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한국전력공사법
제1조(목적) 이 법은 한국전력공사를 설립하여 전원개발(電源開發)을 촉진하고 전기사업의 합리적인 운영을 기함으로써 전력수급(電力需給)의 안정을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법인격) 한국전력공사(이하 "공사"라 한다)는 법인으로 한다.
제8조(유사명칭의 사용 금지) 이 법에 따른 공사가 아닌 자는 한국전력공사 또는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8]
제19조(다른 법령과의 관계) ①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공사의 주식과 「한국산업은행법」에 따른 한국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합한 수가 공사의 발행주식 총수(總數)의 50퍼센트 이상인 경우에는 다른 법령의 적용에 있어서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공사의 주식이 50퍼센트 이상인 것으로 본다.
② 공사에 관하여 이 법과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상법」 중 주식회사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전력 공급 사업자. 약칭은 "한전"또는 켑코(KEPCO)[9]. 2001년 원자력발전과 화력발전 주요 여섯 곳을 종속자회사로 분리한 이래로 송변전+배전+판매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즉,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전력거래소를 통해 발전 자회사 및 민간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구입한 뒤 송배전망을 거쳐 전기를 소매로 판매하는 회사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전력공사는 본질적으로 송변전+배전+판매사업자이다. 즉,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소매로 파는 회사이다. 이는 한국전력공사를 민영화시키기 위한 정부 각계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인데,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사업자는 아래에 나와있는 자회사들과 민간회사들이 있으며 한국전력공사는 이들이 생산한 전기를 배달만 해준다.
전기 및 전자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함에 따라 송배전망은 최소한의 국민 생활 보장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고 국가 안보와도 밀접해졌기 때문에 공기업인 한전에서 전국에 독점적인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
2. 역사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했다. 얼마 안 가 1904년 소유권이 미국으로 넘어가고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9년 일한가스회사(日韓瓦斯會社)로 넘어가서 일제강점기를 보낸다.
1950년대, 해방 이후 한국정부와 미군정 간의 귀속재산 처리 과정에서 국가 관리 기업이 된 전력 3사(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에 대한 처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여러 차례 3사에 대한 통합과 분리 민영화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면서 6.25 전쟁에 의한 한국의 전력망 손실과 더불어 가뜩이나 부족했던 전력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었고 전력3사의 방만한 운영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었다.
1959년 12월, 부흥부 내의 산업개발위원회가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제조업의 성장을 위해 전력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후, 산업개발위원회는 전력3사의 통합안을 제시했으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발전소를 증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1960년 2월, 상공부는 전력3사의 통합에 대해 3 가지 방안을 제시했으며 바로 협상에 돌입했다. 곧이어 일어난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부는 퇴진했지만 우려와 다르게 전력3사의 통합안건은 계속해서 논의되었으며 허정 과도정부에 들어 조선 전업에 두 배전회사를 흡수한다는 안건이 의결되었다.
1960년 11월, 2공화국 '장면 정부' 당시 국무회의에서 전기 3사 통합 국영화안이 의결되었다. 이후 해당 안건은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전문 35조)로 성안되어 법제처에 회부되었으며, 민의회 상공위원회에 회부되어 고려되지 못한 문제들의 처리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다만, 빠르게 진행되는 논의에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전력 3사의 통합조치가 자유주의 체제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특히 1961년 3월 28일 열린 민의원 상공위원회 의결장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격렬히 표출되었다. 당시 민주당이 전력 3사 통합을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이 전력3사 통합 저지를 당론으로 정하게 되면서 이른바 한전법의 성공이 불투명해졌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며 국회에 계류중이던 한전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군사정부는 전력3사의 사장을 모두 군인으로 교체했으며 전력3사통합에 대한 논의가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6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수정된 한전법이 의결되었고, 3일 뒤 전력3사의 주주총회에서 기존 회사의 해산이 승인되었다.
