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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2강
권위 있는 새 교훈
말씀 / 마가복음 1:16-45
요절 / 마가복음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면서 하신 여러 사역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사역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속성들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예수님의 권위를 알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핵심 사역이 무엇입니까?
16절과 19절을 보십시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16).”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19)”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으로부터, 사람 안에서 시작합니다. 저자 마가는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을 서론 다음으로 앞부분에 배치하므로 제자 삼는 사역이 예수님의 핵심 사역임을 밝힙니다.
여기, 배경으로 등장하는 갈릴리 호수는 바다로 생각될 만큼 큰 호수입니다. 헬몬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지나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흐르기 때문에 늘 물이 맑고 푸르고 맛있는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최대 330척의 배들이 이곳에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기 전 먼저 그들을 주목해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제자들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미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여러 차례 만나셨고 그들과 함께하며 대화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자신과 함께 길을 걸어갈 그들의 내면과 삶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관찰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당시는 제자가 가르침을 받고 싶은 스승을 직접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경우,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현장에 먼저 찾아가셔서 주목해 보시고 부르십니다. 주도권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말씀하십니다. “내 뒤에서 오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걷는 그 길 끝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는 자입니다. 예수님 뒤에 서서 예수님의 걸음을 한 발자국씩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는 것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잡힌 물고기는 수산물 시장으로 옮겨져 팔리거나 소금에 절여 관청이나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물고기에게 있어 사람에게 잡힌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16장 16,18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어부가 사람들을 낚는 것은 죄를 범한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자 하신 것은 심판과 죽음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들의 어부로서 죄악의 바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건져내 구원하는 일에 쓰고자 하십니다. 어부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이제 자신들도 어부가 되어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사망으로 끌려가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입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부자도 아니었고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하거나 권력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지식인도 아니었고 특별한 재능을 지닌 자도 아닙니다. 평범한 중산층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단지 그들에게 있는 위대한 점은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과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가지를 주목해 보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확실한 가치관과 목적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매일 동행하면서 그분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소망과 비전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맡겨드려야 합니다.
이 부르심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20절도 보십시오. 잠시 후에 만난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로서의 삶을 살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그물’은 삶의 기반이었습니다. 비교적 부유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아버지와 품꾼들’이 삶의 기반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물과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들의 삶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그물과 아버지를 의지해 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의지해 살겠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에서 그들을 향하신 꿈과 소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고기 잡는 일상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안정감이 있고, 열심히 노력해 번 돈으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영혼의 존재인 우리 인간의 모든 만족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삶이 주는 안정감도 포기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비전과 영적인 모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독교 심리학자 폴 트루니에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책에서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은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의 진정한 목적을 찾고 우리의 삶을 참되고 진정한 의미로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험, 부르심을 따라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지극히 평범한 어부들을 불러 세상을 뒤흔든 위대한 사람을 낚는 어부들로 키워내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처럼 응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또 지금 우리가 목자로서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빚으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스릴 있는 모험의 인생,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인의 인생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양 드립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 교육을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나훔의 동네’라는 뜻의 ‘가버나움’이라는 지역에 들어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십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어떤 충격적인 말을 들었을 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하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런 의미처럼 충격적으로 놀랐다는 말입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마침 회당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큰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당시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은 멸시의 표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시골 촌뜨기 예수여’, ‘배움과 학식이 없는 자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귀신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임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또,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알고 있다’, 여기서 상대를 안다는 것은 내가 상대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한글 번역은 귀신이 겸손히 신앙고백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귀신이 예수님과 맞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귀신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예수님은 입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십니다. 예수님께 맞섰던 귀신이었지만, 결국 예수님의 권위 앞에 맥을 못추고 다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광하며 고통스럽게 만들고 큰 괴성을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사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옮겨주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또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권위 있는 새 교훈에 귀신들도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권위는 왕이나 창조자가 가진 무소불위의 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르쳤는가의 내용보다는 누가 가르치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그 말을 했느냐에 따라 말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인용할 때 그 말을 누가 했는가를 밝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율법 교사, 서기관, 랍비 등 율법을 가르치는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위대한 랍비가 말하기를…’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마음도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없기에 모세를 비롯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맞는 말을 해도 사람들에게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자기 자랑, 지적인 유희로만 들렸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지식 장사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나 위대한 랍비를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그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안에는 인간들이 소유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있었기에 생명력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진정한 권위 있는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 이끕니다. 듣고 있다보면 그냥 있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사람의 지성만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은 즉각적이고 완전합니다. 시몬의 장모는 즉시 회복되어 훌륭한 요리 솜씨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예수님 일행을 섬깁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시몬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33절을 보면,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든 사람들을 일일이 손수 어루만져 주시며 고쳐주셨습니다. 또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그들을 평안케 해주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은 당시 죄로 인한 결과로 생기는 질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공동체에서 격리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죄의식과 외로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병환자가 지나가면 침을 뱉고 돌을 던졌습니다. 나병환자는 윗입술을 가리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병환자의 내면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피고름 나는 더러운 환부에 대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서 금지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말씀만 하셔도 나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환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가 회복되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나병이 나아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권위는 육신의 질병과 영적 세력인 더러운 귀신까지도 완전히 복종하게 합니다. 또 예수님의 권위는 단순히 능력을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향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예수님의 권위의 근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열병을 앓는 시몬의 장모 손을 잡아주시고, 부정하다고 알려진 나병환자에게 기꺼이 손을 대어 치료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와 상처들을 예수님께 기꺼이 들고 나아갈 수 있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등 여러 바쁜 사역 속에서도 중요하게 여긴 본질적인 사역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매우 이른 아침 새벽녘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개인적 사귐을 갖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셨습니다. 사역을 감당할 힘의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새 힘을 공급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아셨습니다. 이사야서 40장 29-31절은 말씀합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때 새 힘이 솟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른 아침 새벽녘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피곤할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전날 하신 병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을 내쫓아주는 사역들은 하나 같이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적 방향을 분명히 잡지 않는다면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정신없이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바쁘게 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가는 게 정말 바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의 일상을 보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였던 A.W. 토저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하는 일이다.” 열심히 교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것은 좋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이 줄어든다면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토저 박사는 계속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여기는 사람들은 조만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시험에 들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바쁠수록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멈춰 서서 바른 결단을 하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매일 기도 시간을 확보하고 꾸준히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 주시는 힘과 은혜를 덧입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역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전도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잠에서 깼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겨우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수님은 이미 가버나움의 유명인사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정착해 병원을 차리면 크게 한몫 잡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느새 예수님의 인기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 예수님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전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사셨지만 자신의 사명을 잊고 현실의 삶에 매몰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해변가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하고, 치유와 귀신 쫓는 것만 보고 그 능력에 열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 될까봐 가버나움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 전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는 복음을 가르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만이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무관심하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캠퍼스에도 전도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대학에서 철수하는 곳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렵다고 교회가, 선교단체들이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어디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도는 힘들지만 하나님이 인생들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전도는 더디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전도라는 미련해 보이는 방법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전도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핵심 사명도 바로 전도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씀의 권위가 있습니다. 영적 세력인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육신의 질병도 치유의 역사를 이루시는 권위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 당신의 권위로 우리에게도 다가오셔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를 제자 삼아주신 예수님의 권위에 즉각 순종해 예수님의 핵심 사역인 전도자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제자 양성가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쁜 일상의 삶과 또 여러 사역들 가운데서도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만큼은 확보하여 주님 주시는 힘과 은혜를 덧입어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