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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등학교 게시판에 아모스 9장을 묵상하며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어떤 힘보다도 강력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두려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은 피해 갈 사람이 없습니다. 땅 속에 숨어도, 하늘로 올라가도 하나님의 손이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시편 139편의 말씀과 대비됩니다. “땅에서 살 수 없어 바다 끝에 가고,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든다”고 고백한 시편 기자의 고백과 반대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피할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을 알고 섬길 때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자히 행하면 마침내 그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묵상의 글을 보면서 신학용어로 ‘무소부재(Omnipresence)’라는 단어를 너무나 잘 설명한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소부재’라는 뜻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속성입니다. 여기에 계시면서 동시에 저기에도 계실 수 있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만물이 신이다’라는 뜻의 범신론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범신론은 이런 피조물, 저런 피조물 모든 피조물이 각자 신이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을 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소부재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유속에 계시면서도 만유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며 모든 만유위에 계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살펴보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면서 동시에 저기에도 계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능력자처럼 동에 번쩌, 서에 번쩍이 아니라 동쪽에 있으면서도 서쪽에 계실 수 있는 분 그러면서도 한 분이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사도 아무리 영험한 귀신도 이런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흉내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절대 무소부재할 존재는 없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에게 기도하기도 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혹은 이 세상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해서 천주교회에서 성인으로 지정한 어떤 사람들 모두 절대 무소부재하지 않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신이 아닌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초인간적인 삶을 살다갔기에 천주교회에서 천사같은 존재,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한다고 해도 절대 그들은 하나님이 될 수 없고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무소부재를 따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무소부재의 속성은 이 세상의 죄인들에게는 아주 무섭고 두려운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들에게는 감사한 속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기에 하나님께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타고다니는 교통편안에서도,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깊은 곳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그런 기도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모스의 다섯 번째 환상 부분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 환상의 이름은 “범죄한 나라를 멸하시는 환상”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어디서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어디서든 하나님께서 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어디서든 복을 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첫째로 예배중에도 심판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아모스 9장 1절입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아모스 9장은 내용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적의 공격으로 멸망당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상황이 곧 이런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심판을 내리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중에 성전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고 예배드리는 중에 적에게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큰 범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감춘 채 교회로 피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교회는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앞에 나와 죄를 용서받고 치유받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범죄자, 장애인, 외국인,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교회에서 하나되고 치유받고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올 수 있고 예배를 통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며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고 나의 잘못된 것을 다 내어놓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용서와 치유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피해 예배를 드려서 자신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 자라면 그것은 용서와 치유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배자로 가장해서 자신을 감추려고할 때 그 예배는 절대 그를 숨겨주거나 지켜주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깔려 죽을 것이며, 거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 죄를 감춘 채, 성전에 숨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짓을 이스라엘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죄를 숨길 의도로 예배를 잘 드리는 척 하고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 오히려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배를 망치시면서도 죄에 대한 처벌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들에게 거룩한 예배자인 양 숨기며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많이 봉사를 했다 하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반드시 찾아내어서 무섭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아모스 9장 1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아모스 9장 1절입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제단 곁에 서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제단 곁에 서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지금 이시간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끼리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임재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내가 보니’라고 나와 있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라아”입니다. ‘눈으로 보며 조사하다’, ‘눈으로 지켜본다’라는 뜻입니다. 스가랴 1장 8절에 보면 “환상을 가지다” “환상을 본다”라는 말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민수기 12장 6절과 이사야 30장 10절에서는 명사형으로 “환상”이라는 듯으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광경을 보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을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말씀하시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제단”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가 “미즈 베아흐”입니다. “살육하다, 희생물”을 뜻하는“자바흐”에서 유래한 단어로 “제단, 단, 향단, 번제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9장에서 말하는 “제단”은 북이스라엘의 벧엘, 혹은 우상숭배하는 여러 곳에 임의로 새운 제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 유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번제단’을 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보면 이 제단이라는 단어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그 제단”이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에서 ‘그 제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놋 제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제단은 아주 특별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제단 네 귀퉁이에 뿔이 달린 제단은 예루살렘 제단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타나셔서 기둥머리를 멸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심판받아야 할 때 우선적으로 자신의 임재 처소인 성전을 버리셨습니다. 백성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조차 쓸모없이 되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 곁에 서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고, 그들의 중심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단 곁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희를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다가 망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앞에 신실한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종교에서 보여주는 그런 우상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배형식을 지키고 제물을 그럴 듯하게 잘 차린다고 해서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좌절과 낙담할 일이 생겼으면 좌절과 낙담을 하나님앞에 들고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를 실토하며 회개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아픔이 생겼으면 아픔을 고백하며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받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죄가 있으면서도 없는 척, 실패했어도 잘 되는 척, 악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거룩한 척 예배드리는 것은 참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모습 그대로,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지은 모습 그대로, 넘어졌으면, 넘어진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바라시고 그 모습을 하나님앞에 솔직히 드러내며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예배들 드릴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배의 형식을 통해 위선적으로 감추려고 할 때 그 예배는 우리를 절대 지켜주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4장 20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환란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섬기며 하나님안에서 쉼을 얻는 날입니다. 마음껏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안에서 쉼을 얻고 복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재앙이 닥치면 과연 어떨까요?