마침내 1961년, 7월 1일 한전이 정식 발족함으로써 기존에 남한 지역에 남아있던 3개의 전력 회사(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가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완결되었다. 초대 사장에 광복군 출신이자 5.16에 협조한 박영준 소장이 임명되어 68년까지 7년간 재임했고 후임으로는 역시 정변의 주역이자 전직 국방장관이던 정래혁이 임명되었다. 주식회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주주총회를 통해 사장을 임명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사장을 임명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사기업으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또한 군사정부가 입안했던 통합한전 설립안은 기존 민주당이 마련한 법안과 달리 사장과 부사장 및 10여명 내외의 이사들과 2인의 감사를 둔 수직적 단일집행기구를 채택했다. 이 때문에 출발은 명목상 사기업이었지만 사실상 반 공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지지부진했던 전력3사의 통합안이 매우 신속하게 일어날 수 있던 까닭은 군대의 상명하복 관습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지만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계속해서 의논되어왔던 전력3사 처리 문제에 대해 통합의 방향으로 사회적인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사정부 역시 쿠데타의 대의명분으로 내건 "자주경제재건"을 위한 첫 단추로 전력체계 확충을 위한 통합한전 출범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당시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외국 차관을 유치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었고 이를 위해서 통합한전을 설립하는 편이 유리한 지점에 위치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 전두환 대통령은 전기가 인간이 생활하는데 기본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국전력공사법'을 제정하였고 기존의 한국전력주식회사를 해산하고 완전한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로 전환했다.
1989년 8월 10일 코스피에 상장되었다.
1997년 연합뉴스로부터 YTN을 인수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의 전력 생산/공급/판매 전부를 맡아 왔으나, 이후 구조조정이 시작되어 2001년부터 발전 부문이 각 발전사와 한국전력거래소로 분할되었다. 이로서 한전은 송배전망 인프라를 통한 전력 공급과 판매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지주사로서 발전 사업 등을 전개하는 자회사들을 관리한다. 이는 한국전력공사를 민영화시키기 위한 정부 각계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인데,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사업자는 한전 자회사 외에도 민간회사들도 존재한다.
2000년 인터넷 회선설비/서비스 업체인 파워콤을 출범했다.
2003년에 파워콤을 LG그룹에 매각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민간사업자의 비중은 5.8%에서 12.3%로 빠르게 증가했다. 예전엔 화력발전소나 댐을 지어 수력발전소를 짓는등 국가단위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의 규모가 핵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유휴부지 하다못해 원룸건물에도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되고 저렴해졌다. 그래서 대규모 발전단지를 개발하는 민간업자들이 매우 많아졌고 일반인들 설치 비중도 꽤나 늘어나거 있는 추세다. 이들 사업자들은 발전 단가가 낮은 유연탄을 주로 사용하지 않으며 LNG, 신재생 발전 비중이 높기 때문에 전기 단가가 한전 발전 자회사들의 2.5배 정도다. 여기에 더해 원자재 가격도 급등하면서 좋지 못한 실적을 내고 있다.
2012년 8월 29일, 계속되는 적자에 못 이긴 한전이 적자의 원인이 전력거래소의 기형적인 전기 판매 구조에 있다고 주장하며 4.4조의 소송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지나치게 기형적이다. 투자도 저런 투자가 없을 정도다. 민간기업에서 발전한 전력을 비싸게 사서 그들에게 싸게 공급하는 시점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더 이상하다. 심
2013년부터는 순이익과 영업이익이 흑자로 전환하였고, 2015년 12월 기준으로는 영업이익이 11조를 돌파했을 정도로 상승세를 맞는다. 셰일 가스로 인해 위기 의식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산유국이 장기간 증산에 들어가 전반적인 에너지 가격이 폭락한 덕분이다.
2016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며 에어컨 사용량이 늘어나자 한전의 전기료 정책에 대한 비판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가정용 전기는 다단계 누진제로 운영하면서 산업용 등은 평률제로 한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게다가 한국전력공사 막대한 흑자를 내면서도 100조가 넘는 부채를 청산하는 일에는 소홀했다는 지적도 있다. 즉, 기업 경영을 방만하게 한다는 비판이다.
