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의 미망인
전주 안골 노인 복지관
수필창작반 강 우 택
화가 이중섭의 탄생 100세 기념 다큐멘터리가
텔레비전에 방송되고 있었다.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천재 화가 이중섭을 모르는 이가 없다. 이 그림은 중고등학교 미술 교재에도 실려
있다.
이중섭은 부산 피란시절 가난했다. 그림을 그릴
캔버스[화포]가없어, 쓰레기장에 버려진 빈 담뱃갑을 골라 그 속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오늘날 유명해진 은박지 그림이다. 그 무렵
부산에서 개인 작품전을 열었다. 그러나 한 미술 비평가로부터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 미술에 대한 낙담과 함께 병까지 얻어 부산의 한 병원에서
56세의 나이에 행려병자로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사랑하는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에 남겨 둔 채.
나는 이 다큐를 보면서 문득 약 60여 년 전,
K군 M면, 면소재지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 첫 하숙집의 한 젊은 여인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내 나이 갓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진씨 성을 가진 노부부를 며느리가 모시고 살고 있는 그런 하숙집이었다. 그 집의 젊은 며느리는 한눈에 보아도 이지적인 눈매와 빼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등에 업은 갓난아기와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딸려 있었다. 여인의 머리에 흰 상복천이 꽂혀 있는 걸로 보아
이번 전란에 남편을 잃은 여인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전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도 않았으며 큰 흉년까지 든 해였으므로 딴 식구 하나 더 건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불편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이 하숙 집에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으며, 빨랫감
같은 것은 학교 숙직실에서 해결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 때는 내가 거처하는 사랑채 행랑방으로
꼬마가 와서 ‘선생님, 식사하시래요.’라고 연락병 노릇을 해주었다. 오래 되어 꼬마의 이름도 잊었다. 그러나 이상한 별명을 붙여주어 놀려대면
싫은 시늉을 하면서도 나를 곧잘 따랐던 귀여운 꼬마였다.
하숙생활이 계속되면서 그집 젊은 여인은 집
안팎에서 가끔 마주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민망하게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내외를 하는가보다
하고 개의치 않았다. 집주인이신 노인이 가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작두로 여물을 썰 때는 그 여물을 망태에 담아 쇠죽솥에 붓고 물까지 길어다
부으면 그 집 며느리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이렇게 큰집에 머슴 하나 두지 않고 사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 무렵 배가 고플 때는 나도 모르게 부엌을 두리 번 거렸으나 부엌은 그 젊은 여인의 전담구역이여서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었다.
어느 날 전주 집에 다녀오는 길에 동물그림책 한
권과 몇 권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등을 사가지고 하숙집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집 꼬마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스케치북에 내
도안책을 보고 토끼와 코끼리 같은 동물을 크레파스로 그려주며 색을 칠해 보라고 했다. 그 밑에 동물명도 써보라고 했으나 글자는 쓰지 못한다고
하여 한글도 써준 기억이 난다. 나비 두 마리 더하기 세 마리는 5마리 등을 가르치느라 꼬마와 밤이 늦은 줄도 몰랐다. 그 무렵 이 귀여운
꼬마는 나를 마치 제 큰형이나 삼촌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의 취학 전 준비교육을 제대로 시켜주는 셈이었다.
그 어느 날, 딸기와 같은 여름 과일을 쟁반에
담아 내 방으로 그 꼬마 어머니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아이가 선생님을 귀찮게 구는 게
아닌가요?”
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참 착하고 귀여운
아이입니다.”
나는 이렇게 화답했다. 아이는 내가 그려준 그림을 그대로 그려
보려고 잠도 자지 않는다며 그림에 취미를 붙인 것 같다면서 피는 속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전쟁 전 이 꼬마의 아빠는 중앙에서 활동한 화가였다고
한다. 한국 현대화가들 중에 본적을 무장리에 둔 진 씨 성을 가진 화가가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이곳 시댁까지 내려 왔는데
공산치하기 시작되면서 저들의 강요에 못 이겨 저들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전세가 역전도지 저들을 따라 도망쳐야만 했는데, 그들을 피해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대문 앞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 토벌군의 총격에 따라 님편은 대문 앞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때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도 했으나 어린 두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모두 혼자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았다. 여인에 대한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 전란에 어디 가족을 잃은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는가? 나는 내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보였다.
『경제학 개론 1949년 간행』, 그 책은 전란
전, 전남대학교 상대 전신인 목포초급상과대학에서 제 아버지가 저술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공산 치하에서 핍박을 받고 병까지 얻으셨다. 그해 8월
하순에는 북으로 끌려가다가 돌아가셔서 지인의 호의로 한 농가에서 치상을 치렀는데 지금도 ‘무안군 일로면‘ 한 야산에 모셨다고 들려주었다.
“선생님도 이번 전란에 아버님을
여의셨군요?”
“예, 그렇습니다.”
화가 이중섭의 일본인 아내는 92세의 고령에도 지금 살아계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진 씨 화가 부인의 소식은 모른다. 살아계신다면 두 자식과 함께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6‧25전란으로 아버님을 잃었지만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섰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느 누구도 그 어떤 불행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자만이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시련을 이기는 데는 시간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2016.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