여러분, 1950년 6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이 날이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제 날이 밝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지라고 생각하며 평안한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북한 공산집단이 쳐들어왔습니다. 최소한 경기도, 강원도지역의 성도들은 예배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짐을 싸서 피난 갈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예배의 날에 재앙을 당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말씀이 오늘 아모스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데 멸망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폭발물이 터져서 여러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 이 말씀을 적용시켜서 그 교회 사람들을 전부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챨스 스펄젼 목사님은 런던에서 예배시간 설교하는데 목사님을 시기하는 어느 사람이 예배 중에 “불이야!”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사람들이 급하게 나가려하다가 10여명의 사람들 압사당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죽은 사람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죄’가 있어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사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일주일 내내 죄지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다가 주일에만 거룩한 척, 은혜로운 척 예배드리고 있는 모습, 주일에 교회를 찾아와 예배드리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이웃에 대한 긍휼도 없고 그냥 예배시간 앉았다가는 예배모습,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예배는 더 악해지는 예배입니다. 즉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든지, 아니면 더 나쁜 방향으로 변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나’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다운 예배, 거룩한 예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예배속에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보고 계시고 우리의 상황을 다 보고 계십니다. 예배가 저주가 되어버린다면 정말 이것은 큰 일입니다. 축복인 예배가 저주로 바뀌면 엄청난 재앙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이것이 저주가 되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온전한 예배자가 되시고 축복을 저주로 바꾸는 성도가 되는 일은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둘째로 우리가 그 분을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 9장 2절입니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요즘 뉴스를 보면 종종 죄를 짓고 외국으로 해외도피했다가 수년 만에 잡혀 국내이송된 사람들, 심지어 십수년동안 찾지 못하다가 어느 사건을 계기로 공소시효 바로 직전에 잡혀서 국내에 잡혀 온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죄를 짓고 숨어지내도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들통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9장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짓고 숨어지내어도 하나님께서 다 찾아서 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들을 찾아서 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씁니다. 땅을 파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도 잡아내시고, 하늘 꼭대기까지 도망쳐도 잡아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기로 결심하시면 죄인이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땅을 파고 무덤에 숨어도 찾아내실 것입니다.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 숨어도 찾아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올바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죗값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서 심판하십니다. 사람들은 살던 곳에서 죄를 지으면 사람들이 찾지 못할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갑니다. 한국에서 찾아낼 것 같으면 아예 해외 다른 나라로 날아갑니다. 해외 어디라도 그 곳에서 숨어서 지내려고 신분까지 위장하며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그런 노력이 혹 인간들에겐 먹힐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앞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눈밖으로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 9장 3절입니다.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여기서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갈멜산에 숨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멜산에 숨을까요? 왜 하필 ‘갈멜산’이냐는 말씀입니다. 어떤 학자는 “갈멜산에는 각종 토굴이 많아서 한 번 그 곳에 숨으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산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갈멜산이 이스라엘의 서북쪽 끝부분에 있어서 아무리 도망쳐봤자 갈멜산 꼭대기가 끝이다라는 생각에서 그런 말씀을 주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맞는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앞에서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끝지점이 갈멜산이라는 사실은 맞는 듯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갈멜산으로 피하면 이제 완전히 도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곳에서도 다 찾아내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어디로 피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9장 4절입니다.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원수에게 잡혀간다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원수에게 잡혀가서도 대접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고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연단하기 위해 고난을 주시지만, 어떤 사람은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병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병자가 아니고, 실업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실업자가 아닙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로 잡혀 갔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나라가 세 번이나 바뀌고 군주가 여러 번 바뀌는데도 계속 총리를 지냈던 사람은 다니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쓰시려고 잡혀 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왕비가 될 수 있었을 것이며 유다 백성을 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속에는 회복시키며 복을 