 둘째는 신의 울림을 담을 수 있는 종의 구조적 특성이다. 셋째는 울려 만들어내는 맥놀이의 소리 공학적 음향이다.
수필에 대한 오도된, 부당한 인식을 바꾸어주려면, 논리적이고 객관적인고 과학적인 평론이나 논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을 수필비평가가 되고, 수필학박사가 되고, 수필학 대한민국 명인이 될 때까지, 지금까지 섭취해왔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아니며, 그들의 장점은 모두 가져와 변증법적으로 변용하여 절묘하게 태어난 것이 미래문학인 본격수필임을 우리 작가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벨기에의 모리스 마테를링크처럼 우리 한국 작가들 중에서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하기를 소망해본다. 이런 갈급한 심정으로 이 작은 논고를 여러분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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