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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6:22-24 두 눈과 한 눈
마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인 산상수훈의 중요한 흐름은 두 가지 문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인 ‘하나님의 의’요, 또 하나는 그와 대비되는 땅에 속한 세상의 체제인 ‘인간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데 결국 [인간의 의]가 득세를 하면서 인간은 갈등을 계속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뿌려지고 자신의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역시 두 주인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문제입니다.
두 주인의 문제는 동시에 [눈]과도 관련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에 속해 있느냐를 확인하게 됩니다.
눈은 본문에서 대비되어 나타나는 두 개의 눈이 있는데, 원문으로 눈의 종류를 [하프로스]와 [포네로스]라고 합니다.
소위 개역 성경 표현대로라면 (성한) 눈과 나쁜 (악한) 눈입니다.
그렇다면 ‘눈이 성하다’라고 할 때 이 성한 눈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래 적 의미로는 ‘순진한’ 혹은 ‘명확한’을 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한 눈인가요? 한결같은, 그리고 하나의 눈이 성한 눈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대비되는 나쁜 (악한) 눈은? 하나 이상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개로 보이기에 복잡하고 혼돈하게 하는 눈입니다.
그래서 (마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이 말씀은 성경을 읽는 이들이 도무지 상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으로 원문과는 해석에 다름이 있습니다.
본문에 이 눈은 결코 성한 눈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실족케 하는 눈이기 때문에 빼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9절에 보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는 두 눈으로는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적 생활에 혼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눈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다른 눈으로는 재물을 섬기고 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람은 두 주인은 섬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의’가 적당히 어우러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나쁜 눈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악한 눈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선악에 속해 있는 눈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악에 속해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모든 우주 만물을 선악(지식)의 관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고, 상대적인 세계로 밖에 볼 수 없는 눈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인 세계는 비교의 세계이며, 두 개 이상의 회비를 반복하는 복잡한 눈의 세계입니다.
결국 하나로 표현하면 악한 눈이지만 이 눈은 복잡한 눈이라는 것입니다.
시시 때때로 변화하는 눈이며, 문화와 가치의 변화에 따라 선악의 기준이 달라지게 되는 눈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역사에서 살펴볼 때, 성경의 역사는 눈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3:5-7)“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나무를 본 즉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는 눈, 그렇게 보고 있는 눈은 무엇이며, 실과를 먹은 후 밝아진 눈은 또 어떤 눈입니까?
밝아진 후에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밖에는 보지 못하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는 철저히 가려진 눈이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환하게 볼 수 있어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는 눈입니다.
밝아져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악한 눈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보는 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것을 조금 덜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의 옷으로 치장하고 목에 힘을 주며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빼어버려야 할 눈이요, 들보입니다.
(겔 6:9) “너희 중에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음란한 눈과 우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니 하나입니다.
(사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쇄패 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그래서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번역의 문제점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는데, 즉 “빛이 어두우면” 의 부분만을 살펴볼 때, 직역하면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움이면’이라고 해야 합니다.
너의 가진 빛이 곧 어두움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악한 것,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체계가 그들의 빛이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그 삶이 어떠하겠느냐? 라는 반문입니다.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어두움의 정도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20장에서 품꾼과 포도원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과 품꾼의 대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선을 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품꾼의 눈이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품꾼들은 여전히 주인의 처사는 옳지 못하며, 불공정한 악한 행위라고 질타합니다. 불공정 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며, 분배의 정의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러한 비유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내놓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도무지 그러한 비유의 참뜻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져 고개만 갸우뚱해질 뿐입니다.
이러한 눈은 어떤 눈이기에 그러한가. 어두움을 빛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빛을 악하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질타합니다.
선을 악으로 볼 수밖에 없는 눈, 그 눈이야 말로 빼어버려야 할 눈이 아니겠는지요?
그와 반면에 성한 눈은 simple한 눈을 말합니다.
학자인 키텔은 그의 신학 사전에서 성한 눈(헬라단어 하플루스)이 simple 의 의미로도 쓰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TDNT, Vol Ⅰ, 386쪽 참조)
simple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까지 새로워지지만, 여러 개의 눈으로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눈을 말합니다.
예수의 사역은 바로 이와 같은 눈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실족하게 하는 눈을 빼어버리고 두 눈을 하나(single)의 눈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역입니다.
멀쩡한 것 같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외눈박이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두 발을 가지고 실족하기 보다는 절음발이가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절름발이가 되는 것이요, 외눈박이, 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신앙인은 정상인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눈을 빼어버리고 살기에 어찌보면 미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누가 큰 자인가를 경쟁하는 곳이요, 크고자 하는 관심 밖에는 없는 곳인데, 이것이 눈 밖에 있는 것이라는 말은 세상에 대하여 이미 낙오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도리어 세상의 눈 밖에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마18:1) 라고 묻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러한 눈을 빼어버리기란 쉽지 않은가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인들은 모두가 큰 자가 되고자 경쟁하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좀 더 큰 자가 되고자 저렇게 야단들입니다. 그럴 때마다 말세론자들의 혹세무민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리들에게 떡 일곱 개를 가지고 약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신 후 바리새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할 때 예수는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때에 (마 8:16-18)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에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이러한 탄식 후에 바로 등장하는 사건이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는 장면입니다.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제자들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일련의 기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우리들의 감겨져 있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얼마나 예수의 관심사였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것은 결국 이론이나 어떤 이적을 행함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눈이 뜨여지게 됩니다.
잘못된 눈을 빼어버리는 작업은 동시에 눈을 뜨게 하는 작업입니다.
세상의 눈을, 실족케 하는 눈을 빼어버려야 하나의 눈으로 옳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 1:18-19)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품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에서 섬기다( douleuw 듈류오) 라는 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을 보면 ‘섬기다“는 타동사로, 그래서 섬기는 대상을 보면 목적어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든지, 재물을 섬긴다든지,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말로는 또한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몇 가지 독특한 동사들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소위 ‘여격 지배 동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에서 보면 목적어를 취해야 될 듯한데 여격을 취하는 동사들이 있습니다.
문법학자들은 이를 편의상 여격 지배 동사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격 지배 동사의 대표 격이 ‘섬기다( douleuw 듈류오, 예속되다, 속박되다)’는 동사입니다. 이 일련의 여격 지배 동사들의 성격과 뉘앙스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목적격을 쓰지 않고 여격을 쓰는 이유와 까닭을 조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결코 목적격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적어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제약성이 도리어 문제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공경한다.”거나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예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속박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에게 예속되어 있느냐 아니면 재물에 예속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섬긴다는 말의 의미에 가장 맞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완전히 예속이 될 때만 하나가 되는 것이요, 그러할 때 섬긴다는 말도 그 의미에 맞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에 예속되어 있으며 자신이 현재 어디에 현주소를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어 있느냐 아니면 재물에게 소속이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두 곳의 시민권을 가질 수 없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재물과 하나님이 동시에 우리를 살게 하는 주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눈은 어떤 눈인지요?