2018년 여름에도 과거의 기록을 넘는 폭염이 발생하여 에어컨을 쓰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재난 상황이 되자 누진제가 또 도마 위에 올랐고, 한국전력공사 측은 누진세 1.2단계 상한을 100kW씩 7.8월 한시적 완화하기로 했다.
국제 연료가격 상승, 천연가스•신재생 발전 비중의 증가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원전 비중 및 가동 일수 감소 영향으로 인해 2019년 1분기에 1조 적자를 내었다고 함에도 2020년 다시 흑자로 전환되었다. 해당 연도 네 개 분기 모두 흑자 달성에 성공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버블, 공급망 병목 등의 악재로 인해 천연가스, 원유가격 등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2021년과 2022년 적자를 기록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KWh 당 전력도매가가 평균 90원 내외였으나, 2022년 상반기에 무려 200원 수준으로 폭등했다. 전기를 판매할 때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정부입장에서 전기료를 올리면 물가상승, 및 서민경제 부담 때문에 가격을 올리기도 쉽지 않은 사정으로 적자를 보았다. 이후 물가상승률이 상승해감에 따라 전기료 또한 인상하고 원자재 가격도 진정되면서 2023년 3분기에는 흑자로 전환되었다.
3. 사업
전기판매
원자력발전
화력발전
기타
한국전력은 대한민국에서 송전망 인프라를 독점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전력거래소에서 구매한 전력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또한 보편적 공급의 의무를 지고있어 3가구 이상이 모인 마을, 그리고 10가구 이상이 사는 섬에는 적자가 나더라도 무조건 인프라를 구축해서 전기를 공급하는 공익적 역할도 같이 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도권 전력사용 집중 및 신재생에너지 도입에 따른 계통 불안정 등을 해소하기 위해 수십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송전망을 보강할 예정이다.
발전회사들이 분리되어 자회사화된 이후 한국전력공사는 발전회사가 생산한 전기를 별도의 독립기관인 전력거래소를 거쳐 구매하여 소비자에게 판매·공급하는 중간상인의 입장인데, 발전자회사만으로 전기 수급이 제한적이자 현재는 민간사업자 또한 발전에 참여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한전이 전기를 매입할 때의 도매가격은 계통한계가격(SMP)이라는 것이 기준이 되는데, 이는 각 원자재의 에너지 가격을 고려하여 결정되며, 가장 비싼 LNG 가격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이러면 원가가 저렴한 유연탄과 원자력은 과도한 초과이익이 발생하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것이 적용되어 환수되며, LNG에는 이러한 제한이 없다.
이는 국제에너지가격 상승 시 민간발전사 비중 급증과 맞물려 한전의 적자가 심화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한전과 그 발전자회사들은 원가가 한국가스공사의 LNG 수입가격에 맞춰지는 반면 민간사업자들은 가스공사를 거치지 않고 저렴한 가격으로 직도입하여, 그 사이에서 결정된 전력도매가는 한전의 손실이 가중되고 민간사업자는 타 원자재와 달리 차액 환수도 없기에 대량의 초과이익을 얻는 문제가 있다. 전기가 어디 저장되어 쌓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푸는 물건도 아니고 그날 생산된 양을 그날 소비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민간사업자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한국전력공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전기를 구입해야 한다.
3.1. 전력그룹사
한국전력공사와 그 자회사들을 통틀어서 전력그룹사라고 칭하며, 내부에서는 원 캡코(One Kepco)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자회사들을 대기업에서의 계열사와 비슷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아래는 그 중 개별 문서가 있는 자회사들의 목록 및 설명이다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남동발전
한국중부발전
한국서부발전
한국남부발전
한국동서발전
IMF의 요구로 2001년 분리된 위 여섯 곳의 발전회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과거에는 사실상 대한민국 전기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2010년 발전량 기준 94.4%, 설비용량 기준 85.8%에서 2020년에는 각각 71.5%, 64.9%로 급감하며 민간 발전사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6개의 발전자회사 및 민간발전회사에서 생산한 전기는 전력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다. 전력거래소는 전력시장 운영 및 전력계통을 운영하는 준정부기관으로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가 아니다.