주시려고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고 멸망당하게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택함받은 백성은 어려움이 오면 금방 자기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어려움이 올수록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점점 더 완고해지며 고집스러워집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어디서든지 우리를 살펴보고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며 우리에 벌을 내릴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 7~10절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언제 어디라도 하나님께서 벌주시려는 때와 장소에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앞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는 길은 속히 하나님앞에서 용서를 비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벌을 안 받기 위해 도망쳐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앞에서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셋째로 온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주인이십니다.
아모스 9장 6절입니다.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는 온 땅을 덮을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농사의 신을 찾았습니다.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어느 한 분야에만 신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신이신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이방신을 믿기 시작하면서 ‘물질의 신’, ‘풍요의 신’, ‘바람의 신’, ‘하늘의 신’, ‘태양의 신’, ‘달의 신’ 등등 여러 만물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농경에 중요한 해와 물을 중요한 신이라고 생각하고 ‘해의 신’, ‘물의 신’을 찾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가 물, 즉 비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그 비를 내리는 신을 ‘바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가나안 땅의 사람들의 죄를 살피시면서 죄를 지으면 비를 멈추셨다가 회개하면 다시 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는 못하고 비가 안오면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에게 제사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비 뿐만아니라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바알이 비를 주관한다고 생각하며 바알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야말로 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늘 문을 열어서 온 세계를 물로 심판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아모스 9장 5절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거기 거주하는 자가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 강 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이요”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호칭에 대해 ‘만군의 여호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야훼 짜바오트’라는 말인데 ‘짜바’라는 단어는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만군이라는 단어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득하다’ ‘최강’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짜바’라는 단어도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쓰여졌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란 하나님의 군대를 거느리신 우주 최강의 하나님,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하나님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온 천지를 다스리고 온 천지를 능력으로 정복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또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비를 내려 온 세상을 물로 덮어 심판하신 적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용암이 흘러나와 온 땅을 덮어서 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을 넘쳐 온 천지를 물로 뒤덮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웃나라 이집트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을 것입니다. 매년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하여 온 땅이 물천지가 되었다가 그 물이 빠지면 옥토와 같이 바뀌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당장의 어려움을 보며 그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방신을 찾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9장 6절입니다.
“그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우리의 바로 좌우 옆에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내가 두려울 것이 없음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자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릴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한다면 우리를 능력으로 지키시는 것을 깨달으시고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화를 내시며 엄청난 재앙을 말씀하시며 이제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듯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젠 완전한 멸망만 이스라엘에 남은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9장 8,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아모스를 통한 여러 가지 재앙이 환상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중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하기 위해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시지 않고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이 땅에서 어떤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이 세상은 불신자도 있고 신앙인인 척 살아가는 가짜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참 신앙으로 주님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항상 이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말씀중심으로 살아가며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앞에 쏟아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며 세상적인 자랑거리를 만들어가려는 사람은 거짓 신앙인입니다. 세상적인 자랑거리는 다 버리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돈없고 명예없고 지식없고 사람들이 무시하고 아무런 세상적인 내세울 것이 없는 인생이라도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만 있으면 나는 다 가진 거다”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