2001년 분리 당시 수력원자력을 제외한 화력 5개사의 경우, 공정한 경쟁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 시장점유율, 전원구성, 지역설비 배분이 균등하도록 했다. 특히 수도권에 특정 회사가 집중되지 않도록 나눴다. 연료나 지역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명을 못 정해서 젠코(GenCo) A, B, C, D, E로 불리다가, 주력 사업장의 위치를 중심으로 작명하게 되었는데. 젠코A는 주력 사업장 삼천포화력발전소가 남동쪽에 있어서 한국남동발전이라고 작명되었다. 젠코B는 주력 사업장 보령화력발전소가 중부에 있다고 한국중부발전으로 작명되었고, 젠코C는 태안, 서인천 등 사업장이 서쪽에 있다고 한국서부발전으로, 젠코D는 하동화력이 남쪽에 있다고 한국남부발전으로, 젠코E는 동해화력(동해안)과 당진화력(서해안)이 주력 사업장이라서 한국동서발전으로 작명되었다. 주력 사업장의 위치와 별개로 사업장은 전국 곳곳에 있어서 일부 발전사는 사명 변경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후 2020년대에 들어서도 다섯 곳의 화력발전 자회사들은 매우 균등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 외 전력 관련
한전KPS
한전KDN
한국전력기술
한전원자력연료
한전산업개발
한국해상풍력
기타 그룹사
한전MCS
한전FMS
한전CSC
한일병원
한전의료재단은 서울시 도봉구 소재 한일병원(2012년 9월 1일 한전병원으로 변경했다가 2016년 3월 1일 환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전산업개발은 지분 절반을 한국자유총연맹이 소유 중이다.
이외에도 한국산업은행처럼 단골 출자기업으로 손꼽힌지라 여러 기업(특히 공기업들)들 중에 한전 지분이 들어간 곳이 의외로 많다. 대한민국 정부 지분 뿐만 아니라, 한전 지분으로도 간접적으로 정부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 예로는 한국가스공사 등이 있다.
3.2. 교육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 전두환 정부 시절엔 수도공고 졸업=한전 입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의 수도공고 입시는 21세기의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특수목적고등학교 따위는 저리가라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수도공고를 졸업하면 한국전력공사나 관련 계열사에 취업하기 쉬운 편이었다. 덕분에 과거 수도공고는 경기공고와 함께 서울권 공고 중 최고의 입시 수준을 자랑했다. 지금도 일부 특채가 있기 때문에 여타 공고와는 비교를 거부하는 컷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후 수도공고는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지정되었다.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 한국전력공사 주도로 설립되었으나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대학이다.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 : 위 에너지공대와는 별개의 학교로, 한국전력공사 산하의 사립 대학원대학이다. 사립이기에 이 또한 위 전력그룹사에 포함되기도 한다.
수도공과대학 : 1971년 홍익대학교에 매각하여 오늘날 홍익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4. 역대 임원
4.1. 합병 전
4.1.1. 경성전기
회장
시부사와 에이이치 (1909~1910)
타카마츠 토요키치 (1910~1915)
서광설 (1949~1950)
이태환 (1950~1955)
윤호병 (1955~1958)
이덕용 (1958~1960)
대표이사 사장
이채연 (1898~1900)
이윤용 (1900~1904)
H.R. 밀스 (1904~1909)
오오하시 신타로 (1915~1942)
무샤 렌조 (1942)
호즈미 신로쿠로 (1942~1945)
벌트 소령 (1945~1946)
이태환 (1946~1949)
이중재 (1949~1954/1956~1958)
고재봉 (1954~1956/1958~1960)
유동진 (1960~1961)
조인복 (1961)
4.1.2. 남선전기
회장
카시이 켄타로 (1937~1945)
대표이사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 (1937~1945)
장직상[51] (1945~1949)
박승철 (1949~1950)
이홍직 (1950~1952)
박만서 (1952~1960)
조희순 (1960~1961)
김덕준 (1961)
4.1.3. 조선전업 대표이사
노구치 준 (1943)
구보타 유타카[52] (1943~1945)
어빈 W. 젠트리 (1945)
윤일중 (1945~1948/1960)
서민호 (1948~1950)
이희준 (1951~1952/1960~1961)
이홍직 (1952~1960)
황인성 (1961)
4.2. 합병 후
역대 사장
이사장: 1984년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제정에 따라 신설되었으나, 1997년에 폐지되었다.
최순달 (1984~1985)
손재식 (1985~1988)
이찬혁 (1988~1990)
김식 (1990~1991)
박동진 (1991~1993)
문희성 (1993~1997)
대표이사 사장
초대 박영준 (1961~1968)
2대 정래혁 (1968~1970)
3대 김일환 (1970~1971)
4대 김상복 (1971~1973)
5대 민충식 (1973~1976)
6대 김영준 (1976~1982)
7대 성낙정 (1982~1983)
8대 박정기 (1983~1987)
9대 한봉수 (1987~1989)
10대 안병화 (1989~1993)
11대 이종훈 (1993~1998)
12대 장영식 (1998~1999)
13대 최수병 (1999~2002)
14대 강동석 (2002~2004)
15대 한준호 (2004~2007)
16대 이원걸 (2007~2008)
17대 김쌍수 (2008~2011)
18대 김중겸 (2011~2012)
19대 조환익 (2012~2017)
사장대행 김시호 (2017~2018)
20대 김종갑 (2018~2021)
21대 정승일 (2021~2023)
사장대행 이정복 (2023)
22대 김동철 (2023~)
5. 본사
본사 위치는 1986년부터 서울특별시 강남구 영동대로 512(삼성동 167)에 있었으나, 2014년 12월 전라남도 나주시 전력로 55(빛가람동 120) 광주전남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구 본사 자리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가 들어선다.
참고로 수서역 방면 고속철도를 GTX를 이용해 삼성역까지 일부 연장운행하는 방안이 검토 중인데, 이 계획이 실현되면 현재 한전 본사 부지 일부를 이용해 개발을 할 예정이다. 이 땅들은 공시지가 1조 이상에 현 거래가는 3조 이상인데, 이 정도 땅을 컨소시엄 없이 사서 개발할 능력이 되는 집단은 민간기업 중에서는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밖에 없으며, 둘 다 이곳에 엄청나게 눈독들이고 있다고 한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이 더욱 그렇다. 결국 현대자동차그룹이 가져갔다. 10조 5,500억을 써냈다고 한다.
나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건물 외관은 매우 현대적이나 내부 시설은 이전 삼성동 사옥에서 쓰던 가구들을 그대로 가져와 쓴다고 한다. 가구 이전비용이 새로 사는 것보다 비쌌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새로 사면 국정감사때 국회의원들이 뭐라할까봐 그랬다고 한다. 겉모습을 보고 초현대적 시설을 기대한 신입직원들이 많이 실망한다고 한다.
6. 채용과 직장생활
규모가 크고 전국 구석구석에 퍼져있는데다 5~60년대 출생 현직자들의 대거 정년퇴직을 대비하기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한국철도공사 등과 함께 채용을 많이 하는 공기업 중 하나이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공기업 중 한 곳이기 때문에 경쟁률이 굉장히 높다. 사무직 경쟁률은 2013년에 120:1 정도였으며, 2014년 상반기 공채는 350:1이라는 역대 최고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나마 같은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 쪽이 훨씬 더 승산 있을 정도다.
학점은 보지 않지만 2021년 기준 700점 이상의 토익 점수 또는 그에 따른 환산점수의 타 공인영어 점수와 자격증이 있어야 지원이 가능하며, 이후 NCS, 면접 단계를 간다. 특이하게 서류접수를 할 때 전국권, 지역전문사원 으로 권역을 나눠서 채용한다. 공공기관 중 가장 많은 인원수를 채용한다. 2017년 하반기에만 600명 공채를 실시했으며, 2021년에는 상, 하반기 도합 1,100명이나 선발한다. 지역전문사원 권역별 채용은 최종 출신학교 소재지에 따른 제한이 없다. 예를 들어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한 A씨는 경북권이나 전북권에 지원할 수 있다.
단, 본사가 소재한 광주전남권은 광주,전남지역 소재지의 최종학교 출신자들만 응시가 가능하다(제한경쟁). 지역전문사원 채용 확대로 인해 본사이전지역인재 의무채용의 수가 좀 줄었다.
채용단계는 NCS를 기반으로 한 서류, 필기, 면접전형으로 구성된다. 서류는 어학과 자격점수의 합산으로 합불이 결정된다. 어학 점수는 토익 기준 850점이 만점이며, 다른 어학 성적도 자체 기준표에 의거 토익으로 환산 후 적용한다. 자격점수는 사무직과 기술직이 다른데 대부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이상은 기본으로 갖고 있고 기술직 기준 기사 1개 이상은 소지하는 편이다. 이외에도 토익 스피킹 레벨 7 또는 오픽 IH 등급을 취득해도 5점의 가산점을 주며, KBS 한국어능력시험 3+ 이상 등급도 가산점이 있다. 하지만 사무직 같은 경우 최종 선발인원의 100배수를 서류에서 뽑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서류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없는 편이다. 서류단계에서는 자기소개서 내용을 적/부로 판단하므로 자소서의 비중은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만약 서류 점수가 작년 합격선과 비교할 때 현저히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애초에 지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서류전형 발표 후 2~3일 이내에 본인의 생년월일과 증명사진, 면접용 유니폼 사이즈를 입력하는 창이 뜨는데, 이 기간 내에 입력하지 않으면 서류에 합격했어도 필기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므로 유의하자.
필기시험은 2017년 하반기부터 100% NCS로만 반영하고 있다. 문제 수는 해마다 다른데, 2017년 하반기는 50문제를 65분 안에 풀어야 했고, 문제 형식도 다른 공기업의 NCS와도 판이하다. 필기시험에서는 2.5배수를 합격시킨다. 2018년 하반기부터 사무직을 제외한 기술직군에 전공시험이 도입되었다. 기존의 NCS 영역 중 기술영역을 전공시험 15문제로 대체하여 총 55문제(NCS40+전공15)로 바뀌었다. 시험시간은 동일하게 60분이고 전공시험에서 9문제이상 맞히지 못하면 과락 처리된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1차 역량면접을 통해 1.5배수를 합격시키고 그 다음 2차 종합면접을 실시하여 높은 점수를 받은 순서대로 최종합격자를 선발한다. 2019년 하반기 기준, 수도권으로도 신입들이 다수 배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수도권 배치라는 건 전국권에 응시했었다는 건데, 해당 권역 10년 의무근무인 지역전문사원 도입으로 인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2020년부터 경기북부(고양시, 의정부시, 파주시, 포천시, 양주시, 동두천시, 가평군, 양평군, 남양주시) 권역을 따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경기북부 모집단위 분할로 인해, 고양시, 의정부시, 남양주시 위주의 경기북부 거주민들 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2020년 하반기 부터 사무직군 서류배수가 70배수로 변경되었다. 2021년 상반기에도 역시 70배수를 선발하였고, 토목직군에서 지역권에 중부권을 추가하여 선발하였다. 중부권역은 강원, 충북, 대전세종충남, 전북, 광주전남권이다. 2021년부터 대졸공채 기준 채용인원이 많이 감소하여, 전기직의 경우 스펙의 인플레이션화 현상이 벌어졌고, 그 영향으로 경쟁률이 엄청나서 서류 통과부터 상당히 힘들어졌으나 서류배수가 늘어나면서 필기 경쟁률이 높아지는 대가와 서류 통과를 교환하였다.
2024년 상반기에서는 총 채용인원이 127명으로 급격히 감소했으며, 사무직 서류배수는 기존대로 70배수이나, 기술직인 배전, 송변전직은 30배수로 늘어났다. 또한 자기소개서는 필기전형 합격자에 한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외국어 성적 및 자격증, 가점 등에 대한 증빙서류도 1차면접(역량면접) 합격자에 한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승진제도가 다른 공공기관보다 유연해서 대졸자는 빠르면 5년 8개월 만에 차장을 달 수 있고, 보통은 9년 정도면 차장을 달 수 있다. 위와 비슷하게 빠르게 승진할 수 있는 공공기관 중 하나는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있다.
한국전력공사는 고졸과 대졸의 차이가 딱 4호봉 차이며 그 외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직장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매년 상,하반기 체험형 인턴을 채용중이다. 사무/기술직으로 나뉘며 1차 전형은 자소서 적부 및 어학+가산점 등 정량평가를 통해 모집 인원의 2배수를 선발하고, 2차 전형은 인성 검사 및 자소서 검사를 통해 최종 1배수를 선발한다. 아이러니하게 서류 전형이 정규직보다 훨씬 빡센데, 사무직은 115점, 기술직은 135점 이상이어야 안정권이며, 남서울지구는 사실상 만점을 받아야 겨우 합격이다.
7. 사가
백두산 줄기따라 한라산까지
연연이 이어가는 귀한 동맥을
한마음 한 뜻으로 가꾸어 가는
우리는 횃불이다 겨레의 등불
나가자 한국전력 전통을 이어
어둠을 이겨내자 광명의 역군
안호심 작사, 김동준 작곡
8. 스포츠단
1945년 남선전기 배구단에서부터 출발했을 정도로 역사가 깊은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배구팀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부진을 2010~11 시즌을 기점으로 다크호스로 떠오른가 했더니... 2011~12 시즌 사상 최악의 사건에 팀의 주전급 선수 다수가 연루되어 영구 제명되었다. 그 여파를 견뎌내는데 시간은 필요하지만 준프로화된 이후에 과거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탈피해 매년 드래프트에서 상위권 선수를 지명하며 팀을 만들어가고 있다.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대한배구협회 회장을 자동 겸임하기도 했다.
한때 실업 야구단인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을 끝으로 구단을 해체했고 현재는 사내 사회인 야구단만이 남아있다.
2019년 럭비단의 모 선수 및 자녀가 성남 어린이집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논란이 일자 공식입장을 표하며 사과했다.
9. 노동조합
전국전력노동조합: 한국노총 전국공공산업노동조합연맹 소속
한국전력 노동조합: 미가맹
10. 관련 문헌
경전 이십년사(일본어) - 경성전기. 1929.
경성전기주식회사 육십년 연혁사 - 경성전기. 1957.
남선전기주식회사 현황 - 남선전기. 1958.
한국전기 백년사(상, 하, 1987)
한국전력 사십년사(2001)
11. 여담
과거 서울특별시의 도시철도로 기능했던 서울전차와 부산광역시의 도시철도 역할을 했던 부산 전차[78]를 서울전차는 경성전기로부터 노선을 받아 66년까지, 부산 전차는 사기업이던 시절인 1961년부터 1968년 폐선될 때까지 7년 동안 경영하기도 했다. 원래 남선전기가 운영했었는데, 이 회사가 한국전력공사로 넘어가면서 같이 넘어갔던 것이다.
한때 종합뉴스채널인 YTN의 최대주주였다. 정확히는 자회사인 한전KDN이 최대주주. 1997년 연합뉴스로부터 인수하였고, 2024년 현재 유진그룹이 YTN의 최대주주이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서울 근무 직원들을 위한 직원 숙소를 운영하고 있고, 한국전력공사 및 산하 계열사의, 수도권 소재 대학에 다니는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초대 사장인 박영준이 광복군 출신이어서 창립 초기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들이 많이 근무했다. 박영준 사장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서 근무했던 김문택을 비롯해 권태휴, 이윤장, 김영오, 유해준 등이 간부로 근무했고 광복군 지대장이자 원로였던 이준식은 말년에 한전 고문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